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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09.25. 새벽 - 이런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요한복음 17)


요0309to15 -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pdf


20120925D (#1).mp3.zip




성경본문 : 요한복음 3장 9-15절


      잘 아시다시피 저희 집에는 남자 아이들 둘이 있습니다. 세살 터울이다 보니 정말 티격태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과가 되어 버린 것처럼 서로 얼마나 내가 옳으니 네가 그르니 하고 말싸움이 잦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말싸움에서 훨씬 더 답답해 하는 것은 첫째입니다. 세살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 맘때는 그게 굉장히 큰 차이인 것 같습니다. 특히 어떤 것에 대해서 알고 또 이해는 것에 차이가 많습니다. 그러니 같은 문제를 가지고 말다툼이 일어나면 해결이 되질 않습니다. 제가 듣기에도 거의 항상 형이 옳은 이야기를 하는데, 둘째는 전혀 인정하려고 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수준차이 때문입니다. 둘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는 것이 맞는 것이고 또 전부입니다. 그게 정말 별볼일 없어도 그게 그 아이의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러니 양보하거나 자신이 아는 것을 수정하는 것이 불가능하죠. 저희들이 끼어들어 “그건 형 말이 맞는 거 같은데.”라고 정리를 해 주어야 둘째는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수정하고 또 넓혀갑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이 수준차라는 것이 꽤 큰 문제를 만들어 내는 것 같습니다. 수준이 다르면 아무리 이야기해 주어도 전혀 알아듣지 못합니다.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 속하는 것은 말해주어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별로 관심을 갖지도 못합니다. 


      니고데모에게는 구원에 대한 갈급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가 무엇인 줄 아셨고, 그래서 가장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그런데, 니고데모가 영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고 성령으로 나는 것은 육으로 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오히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슴을 치실 정도로 답답해 지셔서 이렇게 핀잔을 주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어서 이런 것들도 알지 못하느냐?” 그는 랍비 중에서도 굉장한 위치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장 기초적인 것조차 알지 못하고 있고, 또 알려주어도 도무지 딴 나라 이야기처럼 반문하고 있으니 예수님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직접 보신 것에 대해서, 그래서 너무 잘 아는 사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확실한 증언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 특히 랍비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이 세상에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은 결코 하늘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일이 아니었습니다. 물로 거듭나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은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것을 이해하기는 커녕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무식과 고집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모르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하늘에 속한 일들이 말해 진다면 그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서 더 답답해 하시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이 일으키는 회개와 거듭남은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지만 실제로 그 일들은 땅이 아니라 하늘로 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일이 선포될 때, 그것을 믿지 못하면 땅에서 일어나야 할 구원 또한 이루어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심지어 랍비들까지 하늘의 일을 알아듣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일을 말씀해 주시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구원의 사건이 일어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역시 하늘의 일에 대한 말씀답게 매우 난해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으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늘의 일은 철저히 인자, 그러니까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백성들이 죄를 짓고 다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놋뱀을 만들어 높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되실 것입니다. 그 분도 십가가에 높이 달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은 예수님께 있어서 단지 죄인들을 위해서 비참한 죽음을 죽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영광의 왕으로 높여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리실 뿐 아니라, 그 십자가를 왕좌 삼아 가장 큰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그렇게 장대 위의 놋뱀을 바라보듯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일이었습니다. 도무지 사람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늘의 일 말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모르고 십자가를 보면 십자가는 비참함 그 자체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감사 속에는 죄책감과 죄송스러운 마음이 섞일 수 밖에 없고, 우리 눈에서는 아픈 눈물 밖에 흐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이런 말씀들, 그러니까 하늘의 일에 대한 말씀들을 이해하고 나서 그 분의 십자가를 보면, 그 십자가는 더 이상 어둡지 않습니다. 우리를 죄책감으로 몰아가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는 가장 큰 하늘의 영광으로 빛나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기쁜 감사와 감격, 그리고 소망의 이유가 되고 우리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새 힘이 솟고 확신이 회복됩니다. 그렇게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가장 큰 구원과 은혜의 샘근원이 됩니다. 그것만 붙들고 살아가도 충분한 그런 것이 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하늘나라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게 제가 목회자로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설교 중에 하늘나라 이야기만 나오면 저는 흥분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하늘나라에 대한 설교를 하면, 청중들은 항상 둘로 나뉩니다. 한쪽에서는 눈이 반짝 반짝하고 얼굴이 환해 집니다. 기쁨의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대 쪽에서는 오히려 눈의 초점이 없어지면서 완전히 무관심해 집니다. 전혀 상관없고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제가 제일 안타까워 하는 모습이 바로 이 뒤쪽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이 결국에는 하늘나라에 가고 거기서 주님이 누리시는 그 영광을 함께 나누어 누리기 위한 것인데, 하늘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반응하다니 정말 정말 안타깝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속으로 눈물이 흐를 때도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을 섬기는 목회자로서 우리 광현교회에서는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뒤쪽의 상태에 있었을 때가 있었으니까요. 하늘에 관심이 없고, 그 나라의 영광을 묵상하며 기뻐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아직 그런 은혜를 주시기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 쪽에서 보면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통 관심과 목적을 땅에다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니고데모가 왜 하늘의 일을 알지 못했을까요? 아니, 왜 땅에서 일어나는 일조차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온통 관심을 땅에만 쏟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에 대한 깊은 질문에 대한 답조차도 땅에서만 얻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이 찾던 답을 얻어도 그게 답이라고 생각할 수 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이런 저런 깊고 복잡한 것을 몰라도 예수를 믿을 수 있구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 우리 신앙의 목적이 그저 그러저럭 예수믿는 것이 전부인가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씀하실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함께 공부했던 것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될까요?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신앙의 세계가 땅에서 하늘로 넓어져 가고, 또 더 깊어져 갈 때입니다. 그 때 우리는 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은 풍성한 확신과 소망 가운데 기쁨과 만족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땅이 우선이 아니라 하늘이 우선입니다. 모든 일은 하늘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풀리면 땅도 풀립니다. 하늘의 일이 이해가 되면 땅의 일도 이해가 됩니다.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되면, 이 땅에서도 그 소망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때로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내용들이 여러분에게는 별 관심도 없고 또 필요도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신앙세계도 더 넓혀지고 깊어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저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 나도 흥분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넓혀지고 깊어진 세계에만 있는 참된 복들을 더 많이 알고 또 누려야 한다고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장목사야, 김집사냐, 너는 그리 오래 믿었으면서도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약속한 땅의 복도 모르면서 하늘의 그 큰 복을 알겠느냐?”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물으실 질문의 숫자를 줄여가야 합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안다고. 전에는 그래서 기쁘지 않았는데 지금은 기쁨이 넘친다고. 전에는 확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확신 속에 강건해 졌다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땅보다는 하늘을 먼저 풀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풍성한 기쁨과 확신 가운데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날마다 하늘로 하늘로 나아가는, 그래서 땅에서도 가장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