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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묵상

2012.06.22. 매일성경 묵상


호1301to16.pdf


오늘 본문은 호세아 13장 1-16절입니다. 


“....이러므로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진실로 섬기는 것을 닮게 마련이다. 돈을 사랑하면 돈의 속성을 닮게 되고, 명예를 사랑하면 명예의 속성을 닮으며, 권력을 사랑하면 권력의 속성을 닮게 마련이다. 이것은 아마도 원래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을 닮아가라고 말이다. 이것이 사람의 “형상됨”의 의미 중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누군가가 우상을 섬기면 그 우상을 닮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우상의 가장 큰 속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허무함’이다. 원래 우상은 거짓이며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을 닮는다는 것은 바로 그 허무함을 닮는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허무한 것을 섬기니 허무해지는 것이다. 거짓 것을 섬기니 거짓으로 가득차게 되고, 없는 것을 섬기니 점점 그 존재가 가벼워지게 된다. 결국 ‘공허’만 남게 된다. 우상은 원래 인간이 스스로의 욕망을 투영해서 만들어 낸 거짓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왜 우상숭배자들이 어떤 의미에서건 욕심을 부리고 탐욕을 추구하게 될까? 첫째로는 우상 숭배의 동기 차제가 자신의 욕심을 합법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렇게 해서 우상을 섬기면 섬길 수록 자신의 속이 텅 비어가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욕심과 탐욕을 합리화 하려고 우상을 섬기게 되지만, 나중에는 우상숭배를 통해 더더욱 공허해 질 뿐이고, 그 공허함을 채우려는 노력이 다시 욕심을 부리고 탐욕을 따라서 살아가려는 추구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없는 것을 섬기게 되니 그 자신 또한 허무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우상(그것은 눈에 보이도록 만들어진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본질인 돈, 권력, 명예 등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다)을 섬기면 필히 허무하게 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우상숭배가 우상숭배자에게 남기는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형벌이다. 그런데, 벌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우상숭배,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이 위치하게 되는 것을 너무 너무 싫어하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못 견디어 하신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란 하나님을 없는 것, 허무한 것, 인간 자신의 탐욕보다도 더 못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가치없는 것으로 여기신다. 아침 안개, 이슬, 타작마당의 쭉정이, 또 연기로 여기신다. 이런 것들은 그냥 두어도 스스로 허무해지고 사라져 버리게 되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으으로 하나님께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고 그래서 적극적인 폐기처분의 대상이 된다. 


“... 내가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권고하였거늘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


우리가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영적으로 볼 때, ‘안전과 부요함’이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꾸로 일 것 같지만 실은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 대한 가장 적합한 설명이다. 논리적으로야 배 고픔이 해결되면 하나님을 더 잘 섬겨야 하고 더 잘 믿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대부분이 그 반대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고, 삶의 필요가 적절하게 공급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안전을 달라고, 필요를 공급해 달라고 기도하며 매달린다. 그도 당연한 것이 그것 밖에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안전과 부요함을 허락하시면 그런 하나님께 감사하고 더 의지하기 보다는 이제부터는 독자노선을 걷는다. 인간의 부족함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동기가 되어준다. 그 부족함이 클수록, 그리고 그 부족함에 대한 대책이 없으면 없을수록 그 동기는 더 절실해 진다.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른다. 부족함을 통해서 밖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은, 그리고 때로 회복은 그 부족함을 통해서 시작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출발은 두번째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부터 달라야 한다. 두번째 발걸음 부터는 나의 부족과 필요만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우리의 부족함은 우리의 불편함이나 비참함의 이유에서 머물러서는 안되고 항상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그 부족함이 채워질 때, 그래서 우리가 배불러 질 때, 그 배부름이 우리의 교만의 이유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는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신앙의 이유가 될 수 있다. 배부름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진실로 의지하며 신뢰할 수 있다면 그 신앙이야 말로 참된 것임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사자같고 길가에서 기다리는 표범 같으니라”


배부름 때문에, 그리고 안전함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한다면 그 분은 스스로 우리의 두려움이 되시고 부족함이 되신다. 사자가 되시고, 표범이 되신다. 그래야 그 두려움이, 그 부족함이 다시 하나님을 찾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때에도 그저 이 부족함과 불안함만 해결하는데에만 집중한다면 악순환은 계속될 수 밖에 없다. 한 번쯤은 이럴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이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순환이 계속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우리의 모든 부족함과 두려움이 다 하나님께서 사자가 되시고 표범이 되셨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배부르고 교만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의 부족함과 두려움이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로 더 깊이 돌이키고, 더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이유가 된다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선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나 하나만 기억하면 된다. 두렵고 부족할 때는 항상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그 분께 더 깊이 돌이켜야 한다고,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고 말이다. 이유는 모두 달라도 모든 부족함과 두려움에 대한 온전한 대답은 바로 그것 밖에 없다.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원하셔서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굳이 눈에 보이는 인간인 왕을 달라고 떼를 쓰니까 하나님 편에서는 정말 억지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왕을 주시기 전에, 그리고 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시고 주의를 주셨다. 왕을 가지는 일은 언제나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라고, 그리고 때로는 그 부작용이 심각할 수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래서 인간 왕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대상이 못된다. 요즘으로 치면 관리들이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왕의 부족함은 우리로 하여금 완전한 왕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를 소망하게 해야 한다. 왕은, 정치 지도자는 결코 이 땅 위에 우리 모두가 원하는 그런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그런 임무가 그들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정치 지도자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정치 지도자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거나 혹은 절대적으로 불신하는 사람들도 드문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어떤 지도자도, 설사 그가 내 마음에 쏙 들고, 내 성향과 딱맞고 내 이익에 합치하는 부분이 많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그 반대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너무 너무 완전히 기뻐하셔서 왕으로, 지도자로 세우시는 정치지도자가 있을까? 그래서, 우리에게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라고 요구하시는 그런 정치 지도자가 있을까? 아니면 그와 정반대인 경우가 있을까? 아니다. 없다. 모든 정치지도자는 양면성을 지닌다. 한쪽에서는 분명히 정치라는 영역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대편에서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세우신’ 사람이라는 것이다. 우리를 다스리는 정치지도자가 누구든지 우리는 그 정도의 시각에서만 그를 바라보아야 하고 또 딱 그만큼만 그에게 기대를 걸어야 한다. 그저 그 사람이라면 모두 신뢰하든지, 반대로 그 사람이라면 모두 반대하고 싫어하든지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한 태도가 아니다. 그저 하나님을 왕으로 두기 싫어하는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으로’ 하나님을 대신하게 하신 사람 정도로만 바라보고, 그가 내 맘에 들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항상 그를 통해서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주어야 할 것이다. 너무 믿지도 말고, 너무 불신하지도 말자. 정치적인 성향이 뚜렷한 우리들로서는 이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려고 애써보자. 


조금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해석을 덧붙인다. 12절부터 14절까지인데, 우리 말 성경에서는 무척 헤깔리게 되어 있다. 그것은 의문문을 평서문으로 해석하고, 그 뒤를 따라오는 문장들을 거기 맞춰놓았기 때문에 생겨나는 혼란이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무오성은 첫째 원본의 무오성을 말하는 것으로 사본과 번역본만 남아있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한글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할 주제는 못된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과 하나님,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바에 대해서는 충분한 정확성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성경은 무오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성경의 무오성이 번역본의 무오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함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서 숨으리라”


이 구절들은 이런 뜻이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곡식 단처럼 묶여졌고 그의 죄는 창고에 차곡 차곡 쌓였다. (그것 때문에) 해산의 고통(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징벌의 고통스러움과 갑작스러움을 나타내는 비유적 표현이다)이 그에게 임하였다. 그러나, 그(에브라임)는 결코 현명한 자(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왜냐하면 산문(産門)이 열렸을 때는 지체해야 할 때가 아닌데, 에브라임은 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에브라임을 스올의 손으로부터 속량해야 하겠느냐? 내가 그를 죽음으로부터 대속해야 하겠느냐? 오! 죽음이여, 너의 재앙이 어디있는가? 오 스올이여, 너의 파괴가 어디있는가? 나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이 구절들은 모두 한 맥락에서 읽혀져야 한다. 그것은 ‘나는 결코 후회(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재앙을 내리시는 것에 대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맥락이다. 에브라임은 불의와 죄를 너무 많이 저질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해산의 고통과 같은 고통스런 징벌을 주려고 하신다. 마치 산도가 열려 아이가 나오려는 상황처럼 급박한 상황인데도, 에브라엠은 그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서둘러 하나님께로 돌이키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신다. “내가 이런 자들을 죽음으로 부터 건져야 하겠는가? 내가 이런 자들을 스올로 부터 건져야 하겠는가? 내가 계획한 재앙을 취소해야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스스로 내리신 결론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과 스올을 소환하신다. 재앙과 파괴를 불러들이신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결코 이 일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15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결과가 묘사된다. 너무 비참하고 끔찍하니 개인적으로 읽고 묵상하시기 바란다. 그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런 징벌을 이야기하신다면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이 과연 어떠했을까? 적어도 그 징벌보다는 훨씬 더 심각했을 것이다. 


“하나님, 우리를 용서해 주소서. 우리는 지금 당장 편하면 나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가던 방향으로만 흐르던 대로 흘러 갑니다.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우리가 떠나온 곳을 알 수 있는 지각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가장 안전할 때, 가장 평안할 때, 제일 잘 나갈 때 그 때 나의 진짜 자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그런 예민함을 주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배부름 때문에, 우리의 안전함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에 계신,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 더 온전히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함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두려움이 되시는 일은 만들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