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요한복음 1장 1-18절
오늘부터 새벽에는 요한복음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대개 요한복음은 처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읽어보기를 추천하는 책이지만 실은 요한복음이 네개의 복음서 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복음서는 네 개이지만, 크게 나누면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보는 예수님을 보고, 또 기록한 관점이 비슷하다고 하여 그렇게 부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이 세 복음서와는 달리 사건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중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이 만만치가 않고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중심이기 때문에 우리는 요한복음을 통해서 그 어느 책에서보다 우리 예수님의 음성을 더 많이 듣게 됩니다. 그것이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유익입니다. 오늘부터 함께 묵상할 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 주님의 목소리를 많이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저 은혜받으려는 애매한 목적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생생한 음성을 많이 들으시겠다는 그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새벽마다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풍성한 생명의 꼴을 많이 먹고 튼튼하고 풍성한 영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복음서의 역할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복음서가 어떤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데요, 요한 복음이 소개하는 예수님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또 믿고 살아가게 하려는 예수님은 무엇보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여기 나오는 ‘말씀’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은 단순히 기록된 말씀이나 혹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이 단어가 “로고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며, 모든 진리의 근원이며, 모든 이치 중의 이치이며, 세상을 움직이는 능력이고, 또 그 능력과 진리 자체인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고 소유하고 있는 존재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요한복음의 처음에 나오는 말씀이란 이것 없이는 세상도, 그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살아남을 수 없고, 선한 것도, 의미있는 것도 있을 수 없는 그런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는 그 말씀이 모든 것을 만들었고 있게 했으며, 거기 의지하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거나 살아갈 수가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은 태초에 바로 그런 말씀, 로고스가 계셨고,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결국 오늘 본문은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엄청난 로고스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육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허무하고 썩어서 없어질 수 밖에 없는 연약하고 나약한 인간의 몸을 말합니다. 혹은 그러한 허무하고 심히 부패한 인간 차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은 원래 육신이 될 수 없습니다. 원래 이 두 가지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물과 기름보다 더 섞이기 어렵습니다. 무한하시고 상상조차 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썩어지고 없어질 수 밖에 없는, 심히 부패한 인간이 되실 수는 절대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육신을 입었다는 말은 단순히 모양만 갖추신 것이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배도 고프고, 아프기도 하고, 더러워지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하고, 늙기도 하는 그런 죄의 결과 때문에 저주받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간이 되셨습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사람이 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고 하늘나라로 이끌어 들이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온 우주를 통틀어 구절만큼 놀라운 사랑의 표현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나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때로는 나도 절망하고 나도 힘겨워 하는 나와 꼭 같은 한계 투성이의 육신을 입으실만큼, 스스로 사람이 되실 만큼 사랑하십니다. 사람이 되시고 그렇게 자신을 우리에게 통째로 내어주어 죽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나는, 하나님인 나는 너를 사랑하여 너와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사랑을 고백하고 계시며, 그 사랑을 그렇게 증명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그 분이 요한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첫번 음성입니다.
때로 살아가다 보면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너무 무덤덤해져서 그런 질문이 생기기도 하지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도 그런 질문과 회의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황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흔들어 놓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그것은 그 분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 그 분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포기하시겠습니까? 그 사랑을 변하게 하시겠습니까? 그럴리가 없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우리를 향한 사랑을 거두어 들이실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의심되실 때마다,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실 때마다 “그래. 하나님이,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지? 그만큼 나를 사랑하셨지?”라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하시고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그 사랑을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알아가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그 사랑의 깊이와 크기와 넓이를 온전히 알아가는 가장 풍성하고 복된 과정이 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그 풍성하고 기이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하시는 복을 누리게 해주시며, 그 사랑 가운데 든든히 거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