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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09.05.수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빌립보서 1)


빌0101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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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1-2절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오늘부터 수요일에는 빌립보서를 함께 묵상하며 공부하겠습니다. 빌립보서는 네 장으로 이루어진 길지 않은 분량의 성경이지만,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성도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그것은 이 빌립보서가 굉장히 밝고 기운차며, 기쁨으로 가득 찬 그런 성경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빌립보서가 주는 영적인 유익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는 세상의 모든 상황과 형편을 넘어서는 기쁨의 능력이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이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 알려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았던 바울을 그 증거로 내밀면서 그런 기쁨을 누리며 사는 것이 실제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봐라, 그 기쁨을 실제로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러니 너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하고 말입니다. 빌립보서는 이렇게 우리가 얼마나 놀랍고 풍성한 은혜의 능력 가운데 있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면서, 어서 와서 그 기쁨을 취하고 그 기쁨을 누리라고 우리를 격려하며 초청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믿음이 주는 기쁨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잊어버린지가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때로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도 잘 알지 못한 채로 그저 상황에 따라서 일희일비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은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 때문에 그 누구도 완전히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별반 다름없이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해 계신가요? 만약 앞쪽에 속해 계신다면 이 기회를 빌어서 하나님께서 많이 감사하시고, 또 그 기쁨의 기초를 다시 한 번 더 확실히 다져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직 뒤쪽에 계신다고 해도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여러분이 빌립보서를 공부하면서 이 속에 있는 그 보석같은 교훈들에 여러분의 믿음을 더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신다면 누구나 그 기쁨을 향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누렸던 그 불가사의한 기쁨이 어떤 것인지를 맛보아 아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빌립보서 속을 흐르는 기쁨의 수맥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그 수맥이 우리 안에 영원한 기쁨의 샘으로 흘러넘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빌립보서를 주신 것입니다. 


로마로 호송된 바울은 한 집을 임대해서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비록 가택연금상태였지만, 바울은 그를 찾아오는 복음을 궁금해 하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며, 반대자들을 상대로 복음을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결실이 있었습니다. 비록 마음대로 돌아다닐 자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렇게 심각하게 방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로마 군사들의 보호 하에 더 안전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긴 했지만, 그가 갇힌 후, 그가 처한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극단적으로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로마에 가서 시저 앞에서 복음을 전하려는 꿈을 가지고 스스로 죄수가 되어서 로마까지 왔는데, 네로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고, 그래서 재판을 이용해서 황제에게 복음을 증거할 기회를 얻기는 커녕 이제는 감옥으로 이송되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다른 기회들마저 박탈당했던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다는 것은 이미 그가 공식적으로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재판을 받는다고 하여도 상황은 더 나빠질 수 있고 최악의 경우, 사형에 처해질지도 모를 상황이었습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빌립보 교회가 가장 먼저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네시모를 보내서 바울을 제정적으로 지원하면서 옥바라지를 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금방 풀려날 것이라고 기대를 했던 빌립보의 성도들은 기약없이 길어져만 가는 바울의 감옥생활과 더 깊어져만 가는 네로 황제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보면서 불안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의 교회도 그렇지만, 그 당시의 교회 안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도 있었지만, 작은 바람에도 쉽게 휘청거리고 넘어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바울은 그 누가 보아도 최고의 복음전도자요 목회자였으며, 하나님의 일에 최고로 헌신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인생이 어떠했는지는 바울과 개인적으로 가장 친밀하게 지냈던 빌립보의 성도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눈으로 보기에 바울이 지금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복음의 진실됨을 의심하게 만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서 일해왔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숨을 책임져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루라도 빨리 감옥에서 나오게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복에 복을 더해 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하나님을 위해서 평생을 바쳐 온 바울을 늙으막에 이런 식으로 대접한다면 그런 하나님이 어찌 선한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그가 전해 온 복음이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도데체 그 말씀을 전한 바울의 상황은 왜 나아질 줄 모르고 더 악화되어 가고 있으며, 이제는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연약한 성도들은 이런 의심과 회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분위기가 더 짙어지고 있었습니다 . 게다가 이런 기회를 틈타서 빌립보의 교회에도 자신들이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단적인 사람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범이 없는 숲 속에서 여우가 왕노릇하기 시작한 것이죠. 복음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틈에 어찌보면 그 복음을 보강해 주는 주장들이 들어왔으니 처음에 들었던 복음에 대한 성도들의 확신은 더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갇힌 것을 틈타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게 하려고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복음을 자신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는 악한 사람은 사람은 있게 마련인 것 같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과 또 다른 몇 가지 이유로 인해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쓰여진 편지가 바로 빌립보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편지는 굉장히 무거운 내용을 담을 수 밖에 없는데도, 실제로 읽어보면 전혀 심각하거나 어둡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최고의 기쁨과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따뜻한 사랑과 격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최악의 상태에 있는 바울이 그러한 바울을 바라보며 걱정과 의심에 빠져 가는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 쓴 편지인데, 이 편지만큼 밝고 따뜻한 편지가 없습니다. 온전한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된 편지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빌립보서는 역설의 성경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쓰여진 성경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런 기쁨으로 기뻐하라고 명령하며 격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논리를 거스르는 역설적인 믿음이 있다고, 그런 믿음의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 있다고 우리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상식적인 논리대로라면 최악의 상태에서는 최악의 메시지만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 섬겼는데, 그 하나님이 그를 최악의 상태에 방치하고 계신다면 그는 그 하나님을 결코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게 상식적인 논리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서는 그러한 사고방식을 송두리째로 뒤집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기쁨을 증거하고 있고, 그것을 권면하며 심지어는 명령하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마치 블랙홀에서 가장 밝은 빛이 발산되어 나오는 것이나, 퇴비를 뿌려놓은 밭에서 달콤한 꽃향기가 가득 풍겨나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도무지 있을 수가 없는 일들이죠. 그러나 빌립보서는 바로 그런 기이한 기쁨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세상의 상식과 논리를 거스르면서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우리의 믿음 안에는 우리를 그런 기쁨으로 기뻐하게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이란 실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상식이나 세속적인 기준과는 전혀 다른 눈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눈으로, 하나님의 눈으로 모든 것을 볼 줄 알게 된다면 그 때 우리는 빌립보서의 기쁨을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공부하는 동안 찾고, 두드리며, 또 구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빌립보서를 살피는 동안 저나 여러분에게 이런 눈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빌립보서는 '서신서'에 속합니다. 그것은 빌립보서가 편지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도 처음에는 편지였기 때문에 당시의 일반적인 편지들과 거의 비슷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편지를 쓰는 습관대로 처음에 발신자와 수신자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는 여기서 이 편지는 디모데가 대필한 바울의 편지로써 빌립보의 성도들이 처음 수신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만을 알리려고 했다면 바울은 그냥 이렇게만 썼어도 괜챦았을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노라” 이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만 적어도 누가 누구에게 보내는 편지인지는 확실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간단하게 하지 않고 장황한 수식어를 붙이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과 디모데를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수신자들을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편지는 편지이기는 했지만 그냥 평범한 편지가 아니었습니다. 이 편지는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마음, 사랑을 담아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수신자는 친구나 가족이 아닙니다. 사업파트너나 혹은 거래자도 아닙니다. 수신자는 성도들입니다. 감독들과 집사들입니다. 이들은 몸된 교회의 지체들로서 부르심의 자리는 달라도 사도 바울과 디모데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성도는 누구입니까? 지난 주일에는 교회는 주님께서 모이게 하셔서 주님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보면 교회는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항상 그 리스도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그 곳이 어디이든지 전부가 다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것이 그가 움직이고 숨쉬는 세상의 전부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로마에서 가택 연금상태에 있을 때에도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여전히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확신하는 한, 그는 어떤 장소, 어떤 환경, 어떤 상황에 있든지 바울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 최고의 기쁨의 편지를 남길 수 있었고, 지금껏 그 기쁨을 오고 오는 성도들에게 전하고 가르치며 전염시킬 수 있는 첫번째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많이 생각하고 관심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그가 하는 말을 살펴보면 됩니다. 돈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뭐라고 말해도 돈을 가장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녀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은 자식 밖에 모르는 사람이구요. 옥에 갇혀 있는 사도 바울이, 그리고 그의 곁에서 그와 함께 고난을 나누고 있는 디모데가 빼버려도 상관없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가장 관심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그들을 붙들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 사실만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을 말할 수 없는 기쁨 가운데로, 가장 불안하고 어두운 상황 속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 그 분 안에 있으면서, 그 분 안에 머무는 것만을 생각하고 붙들 때, 비로소 상황을 훌쩍 뛰어넘는 기쁨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단순한 원리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의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할 때, 뭐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합니까? “쳐다보지 말고 딴 생각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덜 아프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덜 울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 있을 때, 생각하고 집중할만한 다른 것이 없으면,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보게 되어서 상황 속에 갇히게 되고, 거기 주저앉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교만이 생겨나고 절망도 생겨나며, 슬픔이나 두려움도 생겨나게 됩니다. 성도는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이 너무 좋은 상황이어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어두운 상황 가운데 있어도 그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빛나고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있어도 정반대로 전혀 가치없어 보이고 귀챦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한 없는 사랑과 능력, 완전하시고 실수없으신 그 분의 섭리와 인도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으십니까? 우리가 이 진리를 더 많이 생각하고 이 진리에 더 강하게 사로잡힐수록 우리는 눈에 보이는 현실과 상황에서 그만큼 자유로워질 수 있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상식이나 세상적인 논리가 만들어내는 결론과는 전혀 다른 결론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 세상을 향해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소리칠 수 있게 됩니다. 


또 한 가지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사도 바울은 편지 받는 사람들을 부를 때, 뭉뚱그려서 한꺼번에 부르지 않습니다. “성도들, 감독들, 집사들”이라는 말로 각각의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부릅니다. 여기에 주님이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두 번째 비결이 숨어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내가 쓰는 이 편지를 받고 읽게될 너희가 과연 누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는 사도 바울의 사랑이 가득담긴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는, 지금부터 이 편지를 읽고 참된 기쁨 가운데로 들어가 그 기쁨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신비한 기쁨을 누려야 할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성도들, 특별히 세운 감독들, 그리고 귀한 직분을 맡은 집사들인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서를 공부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빌립보서를 나와는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불안하고 힘든 상황은 그것 자체로도 어려움을 주지만, 그런 상황이 더 큰 어려움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온통 빼앗아서 우리를 거기에 묶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꼭 같은 상황에 처해있어도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선택을 하고,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계속해서 개천에서 사는 미꾸라지로 살아가기도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개천을 박차고 오르는 용이 되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그런 이야기가 많이 드물지만, 한동안은 교도소에서 독학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곤 했습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나는 이제 죄를 짓고 전과자가 되었으니 어쩔 수가 없다, 그냥 이대로 살자고 생각했다면 그는 계속 출소와 입소를 반복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비록 죄를 지어 죄수가 되었지만 자신은 감옥에 머물 사람이 아니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바꿀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이것이 신념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 가지는 힘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가지는 생각이 이런 놀라운 일을 일어나게 한다면,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유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달리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아니 제대로 우리 자신을 보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더 훌륭해 지고 멋있어 지겠습니까? 

당시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투옥과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조금씩 심해져 감에 따라서 마치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불안해 하고, 두려워하며, 회의에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내린 사도 바울의 처방은 바로 “네가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이니 그것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모습만큼만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아무리 엄청난 능력이 있고, 그것이 비밀스러운 하늘의 복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될 수 있어도, 내가 나 자신을 나는 그것을 누리고 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또 그런 확신가운데 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상황이 주는 기쁨이나 슬픔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언제나 일희일비하는 불안정하고 가벼운 삶에 머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지 않는 하늘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고, 그 기쁨으로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확신한다면, 우리는 상황을 넘어서는 기쁨 가운데 능력있고 평안한 삶을 살아가며 주님을 위한 참으로 의미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기쁨은 세상은 모르는 기쁨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전혀 다른 기쁨입니다. 없어지지 않는 기쁨이고 흔들리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 누구도 절대로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고 절망의 순간에 오히려 더 빛나는 이해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 이유는 이 기쁨은 땅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이유가 있는, 하늘에 뿌리 내린 그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기쁨으로 초청받은 자들이며, 이 기쁨을 이미 허락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을 실제로 누리면서 살아가려면 내가 어디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어떤 삶의 자리, 어떤 형편에 있든지 나는 언제나 어디에 속해 있습니까? 바로 예수님 안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참다운 삶, 하늘의 기쁨을 누리는 그런 삶을 허락받은 성도요, 또 하늘의 직분을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면서 그 기쁨을 누리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기억하면서 각자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기쁨으로 덧입혀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권면합니다. 빌립보서를 함께 공부하는 내내, 하늘의 기쁨에 대한 관심을 잃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기쁨을 나의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욕심은 몰라도 이런 욕심은 꼭 부리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허락하실 때까지 조르고 또 졸라서 여러분의 것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감옥 속에서 가장 기뻐했던 바울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는 그런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기쁨을 위한 언약의 말씀들에 믿음을 더하며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큰 기쁨으로 기뻐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부터는 수요일에 잠시 짬을 내어서 몇 가지 기도제목으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혹시 함께 기도했으면 하는 기도제목이 있거나, 기도의 부탁을 할 일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저에게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함께 기도하는 기도에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한 마음으로 진심으로 기도하는 기도를 가장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제목] - 수요일 기도제목도 함께 올립니다. 광현교회 성도님들은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발바니다. 

  1. 먼저 우리 교회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와 오늘 설교를 생각하면서 기도하겠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모으신 그리스도께서 중심된 모임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로 모으셨고, 지금도 모이게 하시고 있음을 잊지 말게 해 달라고, 항상 중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분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들만을 기대하며 신앙생활하게 해 달라고. 또 오늘 말씀대로 우리 성도들이 나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임을 잊지 않게 해 달라고. 어떤 상황, 어떤 형편 속에 있든지 그것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하신 섭리와 인도 속에서 있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게 해 달라고. 또 무엇보다도 이 교회에 속해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항상 기쁘고 즐겁고 능력있게 믿음 안에서 살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1. 우리 교회의 교육부서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모두들 우리 자녀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미래이고 또 하나님 나라의 일꾼들이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교육부서가 갑자기 커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 교육부서들이 정말 아름답고 견실하게 잘 세워져 가게 해 달라고. 거기서 양육받는 아이들이 작기 때문에 더 제대로 커가고 더 훌륭한 신앙인들로 양육될 수 있게 해 달라고. 수고하시는 선생님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사랑하셔서 아주 좋은 전도사님을 보내주셨습니다. 9월 마지막 주에 인사하고 10월 첫주부터 사역을 시작할텐데, 전도사님께서 정말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양육하며 좋은 영향력을 많이 끼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1. 병원에 입원한 두 분의 성도님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이태을 권사님께서 반야월 안심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시고, 정금수 권사님께서 경대병원에 가벼운 뇌경색으로 입원해 계십니다. 두 분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훌훌 털고 일어나시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그 밖에 병환 중에 계신 성도님들을 위해서 함께 중보하며 기도하겠습니다. 


  1. 마지막으로 우리 개인의 기도제목으로 잠시 기도하겠습니다. 자녀들의 신앙을 위해서, 그들의 취업과 결혼을 위해서, 그리고 그 밖의 필요들을 하나님께 맡기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