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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09.19. 수요저녁 -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빌립보서 3)


빌0103to08 -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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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3-8절


       그리스 신화 속에는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큰 줄거리만 요약해 보면 이렇습니다. 아주 뛰어난 인간인 시지프스는 신들을 조롱하며 살다가 죽게 되고, 그는 지옥에 가서 높고 뾰족한 산 꼭데기로 둥근 바위를 굴려 올라가 거기 항상 그 바위가 있게 해야한다는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벌은 실은 영원히 계속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 올라갔다 싶으면 바위가 그 뾰족한 산꼭데기에서 굴러 떨어지고 올려놓으면 또 굴러떨어지고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읽힐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이지만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야기 속의 시지프스의 모습이 이 땅위에서의 성도의 삶의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수많은 명령들이 있습니다. 그런 명령들은 모두 다 가치있고 올바른 것들이고 하나님 보시기에도 선한 것들이죠. 그러나, 그런 명령대로만 살아간다는 것, 항상 거기에만 순종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치 뾰족한 산꼭데기에 둥근 바위를 계속해서 세워놓는 것처럼 말입니다. 굴려 올려놓으면 떨어지고, 굴려 올려놓으면 또 떨어지고, 이제 되었다 싶으면 또 제자리인 것 같고... 그래서 또 굴려 올라가야 하고 또 굴려 올라가야하고... 

       그러나, 이런 생각이 결코 비관적인 것은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일생을 통틀어 놓고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행하는 순간은 시지프스가 굴린 바위가 산꼭데기에 머물러 있는 시간만큼이나 짧은 시간일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제 자리에서 맴도는 것 같아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런 반복되는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영혼에 힘이 생기고 근육이 붙어서 이전보다 더욱 더 하나님의 뜻에 쉽게 그리고 더 온전히 순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삶은 우리에게 벌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요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더 영광스럽게 설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기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그 일을 그만두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런 명령들 중에서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만큼 우리에게 힘겹고 이상적으로만 들리는 명령이 또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해도 해도 실패하고 해도 해도 안되는 그런 일, 정말 말 그대로 거의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그를 사랑하려는 노력과 시도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는, 신앙 안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는 항상 인간적으로 볼 때는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생기게 마련인데, 그런 사람들을 다 미워하고 정죄하다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고사하고 우리가 믿음 안에서 누려야할 참된 기쁨마저도 놓쳐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기쁨이란 실은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사랑의 비결을 배우고 그것을 연습하지 않고서는 결코 참된 기쁨을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적어도 미운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은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두신, 우리의 신앙 속에 두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충만한 기쁨을 소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인간이었고 그래서 부족함이 많았고, 연약함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바울이 편지를 쓸 당시, 빌립보 교회 안에는 신앙적으로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었고, 많은 수는 아니지만 할례파의 꼬득임에 넘어가 복음을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열정이 넘친 나머지 자기가 최고라고 나대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부화뇌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그만큼 불안하고 연약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직도 이렇게 연약하고 위태하기 그지 없는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긴박한 마음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가 기도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전혀 그런 상황에 있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조금 이상하기조차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그는 간구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구는 보통의 기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간절히 드리는 기도를 간구라고 합니다. 여러분도 심한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위해서 간구해 보셔서 아시겠지만 그 때 그 마음이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됩니까? 그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런 좋은 감정들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우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눈물과 탄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정상적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간구하는 사도 바울의 마음은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찼습니다. 

      또 7절과 8절을 보시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라”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너무 너무 사랑했습니다. 그들을 항상 자신의 마음에 둘만큼, 심장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하고 있게할만큼 사랑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자신이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증할 수 있는 증인으로 하나님까지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바울로써는 자기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랑을 그런 식으로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의 상태를 알고 있다면, 정상적인 경우 나는 너희들 때문에 내가 근심이 많다, 걱정이 많다, 어떻게 너희가 그렇게 연약하고 쉽게 흔들릴 수가 있느냐고 푸념이라도 늘어놓아아 할텐데 그는 그들을 향해서 오히려 주체할 수 없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관계가 시작된 것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의 선교 후원자가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선교에 필요한 물질은 물론이고, 인격적이고 정서적으로도 깊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근래에 들어서는 바울이 옥에 갇히자 오네시모를 보내서 필요한 재정적인 도움을 주면서 옥바라지까지 해 주었습니다. 다들 바울을 떠나가고 멀리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말입니다. 바울에게 빌립보 교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든든한 재정적 지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다들 떠나가도 바울을 떠나지 않는 그런 신실한 친구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관계가 일을 통해서만 이어지는 형식적인 관계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깊이있는 관계로 발전되어져 갔기 때문입니다. 


       어떤 관계가 처음 시작되는 것은 어떤 일을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관계, 그것도 서로 사랑하며, 그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려면 그런 '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어떤 관계가 인격적이고 서로를 깊이 신뢰하는 관계가 되려면 거기에는 반드시 서로에 대한 인격적인 개입과 깊이있는 삶의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빌립보의 성도들 사이의 관계라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계가 그렇게 아름답게 가꾸어져 가고 또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서로 인격적으로 깊이 개입하는 그런 사이였고, 또 서로의 삶을 깊이있게 나누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임이 분명합니다. 저는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오늘날의 목회자와 성도들의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목회를 하다 보니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참 많이 듣습니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들이었습니다. 모두가 다 경험에서 나온 이야기들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 중에는 긍정적인 이야기들 보다는 부정적인 이야기가 더 많았습니다. 주로 성도들과 목회자들의 좁혀지지 않는 거리나 그 관계 속에 존재하는 비인격적인 요소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정말 그런가 했습니다. 그게 피할 수 없는 현실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보고서 그런 이야기들을 다시 생각하니 은근히 화가 났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목사와 성도의 관계에 대해 결코 그렇게 기록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같은 말씀들은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가 그런 관계라고 전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이상적인 이야기인가요?  이론적인 이야기이고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는 소설같은 이야기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 기록은 실제로 있었던,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 사이에 실제로 맺어졌던 관계에 대한 당사자의 증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 때만 가능하고 지금은 불가능해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과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일까요?

     물론 저는 바울처럼 감정이 풍부한 사람도 아니고, 또 바울처럼 다정다감한 사람도 못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무뚝뚝한 편에 속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울과 똑같이 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저는 적어도 한 교회의 성도와 목회자로 만난 사람들끼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인격적으로 개입하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그런 관계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어린 생각인가요? 그래도 좋습니다. 그래도 저는 한 번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실패하더라도 한 번 시도는 해 볼 것입니다. 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은 너무 억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포기해 버리기에는 그런 시도와 노력들이 가져다 줄 풍성한 기쁨과 감사들이 너무 아깝기 때문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사이의 관계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에서 와서 보니 그래도 우리 교회의 성도들은 서로 서로 관계가 참 좋습니다. 그 중에 까다로운 사람들이 없지 않을텐데도 서로 서로 이해하고 잘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들이 거기서 만족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미 그런 관계 속에서 큰 기쁨과 유익을 누리고 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저는 우리들 모두의 관계가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과 맺고 또 누렸던 그 관계처럼 되어져 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빌립보의 성도들과 사도 바울이 성도와 목회자라는 엄연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계를 누릴 수 있었다면, 그런 차이가 전혀 없는 여러분들 사이에서 그런 일을 누리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합니다. 그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계셨듯이 우리들 사이, 그리고 여러분 사이에도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리고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한 것 처럼 서로를 사랑하는 사랑 안에서 기쁨과 감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관계의 복들을 허락하셨다는 확신이 우리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분명 장애가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실망도 하고, 지치기도 하며, 상처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런 것들을 예상해야 합니다. 그리고서 그런 장애물들이 나타나면 그것들을 하나 하나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 가치있고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야 그 일을 행할 동기가 생기니까요. 그렇지만, 단지 어떤 일이 가치있고 훌륭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의 가치를 아는 것은 실은 그저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치있는 일들은 모두가 다 행하기 어렵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애물들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장애물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지 못하면, 그것을 뛰어넘을 실력을 갖추지 못하면 그 가치있는 일들 뒤에 놓여있는 유익을 누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들 사이의 관계가 기쁨과 은혜가 넘쳐흐는 그런 관계가 되게하는 일도 이런 일들 중에 속합니다. 가치있기 때문에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어도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장애물들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고 그것을 충분히 연습해서 그 장애물들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뒤에 놓여있는 그 풍성하고 소중한 유익들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다행스럽게도 바울의 말 속에서 그런 장애물들을 뛰어넘는 비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우리도 충분히 연습하고 사용할 수 있는 아주 능력있고 현실적인 비결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어떤 기준이 분명한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런 기준이 분명할수록 그 기준을 거스르는 사람들이 더 눈에 거슬리고 부대끼는 법이니까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 바울보다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또 없었습니다. 복음에 관한 한 정말 목숨을 걸고 자신을 던져서라도 복음의 복음됨을 지켜려고 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빌립보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의 그런 기준들 중에 어느 것 하나 잘 지키고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을 위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간구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간구는 기쁨과 감사의 간구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됨이니라” 

       얼핏보면 이 부분은 그저 바울은 너희들이 이제까지 나를 변함없이 돕고 또 후원해 주었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기뻐하며, 감사하게 되고, 또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단락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는 아름답고 은혜로운 구절이 그 중심에 있고, 그 앞뒤로는 빌립보 교회가 처음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는 순간까지 변함없이 복음을 전하고 변호하고 확정하는 일에 있어서 바울과 함께 했다는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단락 속에서 진짜로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희가 그렇게 변함없이 복음전파의 후원자가 되고, 또 지금까지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너희 속에 그런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 그러니까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결국 그 일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완성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는 실망스러운 상태입니다. 근심스럽고 위태롭기 그지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본 것이 아니라 그런 빌립보의 성도들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지금까지 그 착한 일을 이루어 오셨던 하나님, 그리고 결국 그 일을 이루고야 마실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것이 흔들리고 불안해 하며 심지어는 복음을 떠나려고 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바울이 기쁨과 감사, 그리고 그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눈에 보이는 것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이 세상에 결코 다른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을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을 기대하는 기대 자체가 무리입니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불안정한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항상 실망할 준비를 하고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라고 다를까요? 교회 안이라고 다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도 그렇고 그래서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실망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앴어야 하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는 사람에 대한 실망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지 않고서 살아갈 도리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돌려서 그 사람 안에서 이미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 변함없이 신실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처음이요 나중이십니다. 시작이며 끝이십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 시작은 이미 끝입니다. 꽃씨 하나 속에 이미 아름다운 꽃밭이 들어있듯이, 그 분의 시작 속에는 이미 완성된 마지막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확실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흔들리지 않는 신념이 되어야 하며, 신앙 안에서 사람과 교회를 바라보는 소망의 랜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금방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몸된 교회 안에 있다면, 그래도 예수믿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서 처럼 그 사람 안에서도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그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고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자꾸 그렇게 자신을 설득해가야 합니다. 맘에 들지 않는 사람, 실망스러운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날 때마다 “그래, 저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을 보자. 그 분께 기대를 걸자. 그 분은 분명히 저 사람 속에서도 착한 일을 이루고 계신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실 것이다”라고 스스로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요구하고 또 그런 눈으로 사람들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 봤는데,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구요? 도무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서 일하시는 증거를 볼 수가 없다구요? 그것은 우리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일이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을 보려고 애쓰면 됩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려고 힘쓰면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의 전부입니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의 관계가 만들어 내는 실망과 좌절들, 그리고 환멸들... 이런 것들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정죄하고 미워하고 또 멸시하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누리도록 허락해 놓으신 그 풍성한 기쁨을 놓치고 맙니다.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 우리는 실망을 예상해야 합니다. 상처를 예측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포기하고 물러설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기쁨을 위해서 그런 것들과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아픔과 상처 때문에 성도의 교제가 주는 그 풍성한 기쁨을 포기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을 넘어서서 서로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로 인해 감사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함께 연습하십시다. 계속 지지 마시고 이기는 연습을 하십시다. 나를 실망시키고 상처주고 있는 그 사람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을 보는 연습,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는 연습을 하고 또 하고 또 하십시다. 그 연습이 우리의 몸에 익고, 그래서 우리의 습관이 되어질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힘입어 서로를 더 쉽게 용납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고, 성도의 참된 교제 속에서 기뻐하며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과 인내를 주셔서 서로 서로의 속에서 아름다운 일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시는 복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