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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09.12.수요저녁 -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빌립보서 2)


20120912WE (#1).mp3.zip


빌0101to02 - 2.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pdf




     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1-2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그러니까 모든 생물, 사물, 그리고 그런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관계와 질서, 또 그런 것들이 어우러져 만들어가는 수없이 다양한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고안, 그리고 그 분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든 것과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 치고 하나님의 성품과 생각, 그 분의 영광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자연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고, 그 자연이 돌아가는 모습 속에서 그 분의 성품과 일하시는 방식을 볼 수 있습니다. 17세기 미국의 영적 대각성의 중심 역할을 했던 조나단 에드워즈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은 묵상을 할 때면 언제나 말을 타고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로 가곤 했는데,  그 분은 거기서 저녁 무렵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 해가 다시 떠오를 것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묵상할 수 있었고, 비록 자신이 죽더라도 다시 살 것을, 아침 해와 같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게 될 것을 확신하면서 부활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새롭게 했다고 합니다. 해가 지고 떠오르는 것에서 죽음과 부활이라는 가장 복스러운 소망을 읽어냈던 것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성품, 그리고 그 분의 아름다움과 섭리를 알려주는 학교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에 대한 그림이 되어서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과 은혜의 통로가 되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자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한 우리 신앙을 위한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런 관계들 중에서 더 자연적인 인간관계일수록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더 좋은 예가 되어줍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관계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관계는 아마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일 것입니다. 부부관계도 자연스러운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 관계의 아래에는 어쩔 수 없이 필요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고, 그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부부라는 관계로 서로를 묶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그런 것들을 초월합니다. 필요 이전에 생겨나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물론 함께 살다보면 부모와 자녀도 서로에게서 이러 저러한 삶의 필요들을 공급받기도 하지만, 그것이 관계를 유지하는 동기나 기초가 아니며, 그런 것이 전혀 없어도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여전히 지속됩니다.      

      저는 이 부모와 자녀의 관계야 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관계들 가운데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부모와 자녀를 두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그 관계를 통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묵상하고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육신을 입은 인간은 보여지고 만져지는 것이 아니면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보이고 느껴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부모와 자녀관계를 이 땅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계신 분이 모두 자녀이며 동시에 부모이기에 잘 아시겠지만, 자녀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입니다. 부모로 부터 자신이 얻을 것을 먼저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물론 자신도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이 들면 그때부터 부모의 마음도 헤아리고 스스로 부모님을 진정으로 존중하며 섬기게 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부모를 향한 마음은 자기 자녀들을 향한 마음보다는 이차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도 치사랑이 없고 내리사랑만 있다고 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성경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 쪽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하는 측면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어떠한 마음으로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알려주고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적으로 볼 때는, 또 인격적으로 볼 때는 부모가 자녀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부모를 키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자주 자주 합니다. 부모가 부모 노릇을 하면서 오히려 그것을 통해서 자녀로 부터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문득 문득 깨닫게 되니까요.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자녀란 그 존재만으로도 크나 큰 복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감옥에서 빌립보서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1절과 2절은 그런 빌립보서의 인사말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있지만, 그리고 상황으로 봐서는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지만, 그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은혜와 평강, 그리고 기쁨이 흘러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빌립보의 성도들은 정반대로 자신의 투옥과 재판 때문에 그 평강과 기쁨을 잃어버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에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자신의 기쁨의 비결을 알려주고 그 안에 거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쓰게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쓰면서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쓴 것입니다. 물론 이 인사말은 바울이 다른 편지를 쓸 때도 동일하게 사용했던 똑 같은 인사말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바울의 이 인사는 결코 평상시와 똑같은 의미일 수가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 누구보다도 친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8절을 보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그만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의 성도들 또한 전도자요 목회자인 사도 바울을 끔찍히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감옥에 갇혔고, 그것 때문에 빌립보의 성도들은 크게 낙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낸 이 편지, 그리고 이 편지의 첫번 인사말에는 어떤 마음이 담겼겠습니까? 거기에는 감옥에 갇힌 아버지를 걱정하며 낙심해 있는 자녀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있을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가장 절절한 아버지의 사랑이 담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빌립보서에는 자녀를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 절절한 사랑이 말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빌립보서를 읽으면서 거기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마음을 읽을 수 있고, 그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항상 기뻐하기를 원하시며, 흔들리지 않는 기쁨 안에서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빌립보서는 우리에게 그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기쁨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분의 그 지극한 아버지 사랑을 담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 빌립보서를 읽을 때 우리는 기쁨을 위해서 읽어야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편지를 제대로 가장 풍성하고 능력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얻고 또 누리게 되는 기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그 기쁨을 생각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서에서 말하는 기쁨,  그러니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기쁨은 결코 얄팍하고 이유없는 기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그저 “나쁜 생각하지 말자. 기뻐하자. 또 기뻐하자”라고 한다고 해서 생기는 기쁨, 세간에 유행하는 긍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생겨나는 기쁨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이 말하는 기쁨이 그런 종류의 기쁨이라면 그것은 굳이 신앙 안에서 얻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기쁨은 이 세상 누구라도 생각만 조금 바꾸면, 다른 사람보다 조금만 더 낙천적이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그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누가 뭐래도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쁨이 예수믿는 믿음의 본질이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마땅히 기쁨을 누릴 수 있고 또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가볍고 흔한 기쁨이 아닙니다. 굉장히 무게가 있는, 굉장히 진지한 과정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치며 바꿀 것은 바꿔야만 얻을 수 있는, 그런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얻기 위해 이런 일들이 꼭 필요한 이유는 기쁨 자체가 그런 것들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기쁨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진짜 기쁨인 양, 자기가 참된 기쁨을 줄 수 있는 양,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기쁨같은 것은 아얘 없는 것인 양 참된 기쁨 앞에서 우리가 그리로 가는 길을 가로 막고 또 속이고 있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우리 안과 밖에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장애물들을 치워버리기 전에는, 그런 가짜들이 주는 얄팍한 기쁨의 정체를 깨닫고 그것을 가치없게 여기고 그 속임수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우리는 진짜 기쁨을 볼 수 없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고 또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빌립보서가 기쁨을 알게 해 주기 위해 쓰여진 사랑 가득한 편지이면서도 그 안에 아프고 힘든 책망들이 많이 담겨져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오해, 인간적인 미숙한 모습들, 그리고 거짓 복음과 변질된 복음을 가르치는 자들의 가르침이라는 장애물을 치워버리기 전에는 그 기쁨으로 다가갈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떠나고 버리라고 그렇게 힘주어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대학 때, 버스로 통학을 하면서 한동안 계속해서 버스 안에서 성경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때 그 버스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은혜스러워여서도 그랬지만, 그 때 읽은 것이 주로 복음서였는데, 그 말씀들이 너무 아팠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모습하고 너무 달라서 말씀에 비춰지는 자신을 보는 슬픔과 아픔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버스 안에서 저를 본 사람들은 아마 제가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내가 나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배우기는 했지만 무척 아파고 힘들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 중에는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것, 용서하는 것, 희생하는 것, 버리는 것, 기도하는 것, 정직한 것, 말씀을 항상 묵상하는 것, 욕심을 버리는 것, 땅 보다는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 사람이 아닌 하나님 앞에 사는 것, 겸손한 것, 세속적인 영광을 취하려 하지 않는 것, 무엇보다도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 성경에는 수없이 많은 요구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는 것이 없고, 성경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위로도 주지만 우리가 이런 길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를 가차없이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잡을 것을 명령합니다. 그런데, 이런 요구들이 우리에게는 워낙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신앙 자체에 대한 오해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해는 우리의 신앙이 풍성함을 잃어버린 딱딱하게 굳어버린 모습이 되게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요구들 자체에 너무 집중하다 보면 무엇을 하고 하지 않는 것을 신앙생활의 전부라는 생각을 갖게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죄는 짓지 않을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이 주는 풍성함과 기쁨을 상실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한 손에는 상을 한 손에는 채찍을 든 그런 분으로 이해하게 되어서, 행하면 교만해 지고, 행하지 못하면 자책하며 두려워하게 됩니다. 또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복을 주시지 않으면 그것도 또 섭섭해지구요.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된 기쁨, 가짜에 복들과 속임수에 가려져 있는 참된 복으로 데리고 가시기 위해서 하시는 요구로 받아들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여전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이유없이 짊어져야 할 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는 하나님의 요구들이 참된 기쁨을 얻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투자라고 생각되기 시작합니다. 그 요구를 받아들이는 일이 오히려 엄청나게 남는 장사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똑같은 요구인데 그걸 몰랐을 때보다 훨씬 더 행하기가 쉬워집니다. 그 뒤에 있는 그 좋은 것을 보면서 행하게 되니 힘들긴 해도 적어도 이전만큼 죽을 맛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도 우리는 이전에는 몰랐던 큰 기쁨을 얻게 됩니다. 자신이 자원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음을 발견할 때 얻는 기쁨 또한 정말 굉장한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되는데,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도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니 이것보다 남는 장사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빌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은혜와 평강을 빌어주면서 그냥 은혜와 평강을 누리기를 바란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앞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은혜와 평강이 아니라 그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져다 놓으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옥에 가두셔도, 다른 사람이 자신을 해꼬지 하도록 내버려 두신다고 해도, 성도들을 핍박가운데 놓아두신다고 해도 그 분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와 평강을 주시는 우리의 선하고 사랑많으신 아버지시라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자신과 빌립보의 성도들,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참된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리고, 그게 생생하게 피부로 와 닿으십니까? 그 분의 깊은 사랑이, 우리를 향한 그 분의 깊은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움직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선하기 그지없으신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살면서 결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분이 나에게 나의 삶 속에 허락하시는 모든 일들은 모두가 다 그러한 아버지의 사랑에서, 그 선하시고 다함없는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한 명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 고통스러운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들, 갑작스레 찾아온 이별, 가족들의 심각한 질병, 억울한 오해와 그로 인한 손해들, 선을 행했는데 악으로 되돌아 오는 경험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지극히 선하신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신가?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아버지이신가?’라는 질문이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런 질문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답을 얻으려고 하면 우리는 더 실망하게 됩니다. 상황만 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 밖에 얻을 대답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런 질문 때문에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그 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는가, 그 분이 어떤 댓가를 치루시고 우리를 그 분의 자녀로 삼으셨는가를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해서 치르신 대가는 사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치룬 댓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우리의 말이라는 담기지 않는 그릇에 담아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이 되게 하셨고 그 분을 이 땅에서 가난과 피곤, 그리고 오해와 핍박 가운데 두셨습니다. 결국에는 그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셨으며, 그렇게 죽어가는 그 아들을 그저 바라보고 계셔야만 하는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 대가로 저와 여러분은 구원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 다시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만 이런 대가를 치르신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육신을 입고 오셨으며, 하나님이시면서도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삶을 사시다가 자신이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죄 없이, 우리의 죄와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다 뒤집어 쓰고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 사이로 다시 돌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치르신 댓가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그런 예수님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 중 우리에게 손해가 되는 것, 우리에게 괴로움을 줄 목적으로 주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아들을 주셨다는 것은 자신을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모든 것을 내어주신 댓가로 얻은 자녀들인데, 어느 날 생각이 바뀌어 그들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시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그런 이상한 분이십니까? 

      

     아이들을 길러보면 부모로서 심정적으로는 그 아이를 괴롭히는 것 같고, 힘들게 하는 것 같아도 어떤 일을 꼭 하도록 해야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이에게나 부모에게나 결코 쉽고 편안한 일이 아니어도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만 그 아이가 사람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자기 인생에 책임을 지는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선배로서 그래야만 그래도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아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요구들은 바로 그런 요구들입니다. 순전히 우리가 잘 되게 하고,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하고 기쁨에 넘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천국백성다운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뻔히 아닌 길을 가는데도,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는 길을 가는데도 자식 편하게 해 주자고 그냥 내버려 두는 부모라면 참된 부모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우리의 아버지이실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것이 자기 자식같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의 사랑이며,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속깊은 진심입니다. 그 어느 순간이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선을 추구하십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분의 아들 딸인 우리들이 거짓 기쁨과 모조품 행복에 중독되어서 그게 전부인 양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참된 기쁨과 진짜 행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진심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아버지의 이러한 진심을 알아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버지께서는 항상 선하시고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도록 만드는 우리의 경험들은 실은 다 우리를 그리로 이끌기 위한 과정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그것 또한 자녀인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신 그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요구를 받던, 하나님께서 나를 어떤 상황 속에 놓아두시건 간에 거기서도 하å나님의 진짜 사랑을 보며 기뻐하고 만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록 우리가 그 분의 뜻과 계획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그래서 지금의 나의 상황, 지금의 나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아버지의 진심만큼은, 그 속깊은 사랑만큼은 오해하거나 의심하지 마십시다. 이제는 우리 아버지와 마음과 마음으로 만나십시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순간에도 하나님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신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했기에, 지금도 자신에게 가장 선한 것들만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그렇게 일하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지 않고, 그 은혜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평강을 경험하며 비록 감옥에 갇혀 있으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그 어떤 인간의 논리와 생각, 그리고 경험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그 믿음만이 줄 수 있는 기쁨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느 때,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히 선한 사랑을 확신하면서 살아서 그 사랑 안에서 기뻐하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가장 행복하고 강한 자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