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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09.16. 주일 - 주의 길을 준비하라(마가복음 2)


막0101to05 - 주의 길을 준비하라.pdf


20120916SM (#1).mp3.zip






설교분문 : 마가복음 1장 1-5절


제가 부임하고 나서 첫 주간 금요일이었습니다. 우연히 문 앞에서 권사님 한 분을 만나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서 준비된 목사님을 보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그 말씀은 부임한 지 며칠 되지않아서 조금은 긴장도 되고 위축도 되어 있는 저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제가 여러분을 위해서 준비된,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믿음이 생기십니까? 만약 여러분도 그런 생각과 믿음이 생기신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니, 결과적으로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고 섬길 모목회자로 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무언가에 대해서 어떤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아무런 근거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그렇게 생각되고 또 확신될만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제가 광현교회에 오는 과정에서 여러분이 그런 생각과 믿음을 가질만한 과정이 분명히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과정 끝에 “장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해 보내신 목회자야.”라고 생각하게 되셨을 것입니다.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말씀드리겠지만, 저에게도 하나님께서 저를 이 곳에 보내셨다는 확신을 갖게 할 상황적이고 또 내면적인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가 하나님께서 적어도 현재는 저에게 맡기신 자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신나게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구요. 저게 어느 날 갑자기 아무 과정도 없이 광현교회에 오게 되었다면, 저에 대한 여러분의 확신은 지금보다 훨씬 약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대한 저의 확신도 훨씬 약할 것입니다. 그 확신의 연약함이 서로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구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저는 지금 하나님께 얼마나 감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확신을 갖게 하시고 저를 이곳으로 보내셨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확인하고 확신하는 시간을 필요없게 만들어 주셨으니 말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마가복음의 책 제목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제목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개론”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셨겠지만 저도 이 짧은 구절을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어마어마한 은혜에 얼마나 놀라고 또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께서 왜 이 마가복음을 우리 교회에서 처음으로 설교할 마음을 주셨는지 더 확실히 깨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이 복음이 다른 좋은 소식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영광스럽고 기쁜 복음이 되는 이유는 그 복음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 왕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구원자이시고 또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소식이며, 그 분이 우리를 오셨고 이미 다스리고 계신다고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왕이신 예수님이 아무런 사전예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아 불쑥 찾아온다면 누가 그 분을 알아볼 수 있겠고, 누가 그 분을 왕으로 믿고 영접하겠습니까? 가정방문을 한다고 해도 사전에 가정통신문을 보내거나 해야 선생님이 찾아왔을 때 부모가 그 분이 선생님인 줄 아는 법인데, 하물며 온 세상의 왕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온다면 누가 그 분을 제대로 알아보고 그가 세상의 왕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 땅에 그 분을 알아보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것은 어딘가에 분명히 그 분에 대한 사전예고가 있었기 때문이고, 또 그 사람들은 그 사전예고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마가복음의 제목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마가복음의 서론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그 서론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내 앞서 보내리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마가복음이 모두 이사야의 말씀이라고 뭉뚱그려서 말하고 있는 2절과 3절은 사실은 출애굽기 23장 20절, 이사야 40장 3절, 말라기 3장 1절을 섞어서 만든 구절인데요. 가만히 보면 출애굽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구원하셨던 역사를 기록하는 책이고, 이사야서는 메시야를 예언하는 가장 중요한 대예언서며, 그리고 말라기는 구약과 구약 예언서의 마지막 책입니다.  마구잡이로 선택된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이스라엘의 구원자, 나아가 온 세상의 왕이 오실 것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마가로 하여금 그 세 권의 구약에서 이 구절들을 선택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들은 직접적으로는 오실 왕에 대한 예언들이 아니라 그 왕이 오기 전에 반드시 그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 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4절과 5절은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사자, 왕의 길을 준비하도록 보냄을 받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 모든 약속들이 세례 요한에게서 다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곧 누가 오실 차례입니까? 그렇습니다. 왕이 오실 것입니다. 그 길이 충분히 준비되었다고 여겨지면 왕이 그 길을 통해 오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왕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그 예언이 세례 요한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례 요한의 입을 통해 그 뒤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왕도 이미 오셨다고 말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예고가 없었다면, 이런 예언들이 없었다면 아무리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떠들어 댄다고 해도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오셨다고 해도,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 예수님을 메시야로 아무리 열심히 소개했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왕의 길을 준비하는 자에 대한 예언과 그 길을 따라 오실 왕에 대한 예언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세례 요한으로, 그리고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뭔줄 아십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도 그게 얼마나 은혜인지 아닌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그 사람의 믿음에 별로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사람은 똑같은 은혜를 주실 때,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줄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은혜는 이미 그가 기도 중에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다른 것이 주어지더라도 그 또한 그 기도의 응답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있는 예언과 약속의 역할입니다. 성경의 예언과 약속은 우리를 위한 표지판입니다. 나중에 주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때, 약속하신 은혜를 주실 때, 그것을 알아보라고 주신 일종의 표지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예언을 읽고, 하나님의 약속을 발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은혜가 은혜인 줄도 제대로 몰랐겠구나, 약속을 이루어 주셔도 그게 약속의 성취인 줄도 몰랐겠구나,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했을 지도 모르겠구나’하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얼마나 좋은 분이십니까? 그냥 알려주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신 후에 믿는 사람들은 건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냥 망하도록 내버려 두셔도 상관이 없으셨을텐데, 우리를 위해 예언과 언약이라는 표지판을 주셔서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확신있게 믿으며, 또 은혜를 은혜인 줄 알고 살아가게 하셨으니 말입니다. 이제부터 성경에서 약속의 말씀을 발견하거든 그것들을 꼭 기억해 놓으십시오. 그 표지판이 가리키는 목적지가 눈에 나타날 때까지 그 표지판을 붙들고 기도하며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의 신앙은 훨씬 더 생생하고 확실한 그런 신앙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알고 믿는 것과 모르고 믿는 것의 차이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처음에 이런 예언과 약속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 은혜였죠. 그런데, 그 이후로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그 분이 주신 예언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실제로 별로 알려고 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신앙에 감격이 없어집니다. 감사가 없어지구요, 믿음이 견고해 지질 않고 자꾸 그것도 너무 쉽게 흔들립니다. 이런 비극을 막으려면 알고 믿는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은혜를 끼치려고 애쓰기 전에 자꾸 가르치고 설명하고 외우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르면, 모르고 믿으면 그만큼 더디고 무른 신앙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쉽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누군가가 와서 메시야가 오시고 또 그 백성을 인도해 가실 길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등장한 것이고 그들은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준비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그렇게 열광하고 그가 전하는 메시지에 순종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라고 미리 보낸 사자입니다. 그렇다면, 그의 메시지, 그의 행동, 그의 요구... 그가 행하는 일은 전부가 다 그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일들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와서 전한 메시지와 행한 일들을 살펴보는 일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오시고, 또 오셔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셔야 한다면, 그렇게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셔야 한다면 말입니다. 


만약에 미국 대통령이 어느 도시에 가게 된다면 그냥 혼자서 터덜 터덜 걸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갈 도시가 정해지면 미리 그것이 그 도시 전체에 예고되고 최소 일주일전부터 대통령이 움직이는 길 가의 모든 건물을 면밀하게 살피고 요소 요소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할 경호원들과 경찰들이 배치되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만약 대통령이 오는 것이 그 도시의 미래를 결정할만큼 아주 중요한 일 때문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찰이나 경호원들 뿐만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들도 최대한 편안하고 융숭하게 대통령을 맞이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사실 더 잘 준비해야할 사람들은 경호원이나 비서가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을 직접 맞이해야할 사람들은 비서나 경호원들이 아니라 그 도시의 주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오시기로 되어 있는 왕을 맞이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은 말하자면 왕이 올 것을 알려주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준비가 필요하다고 알려주고 그런 준비를 하도록 요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세례 요한이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할 수 있는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나머지 준비는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이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그 왕을 맞이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세례 요한이 아니라 바로 그의 메시지를 듣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요구합니다. “광야로 나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 이것이 너희가 왕을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것이 그 분이 오실 길을 준비하기 위해, 그 분의 길을 곧게하기 위해서 너희가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세례 요한이 당시의 유대인들을 향해 들려준, 기다리던 왕을 맞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준비였습니다. 

예수님이 복음의 주인이고, 그 분이 복음의 내용이라면 그 분을 맞이한다는 것은 곧 복음을 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은 곧 그 분을 나의 왕으로 맞이하는 것을 의미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분을 말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준비를 시키기 위해서 그들을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다른 곳이 아니라 요단강 근처의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그런데, 이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그들이 가장 꺼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신앙적으로 가장 큰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셔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할 때마다 광야를 통과해서 그들을 인도해 가셨습니다. 특히 처음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는, 그 광야에서 사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하나님의 인도만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 분이 가자는 대로 가며, 그 분이 주시는 것만 먹고, 그 분이 주시는 것만 사용하며 그렇게 사십 년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굶거나 목마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옷이나 신발이 떨어진 적도 없었습니다. 물론 무지 지겹기는 했을 것 같죠? 40년 동안 똑같은 것만 먹고, 똑같은 옷만 입고, 똑같은 신발만 신고 살았으니 말입니다. 아마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불평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그 때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부족함 없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로 불러낸 것은 그들을 이러한 삶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 처음 아담과 하와과 에덴 동산에서 살아갔던 그런 삶 말입니다. 

요한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습니다. 그런 세례를 받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려면 그들은 광야로 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광야에서 왕이 행진해 오실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 길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승리와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광야에 길을 만든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회개의 참된 의미였던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요한이 준 세례는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이루어졌음을 확증하는 발표와도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례가 효력이 있으려면 ‘죄사함을 받게하는 회개’가 앞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가 있어야 죄를 용서받습니다. 죄에서 돌아서야 비로소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잘못을,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며 거기서 돌아서야 비로소 그 죄가 용서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광야의 삶이 아닌 로마의 삶을 살고, 예루살렘의 삶을 살았습니다. 여전히 물질과 눈에 보이는 권력과 부에 의지하며, 참된 믿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형식에 의존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들을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로마를 떠나고, 예루살렘을 떠나서 광야로 나오라고 요구했습니다. 나의 힘, 나의 능력, 내 소유, 내 위치, 자기 의... 이런 것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하나님만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광야로 불러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죄, 죄 하는데 진짜 죄가 무엇입니까? 회개해야 하고 용서받아야만 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가운데서 살지 않는 삶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다른 것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자신이나 다른 것들 자신의 왕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 말입니다. 우리가 죄라고 말하는 다른 자잘한 것들은 다 이런 삶의 태도에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는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들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들 때문에 나에게 만족을 준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고, 하지 말아야 할 일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바로 그러한 삶에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고, 또 누구나 다 그 길을 가고 있더라도 나만큼은 그 길이 잘못되었음을 철저히 인정하고 거기서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당시의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쉬웠겠습니까? 이제까지 그것을 자랑하며, 그것을 위해서, 거기 기대어 살아왔는데, 이미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져 있을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말입니다. 게다가 내 주변 사람들은 아직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회개했습니다. 그 죄에서 돌이켰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요단 강에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건너야만 하는 그 강에서, 그 흙탕물 속에 잠겨 자신의 더러움을 모두 씻어내고, 그렇게 해서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지음받았던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완성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라는 다리를 건너야 하고, 그 다리 위에서 더 온전해 지는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그렇게 해서 그들은 비로소 광야에서 왕의 길을 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듣기 전, 지극히 선하시고 온전하신 왕을 맞아들이기 전 그 왕의 길을 준비시키시기 위해서 요구한 것은 바로 이러한 회개였습니다. 이것 그런 요구를 받는 우리들에게는 아주 아주 힘든 요구임에 틀림없지만 오실 왕이실 그 분의 입자에서는 당연한 요구일 수 밖에 없습니다. 새 왕을 맞아들이고 그 왕의 다르심을 받으려면 그 동안 우리에게 감각적인 만족을 주며 우리를 속이고 우리를 멸망으로 몰고갔던 죄라는 폭군을 쫓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그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깨닫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그 거짓말쟁이 폭군의 통치를 거절하는 일은 나 자신이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라는 폭군은 우리의 의지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그런 놈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회개는 아픈 것입니다. 회개는 힘든 것입니다. 때로는 불쾌하기도 분노생기게도 하는 그런 것입니다. 누구라서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인정하기가 쉽겠으며, 누구라서 그 감각적이고 즉각적인 만족을 떨쳐 버리기가 쉽겠습니까? 누구라서 그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건 울며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 씨앗에서 맺혀질 천국의 삶, 광야에서의 풍성한 삶이라는 열매를 믿고 기대하며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 씨앗이 없으면 열매도 없습니다. 그 씨앗이 없으면 우리는 복음을, 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그 풍성하고 든든한 복들을 다 놓치고 맙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내 삶의 왕이 되셔야할 분을 왕으로 맞아들이기 위해서 길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 분의 인도를 받으며, 그 분의 거느림 속에서 안전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길을 닦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이 아니라 열매를 바라보십시오.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얻게 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아 아픔과 불쾌함은 충분히 견딜만한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어떻게든 더 잘 믿게 하시려고 성경 여기 저기에 하나님의 언약들을 흩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이루셔서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우리가 그 증거를 보고 믿을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제 구원이 왔습니다. 하늘나라가 왔습니다. 이 땅에서 그 분의 백성으로 능력있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확짝 열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왕중 왕께서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이미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들여야 합니다. 그 분이 오실 길을 준비해 두어야만 합니다. 그 분이 오시고 또 나를 인도해 가실 왕의 길을 말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로마가 아닌,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는 광야로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주인되고, 세상을 왕으로 삼고 살았던 그런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얻고 또 얻는 것이고 영원히, 그리고 충분히 얻는 것입니다. 그 광야에서만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으며, 부족함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행복한 곳입니다. 광야는 안전한 곳입니다. 광야는 넉넉한 곳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없는 곳입니다. 거기는 우리 왕이신 예수님께서 가장 온전하게 다스리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광야에 왕이 오실 길을 준비함으로써 언제나 그 분의 영광스럽고 완전한 다스리심 속에 충만하고 능력있는 약속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