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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09.26.수요저녁 - 내가 기도하노라(빌립보서 4)


빌0109to11 - 내가 기도하노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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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9-11절

  

우리가 계속해서 빌립보서를 통해 살펴보고 있는 것은 바로 사도 바울의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에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간절한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바울이 처한 상황과 빌립보 성도들의 영적이고 신앙적인 상태만을 생각한다면 도무지 그런 사랑으로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이지만, 상황이야 어떻든 바울의 그들을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고 오히려 더 뜨겁고 간절해 졌습니다. 그가 이런 사랑으로 빌립보 성도들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마음으로 빌립보의 성도들을 바라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게 사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하나님을 증인으로 세울만큼 사랑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사모한다”고 고백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공부할 바울의 기도는 바로 그런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의 성도들을 사랑하는 그 깊고 간절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가 오늘 본문의 기도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이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여러분이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기도하시겠습니까? 적당히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기도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정말 최고의 것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드리시겠습니까? 물으나 마나죠. 그 어떤 기도보다도 간절하게 그리고 그에게 최선의 것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드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기도는 빌립보 성도들의 최선을 위해서 간구하는 기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빌립보 성도들을 향한 마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닮아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의 내용 하나 하나는 곧 하나님 아버지의 우리를 향한 가장 중요한 바램들을 담고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같은 마음, 같은 사랑 속에서는 같은 것들만 나오는 법이니까요. 바울의 기도는 그래서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됩니다.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우리를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대개 기도는 하나님께 나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기도는 부족한 우리가 풍성한 하나님께, 무능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언가를 아뢰는 것이어서 그런 모습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어떤 기도가 당장의 눈에 보이는 필요를 구하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 기도에는 항상 내가 그 은혜가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다, 내가 내 기도가 가리키는 그 길에 서 있겠습니다, 내가 그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찾고 구하는 삶을 살겠습니다라는 결단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해 달라는 기도는 내가 정직하게 살겠으니 정직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의미이고, 믿음을 달라는 기도는 내가 믿음을 추구하며 살겠으니 나에게 믿음을 더해 달라는 의미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해서 드린 기도도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도제목을 밝히는 일을 통해서 단지 그들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기도제목을 밝히는 일을 통해서 내기 이것을 위해서 가장 큰 사랑과 간절함으로 기도하듯이 너희도 그렇게 기도해야 하며, 또 너희 삶에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힘써야 한다는 이야기를 함께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희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라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기둥들 중의 하나를 잘 붙들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바울의 후원자의 자리를 잘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고 칭찬할만한 일이며 또 감사한 일이지만 바울은 그들의 사랑이 더 풍성해지고 또 풍성해 지기를 바랬습니다. 더 성숙하고 온전한 사랑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해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신앙의 미덕들이 다 그렇지만 사랑도 그저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도 더 자라가야 하며, 더 풍성해져 가야만 합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욱 더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자라나지 않습니다. 사랑이 자라는 땅, 사랑이 성숙할 수 있는 환경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의 첫번째 기도제목 속에 들어있습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은 사랑이 그냥 내버려두어도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풍성하고 성숙한 사랑이 되려면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바울은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사랑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 속에 있는 타인을 향한 선의의 감정 쯤으로 이해합니다. 그저 좋은 마음으로 좋게 대해주면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 그래서 우리가 행하기를 원하시는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원래 하나님의 성품의 일부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곧 그 분의 성품을 흉내내는 것이고, 우리 속에 있는 그 분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 또한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분을 제대로 닮아갈 수 있고,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기준이란 바로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생각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이란, 우선은 그 분의 뜻과 생각에 맞는 그런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가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떤 기준을 알고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기준을 제대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법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것을 보면 바른 기준은 그 기준을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인 지혜를 반드시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더 온전하고 풍성한 것이 되려면 그 사랑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가운데서 하나님의 생각에 맞게 행해져야 하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현실 속으로 녹여낼 수 있는 실력, 그러니까 지혜가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것은 나 자신이지만 그 사랑의 대상이 되는 사람도, 그리고 그 사랑이 행해지는 환경도 항상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에 지혜가 더해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오히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해를 가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치고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자식 때문에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런데, 자녀들은 때로 그러한 부모의 사랑 때문에 상처를 입고 망가지기도 합니다. 사랑의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럴 때도 있지만, 방법이 틀리지 않아도 너무 넘쳐서 혹은 너무 부족해서 자녀가 치료하기 힘든 마음의 상처를 입고, 그 부작용 속에서 평생을 살기도 합니다. 가장 순수하고 또 커다란 부모의 사랑이 이렇다면 인간의 다른 사랑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따르는 바른 사랑이어야 하지만, 또 지혜롭게 선택되고 조절되어진 그런 사랑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 위에 지식이 더해지고, 또 그 지식 위에 지혜가 더해질 때 사랑은 비로소 풍성한 사랑,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도 또 사랑받는 사람도 해를 입지 않는 그런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저 ‘지식과 지혜’라고 하지 않고 ‘지식과 모든 지혜’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 말 성경에는 지혜 앞에만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원래는 지식 앞에도 그 지식이 특별한 지식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 붙어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서 본문의 ‘지식’에 해당하는 말은 특별히 깊이있고 온전한 지식을 의미하는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사랑이 풍성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이해하고 깨달은 깊이있고 온전한 지식이 있어야 하고, 그 지식을 현실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폭넓은 지혜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전하고  깊이있는 지식과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폭넓은 지혜는 절대로 단번에 생겨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아는 지식이 온전하고 깊이있는 것이 되려면, 또 그 지식을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지혜가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폭넓은 것이 되려면, 우리의 지식과 지혜가 거기까지 이를 때까지 계속해서 자라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배워야 하고, 더 많이 연습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끊임없이 해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이 너희의 ‘더욱 더’ 풍성해 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더욱 더’라는 말은 어제보다는 오늘이, 오늘 보다는 내일이, 내일 보다는 그 다음 날이 계속해서 더 풍성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아는 지식이 날마다 점점 더 깊이있고 온전해져 가며, 그 지식을 삶으로 옮겨내는 실력에 있어서도 모든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점점 더 폭넓어져 가면 됩니다. 이것을 위해서 배우고 끊임없이 연습하면 됩니다. 


 이제 우리가 항상 따져보는 문제로 넘어갈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랑을 더욱 더 풍성하게 가꾸어 가기 위해서 그런 까다로운 노력을 그것도 끊임없이 해야하는가, 하나님은 무엇때문에 우리에게 그러한 사랑이 있기를 원하시고 또 요구하시는가하는 문제 말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무조건 억지로 어떻게 해야한다고 요구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그에 대한 합당한 이유를 밝혀줍니다. 물론 그 이유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믿음이 해야할 일이지만,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정당하고 유익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그 요구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이 까다로운 요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억지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죠.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그 요규를 따라야 할 동기가 없습니다. 동기가 없으니 억지가 되고, 그래서 의욕이 없어지고 결국 불만 속에서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우리가 그렇게 될까봐 우리가 그 까다로운 사랑을 얻기 위해서 계속 기도하며 또 노력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것이 그 첫번째 이유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깨달은 지식과 그 지식을 삶으로 옮겨낼 수 있는 지혜 위에서 끊임없이 사랑을 키워가야 합니까? 그래야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러 그 분 앞에 영광스럽게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섞여 있을 때는 그 두 가지를 구분하는 것이 비교적 쉽습니다. 그리고, 다 괜챦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은 훨씬 어렵습니다. 그런데 진짜 어려운 것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선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은 것,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관계가 깨어지는 한이 있어도 바른 것을 이야기 해주어서 그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은가? 지금 상황에서 어떤 것이 더 선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가?’를 결정하는 일이 여기에 속할 수 있고, 또 교회에서 본다면 ‘분명히 큰 잘못이 있는 사람을 그냥 용서하고 넘어갈 것인가? 아니면 공론화하고 징계를 내릴 것인가? 과연 어떤 것이 가장 선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결정하는 일들은 정말 까다롭고 분별하기 어려운 일들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 그러니까 나의 사랑을 받는 사람에게 진정으로 유익한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런 것들을 모두 걸러낼 수 있는 분별력이 있어야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진실하고 허물 없이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까다로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날, 우리가 주님 앞에 진실하고 허물없이 설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대개 믿음의 문제나 영혼의 문제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이 문제를 사랑과 연관시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것이 단순히 영혼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실은 이 문제가 사람과 사람이 맺어가는 관계와 연관된 현실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실제로 본문에 사용된 진실하다는 말은 원래는 햇빛에 비춰보아도 점하나 발견할 수 없는 순수한 상태를 일컫는 말이고, 허물이 없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걸림돌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런 일로 비난받지 않는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무언가 불순한 의도가 끼어들면 누군가는 그것 때문에 실망을 하거나 상처를 입고 손해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비난과 다툼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이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면 우리가 그런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을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가야 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불순함은 우리 영혼의 불순함이 될 것이고, 사랑의 허물은 우리 영혼의 허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순수하지 못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비난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불호령이 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들은 ‘그러면 차라리 가만히 있자,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 그러면 사랑을 망치고 그것 때문에 낭패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는 생각에 그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 마음이나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하려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은 그렇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이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지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속담에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담그냐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이 말을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해야 하고, 또 우리가 다른 이들을 사랑하는 일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성도 여러분, 우리 삶과 존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그 분을 드높이는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좋은 열매가 가득한 나무의 그림을 가져다 쓰고 있습니다. 과실이 가득찬 나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의의 열매가 가득 맺힌 나무, 우리가 그 나무가 될 때, 하나님은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삶과 존재는 그 분을 높이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찬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의로운 열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그 분이 우리를  살게하시는 목적을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다고 열매가 맺힐까요?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데 사랑의 열매가 맺힐까요? 그럴 수가 없지요. 우리가 사랑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거기에는 우리의 이기심과 좋지 못한 의도도 끼어들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이 뒷걸음질 친다고 여겨질 때는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점점 더’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장에, 단박에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점점 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계속해서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때로는 순수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해를 입히고 또 그래서 상처를 받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스스로 욕을 먹고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도 포기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거기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조금씩 조금씩 점점 더’라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힘을 내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맺어야 할 사랑의 열매, 의의 열매는 조금씩 조금씩 커져 갈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성경을 묵상하다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열매가 그냥 의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의의 열매”라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오늘도 까다로운 요구를 하셨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모든 면에서 성숙한, 실제적이면서도 거룩하며, 불순한 의도가 없는 사랑이 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랑만이 우리를 주님 앞에 흠없고 점없이 세울 것이며, 그런 사랑의 열매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좋은 나무가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얼마나 부담스러웠는지 모릅니다. 특히 사랑에 대한 것이니 더더욱 그랬습니다. 사랑은 저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장 취약한 부분이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열매가 너의 열매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너로 부터 나오는 열매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네가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열매도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부터 오는, 그 분 덕분에 맺혀지게 되는 의의 열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말씀은 저에게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방법과 비록 그 열매가 부족한 열매여도 크게 낙심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까다롭고 맺기 힘든 사랑의 열매를 요구하셨습니다. 너에게서 그런 열매가 맺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지만 그건 네가 맺어야할 열매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그 분을 통해서 열려지는 열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의의 열매여야 하지만 그것은 너의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런 말씀입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오늘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저 완전이라는 목표를 삼고 꾸준히 가기만 하면 된다. 내가 기뻐하는 사랑이란 이런 사랑이라는 사실만 생각하고 네 사랑이 그 사랑과 더 많이 닮을 수 있도록 배우고 연습하면 된다. 계속 그렇게 하기만 하면 된다. 결과는 너의 몫이 아니라 나의 몫이다. 그 열매는 내가 그리스도를 통해 맺히게 할 것이다. 그렇게 열리는 열매라면 부족해도 괜챦다. 조금 흠이 있어도 괜챦고 찌그러져 있어도 괜챦다. 나는 그 열매를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위해 이룬 완전한 의라는 안경을 쓰고를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의의 열매로 기쁘게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될 것이다.” 얼마나 힘이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이었는지 모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들 간의 관계는 우리에게 풍성한 기쁨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기쁨을 빼앗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당시의 빌립보 교회의 상황이 뒤쪽에 속했습니다. 가뜩이나 상황도 어려운데, 그들 사이에 관계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의 기쁨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관계의 문제, 관계 때문에 신앙의 기쁨을 잃어가는 문제의 근본에는 언제나 잘못되고 일그러진 사랑이 있습니다. 샘 속에 빠진 썩은 생쥐를 그대로 놓아두고서 물이 깨끗해 지기를 바랄 수는 없듯이 사랑의 문제를 바로잡지 않고는 관계의 문제와 그 문제 때문에 기쁨을 잃어버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바울의 기도를 통해 바로 그 문제를 짚어주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가 해결되면 관계의 문제도 해결되고 그러면 기쁨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게 되고, 우리는 그 분 앞에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복이 사랑을 더욱 더 풍성하고 온전하게 하라는 주님의 명령 속에 들어있는 가장 좋은 선물입니다. 


    열매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히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계속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그 분의 사랑을 배우고 연습하며 흉내내서 우리의 사랑이 지식과 지혜 위에서 가장 선한 것을 분별하는 그런 사랑이 되도록 기도하며 애쓰면 됩니다. ‘더욱 더’라는 말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배우고 연습해야 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열매들도 의의 열매로 받아주실 것이고, 우리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회복된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풍성케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우리 속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도 하고 우리를 그 분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할 유일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끊임없이 더 온전하고 풍성한 사랑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사랑의 요구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사랑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우리들 속에 있는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기도하며 헌신해서 날마다 더욱 더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영광스러운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