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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4.27. 매일성경 묵상


*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뭔가 빠진 것 같더니만 이 중요한 것을 깜빡했네요. 너무 늦어서 죄송합니다. 


본문 : 야고보서 4장 1-12절

지혜 다음에 다툼의 문제, 욕심의 문제가 다루어 진다. 지혜(물론 세속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와 욕심이 만나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난다. 분쟁과 갈등은 이런 환경 하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다툼의 문제는 구함의 문제로 이어진다. 정확하게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의 문제로 이어진다. 욕심이 있는 한 지혜도 소용이 없다. 욕심이 있을 때의 지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 첫째, 욕심은 지혜가 참으로 유익한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그 대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당화할 뿐이며, 그래서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에만 집착되게 된다.  지혜는 주로 그 방법을 찾아내는 시녀노릇을 할 뿐이다. 둘째, 그래서 지혜는 다른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본연의 목적을 행할 수 없게 된다. 욕심을 내도 가지지 못하니 살인한다. 부러워하여도 얻지 못하니 서로 싸운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방법이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지혜롭지 못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이는 원하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줄 수 있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택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어디서 오며, 그것을 누가 주는지를 잘 안다. 원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욕심내고 죽이고, 부러워하여 싸우는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그대신 구한다. 하나님께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하나님께 구해도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이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주심’에 대해서 오해해서는 안된다. ‘기도하면 다 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오늘 말씀이 이를 분명히 한다. “구해도 받지 못함은 정욕대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구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욕심대로 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구함은 얻지 못하게 하신다. 그래야 하나님께 대한 구함이 사람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는 일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시라. 우리의 모든 욕심이 다 성취된다면 우리 영혼은, 그리고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욕심대로 구했는데 그 구함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는 우선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어떤 일을 행하시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굳이 구분을 한다면 욕심대로 구했는데 그것을 얻게 되는 것은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태초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도록 ‘내버려 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두 가지 길을 열어놓으셨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쥐어 주시는 방법이고 하나는 욕심으로 추구해서 얻는 방법이다. 앞쪽은 복이지만 뒤쪽은 우리가 흔히 ‘유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가 욕심대로 살기를 원하니 한 번 그렇게 살아보도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다. 그 욕심이 이루어지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이루어진 욕심은 과연 그 사람을 진실로 풍성하고 자유롭게 하고, 또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욕심을 부릴 때마다, 물론 그 욕심이 내가 바라는 것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선악과’에 손을 대려는 시도임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다. 잘못 구하는 것이니 그 마지막 열매는 결국 잘못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성경은 욕심대로 구하며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성도들을 ‘간음하는 여자들’이라고 부른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데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욕심내며 그 세상에 의지하려고 하니 그런 성도들은 당연히 ‘바람 난 유부녀’가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태도는 단지 ‘세상과 벗이 되는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 된다.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되신단다, 아니 내가 그 분을 나의 원수로 만든단다, 그 일이 우리가 ‘욕심대로 구하며 사는 삶의 방식’을 따를 때 일어나는 일이란다. 그러니,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적당히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니,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이다. 그냥 넘어갔다가는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나중에 큰일난다. 그러면 언젠가 나의 원수로 행하시는 하나님을 보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세상과 벗이 되려는 시도,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것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교만’이다. 교만은 단지 자랑하고 뻐기며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만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해서 살아가려는 것이다. 이것이 교만의 본질이다. 그리고 이것이 최고의 교만이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만족을 얻으려는 삶의 태도 말이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을 단지 감각적이고 순간적인 것들(돈과 물건 뿐만이 아니다. 지식, 명예, 안전 등도 여기 포함되며, 그런 것을 얻기 위해서 우상에 의지하는 일도 포함된다)보다도 못한 분으로 대접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진실로 인정하며 그래서 그 분의 은혜만을 구하는 사람들, 그 ‘겸손한 자(단순히 자랑하지 않고 나대지 않고 뻐기지 않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태도이지 사람이나 이 세상에 대한 태도가 아니다. 그런 태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서 파생되는 것이다)‘들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저 겸손한 자가 되면 그만이다. 예수님만을 남편으로 알고, 그 한 분 남편으로 만족하며, 그 남편만을 의지하면서 살아가기만 하면 된다. 힘들다고? 물론 힘들다. 적어도 당장은 그렇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습관을 거스르는 일이고, 또 이 세상과는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 보라. 조금씩 조금씩 쉬워질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삶이 세상과 친구로 살아가는 삶보다 훨씬 더 평안하고 든든한 삶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선하고 완전한 남편을 떠나 겉만 화려한 불완전한 남자와 살아가는 여인이 과연 진실로 행복할까? 또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 ‘지혜롭게’ 잘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진실로....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이것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은 ‘욕심’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그래서 우선 입장에서 보아야 한다. 마귀는 주로 우리의 욕심을 통해서 우리를 유혹한다. 그래서 마귀와 싸운다는 것은 곧 우리의 욕심과 싸우는 것이 된다(논리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도 그렇다. 거의 모든 영적인 전쟁은 바로 이것을 통해 이루어 진다. 자꾸 영적인 전쟁을 사탄과의 능력대결로 이해하려는 것은 그 것이 자신의 욕심과 싸우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진짜 싸움은 피하는 셈이 되고, 결국 진짜 싸움에서는 지고 만다. 우리의 진짜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다). 그런데, 욕심과 싸우는 방법은 그 욕심과 직접 싸우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첫번째 단계에서는 욕심이 받아들이고 성취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다스리고 싸워야 할 대상이라는 점을 인식하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이 단계에서는 욕심과 대적이 되어야 한다. 직접 욕심과 싸워야 한다. 그렇지만 곧 싸움의 방식은 바뀌어야 한다. 그 다음 단계에서부터 싸움은 “하나님께 순복”하는 싸움이다. 욕심을 버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싸움이다. 같은 것같지만 다르다. 욕심을 버리기 위한 싸움은 그저 내 힘으로 내 내면의 악한 욕망과 싸우는 일이 된다. 인간으로서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욕심은 항상 모습을 바꾸어 교묘하게 마치 욕심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여 우리에게 다시 다가오기 때문이다(이 참에 욕심이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는 더 악한 욕심이 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는 일도 유익하겠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싸움은 이와는 다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욕심이 사라지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싸움은 오히려 반대편으로 나아가는 일로 나아간다. 아이러니가 있다. 욕심을 없애는 일에 집착하고 그 욕심을 스스로의 힘으로 없애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더 그 욕심에 휘말리게 된다. 악덕들의 특징이 있다. 전략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악덕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을 통해 우리의 의식과 존재 속에 자신의 자리를 잡는 것이다. 그래서 악덕은 오히려 그 악덕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는 일을 통해 효과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 참된 선, 지극한 선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말이다. 직접 악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선에 순종하는 일 말이다. 그런데, 선에 그리고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단순히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욕심의 문제를 우상숭배와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우상숭배란 원래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할 우리가 우상에게서 만족을 구하는 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만족하면 만족할수록 그만큼 우상에게서 만족을 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늘 본문의 말로 표현하면 ‘정욕대로 구할’ 필요가 없어진다. ‘간음하는 여인’이 될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한다. 그 분께로 가까이 가야 한다. 그러면 사탄에게서는 멀어진다. 욕심으로부터도 멀어진다. 그렇게 마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래서 더 손쉽게 그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게 된다. 사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면 그 분께서 만족하게 하시고, 그려면 굳이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그리고 하나님을 진실로 가까이 할 수 있다면 실제적으로도-욕심에 끌려서 죄의 유혹을 받을 필요가 없어진다(개인적으로 이것이 나의 신앙적인 목표다. 내가 그 분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서 다른 곳에서 만족을 찾을 필요가 없는 상태가 되는 것 말이다. 실제로 나는 한시적으로나마 그런 만족을 맛본 적이 있다. 그래서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인간의 상태라는 것을 확신한다. 그래서 지금도 그 만족을 위한 싸움을 그만두지 않고 있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는 환경으로 들어가려고 애쓰고 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높이시리라”

손과 마음은 직결되어 있다. 마음이 원하는 것을 손은 취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손을 깨끗이 하려면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결국 마음 속에 있는 두 영역 중에서 한 영역을 없애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과 벗하고 싶어하는 마음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 중에서 세상과 벗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 그 음란한 마음을 버리는 것이다(그 방법은 위에서 이미 말했으니 생략하자. 단지 그 방법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데 있다는 것만 반복하면 충분하겠다). 그러나 그 마음은 저절로 없어지지 않는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웃음을 울음으로 바꾸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를 깨달아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께는 또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삶의 태도였는지를 통감해야 한다. 그래서 울고 애통해야 한다. 웃음을 주고 울음을 사야한다. 그러나, 이게 다가 아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것은 단지 과정이다. 참된 기쁨, 참된 만족을 얻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높이시리라’ 그 날의 영원한 영광을 기다리며...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라 율법의 재판자로다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율법은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판단하는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가 아니다.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명령을 저버림으로써 오히려 율법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마치 율법이 형제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비방하라고 말하고 있듯이 행동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율법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판관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다.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다 재판관이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할 존재들이다. 그 누구라서 감히 입법자요 재판관의 자리에 설 수 있겠는가? 비방과 판단... 이것을 피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살아가는 한 실제의 삶에서는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에게 생각하고 또 분별하는 이성이 살아움직이고 있는 한 우리는 무엇을 목격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무언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높은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성을 저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바로 ‘전인’이기를 포기하는 일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황이정승식의 사고를 가장 수준높은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곧 도적적 아노미와 상대주의로 이어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판단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부도덕하고 불의한 것을 보면서 비난하고 비방하지 않는 일도 또다시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러려면 그런 일들을 보면서도 전혀 감정이 움직이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생각에는 본문의 이 요구가 모든 일, 모든 사람에 대한 도덕적 판단중지를 요구하는 명령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판단과 비방보다는 그 의미의 강도가 훨씬 셀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옳고 그름은 판단해야 한다. 그럴만한 일을 했다면 비난을 가하기도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서 그 사람 전체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이 되거나 혹은 그러한 행동 때문에 상대방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이야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 생각에 본문에서 말하는 판단과 비방이란 바로 여기에 이른 판단행위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성경은 우리의 판단행위가 여기까지 가는 것은 주제넘는 것이며, 그것은 곧 스스로 율법의 제정자의 자리, 재판관의 자리에 앉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찌 살아갈 수 있겠는가? 또 사회는 어떻게 유지되고 보존되겠는가?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행동이나 국가나 어떤 집단의 그 어떤 선택에 대해서도 판단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 말씀은 그래서 두 가지의 적용점을 남긴다고 할 수 있다. 첫째, 평가(판단-judge이 아니다. 단순히 평가-evaluate이다. 그리고 분별-discern이다)해야 한다, 그리고 비난을 가하고 그러한 옳지 못한 선택에 대한 책임을 묻는 일도 필요하다. 그렇지만 그 일을 행할 때에는 무척 조심스럽고 신중해야 한다. 마치 재판관이 재판을 하듯이, 벌을 내리듯이, 그것이 자신의 당연한 권리이듯이, 그리고 그런 잘못은 전혀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듯이 그런 자리에서 그 일을 행해서는 안된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평가하고 비난하는 일은 될 수 있는대로 자제해야 한다. 그래야 그 선을 넘을 가능성 또한 그만큼 줄어드니까... * 실제로 이 일은 이렇게 말하는 저에게 가장 힘든 일인 것같습니다. 저 처럼 어떤 일이나 혹은 사람을 보는 눈이 까다로운 사람에게는 항상 이 부분에 대한 죄책감이 넘치고도 넘칩니다. 사실 저 자신도 형편없으면서도 말이죠. 그래서 그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랄 뿐이고, 도를 너무 많이 넘지 않으려고 애쓸 뿐입니다. 

“하나님, 오늘은 모두 우리가 무척이나 약한 부분을 들고 찾아오셨습니다. 욕심과 비판, 그리고 그로 인한 다툼의 문제는 아마도 그 모든 문제들 중에서 우리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 모두를 용서해 주시고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일들에 관한 한 그것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항상 그 자리에만 주저앉아 있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완전히 이길 수 없는 것이라고 해서 싸움조차 하지 않는 그런 자리에 있지는 않게 해 주시옵소서. 내 일이건 다른 이들의 일이건 그저 하나님으로 만족해서 항상 머물러야 할 선 밖으로 넘어가는 일이 거의 없는 그 날이 속히 오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