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0.03. 수요저녁 - 기뻐하고 기뻐하리라(빌립보서 5)


빌0112to18 - 기뻐하고 기뻐하리라.pdf


20120103WE (#1).mp3.zip




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12-18절



이른 아침 뉴욕의 지하철 안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사람이 많이 타고 있지는 않았는데요. 남자 아이 둘이 의자에 올라가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앞 좌석에는 그 아이들의 아버지같아 보이는 사람이 그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그 칸에는 다른 승객도 몇 명 타고 있었는데, 그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참다 못한 승객 하나, 그러니까 이 경험을 하고 이 글이 실려 있던 책을 썼던 그 사람이 아이들의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례지만, 저 아이들의 아버지이신가요?” 아버지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며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그 승객은 이렇게 말합니다. “댁의 아이들이 저렇게 좌석 위를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는데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아이들의 아버지는 잠에서 깬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죄송합니다. 어제 제 아내가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래서 아직 저 아이들도 저도 정신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오히려 불만을 말했던 그 승객이 더 미안한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래서 그 승객은 오히려 이렇게 사과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글은 지금은 그 제목이 잘 생각이 나질 않지만 한 때 크게 유행했던 ‘패러다임 시프트’에 대한 책의 도입부에 기록되어 있던 일화입니다.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말은 우리 말로 쉽게 표현한다면 아마 사고의 틀, 사고 방식의 전환 쯤으로 표현될 수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생각의 틀을 바꾸면 보이는 것도 다르다. 보이는 것이 달라지면 삶도, 세상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 그 당시 패러다임 시프트를 주창하는 사람들의 주된 주장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인생과 삶을 바라보는 ‘안경’을 적어도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난 그런 안경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실 그 사람은 “나에게는 그런 안경이 없다”는 안경을 끼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또 만약 그런 안경이 없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평가하거나 판단할 수가 없게 됩니다. 또 그 안경 때문에 이 세상에는 다양성이라는 것도 생겨나고 같은 것을 바라볼 때도 의견이 서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안경은 우리가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이렇게도 또 저렇게도 바라보게 만들기 때문에 실제의 삶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설교를 하면서 믿음이란 눈이고 시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그저 저 마음 속 깊이에 있는 감정적이고 의지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우리의 믿음은 성경의 진리를 그 내용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사실 믿음이 가장 먼저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각과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는다는 말만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구원자요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그것을 믿기 전과 그것을 믿은 후의 그의 생각과 사고방식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자기 자신에서 예수님으로 바꾼 것이니 그렇게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믿음이란 나의 삶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 모든 일들을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이 하나님의 시각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그 전에는 보지 못하던 새로운 것들을 볼 수 있게 되고, 진짜 가치있고 진짜 의미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도 달라지게 만들고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 만나게 되는 일들에 대 한 반응도 전혀 다른 것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 만들어내는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으로 인한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다른 두 세계에 양다리 걸치고 살아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고 불편한 삶을 살아갈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그의 기쁨의 비결을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바울의 이야기 속에서 또 다른 기쁨의 비결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바울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장 확실한 사고방식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출발부터 그랬죠. 이전에는 이단의 괴수로 여기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죽이고 핍박하기 까지 했던 예수를 나중에는 목숨걸고 전하는 사람이 되었으니 바울만큼 급격하게 그런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의 변화는 단순히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하나 하나를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바울은 지금 굉장히 어려운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짧게 요약해 보겠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사형판결을 받을지도 모를 상황입니다. 당시 노령에 이른 바울은 그 어느 때보다 육체적으로도 쇠약해져 있습니다. 게다가 자신의 투옥을 둘러싼 교회의 상황도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고, 자신의 투옥으로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하고 있는 대로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경쟁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려고, 어떤 사람들은 옥에 갇혀있는 바울을 더 불리하게 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아마도 굉장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절망과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사람들도 원망하고 나중에는 하나님도 원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슬퍼하거나 절망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해꼬지 하려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한 것같은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그런 상황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단지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보통 사람들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빨간 안경을 쓰고 있으면 무슨 색이 보이지 않죠? 빨간색이 보이질 않습니다. 파란 색 안경을 쓰면요? 파란 색이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은 이것과 비슷하면서도 동시에 전혀 다른 역할을 합니다. 신앙이라는 안경을 쓰면 이전에 보던 것들은 더 뚜렷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전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이전에 보던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 반응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없을 때 기뻐하고, 때로는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 때문에 가슴아파하며 울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신앙 안에서 생겨난 관점의 변화가 만들어 내는 놀라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신앙이라는 벗어버릴 수 없는 안경을 쓴 바울에게는 현실이란 언제나 보이는 대로가 다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게 된 후 그에게는 믿음이라는 안경 위에 또 하나의 안경이 덧쓰여지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복음전파라는 소명의 안경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 위력을 발휘하는 안경은 바로 이 복음전파라는 안경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상황과 빌립보 교회의 상황을 이 안경을 쓰고 보기 시작하자 객관적인 상황과는 정반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이것이 처음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이었습니다. 그는 지금 옥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옥에 갇혔기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진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복음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엄청난 진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자신의 투옥으로 복음이 더 많은 사람에게 공공연하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황제의 친위대 안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황제의 친위대는 정말 엄청난 힘을 가진 집단이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왕의 폐위와 즉위를 결정할만큼 힘이 세진 적도 있었다니 황제의 친위대가 로마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집단일수록 프라이드가 높고 배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복음을 가지고 그들에게 접근한 들 그들이 복음에 귀나 기울이겠습니까? 아마 문전박대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투옥은 그 모든 조건을 정반대로 뒤집어 놓았습니다. 


당시의 투옥 방식은 지금과 많이 달랐습니다. 특히 친위대 감옥에는 대개 정치범들이 갇혀 있었기 때문에 탈옥을 막기 위해서 특별한 구금방식을 취했습니다. 그것은 밤이건 낮이건 보초 둘이 따라붙고 그들이 죄수와 함께 차꼬를 차고 교대로 죄수를 지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옥에서 조차 모든 자유가 박탈당한 절망적인 상황이 되는 것이죠.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바울에게 이런 상황보다 복음을 전하기 쉬운 상황이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평상시라면 도저히 접근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바울과 함께 묶여 있어야 합니다. 별 잘못도 없이 그렇게 갇혀 있으면서도, 자신이 전한 신 때문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결코 굴하지 않고 얼굴에는 항상 환한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바울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들은 어떤 생각을 했겠습니까? 최고의 권력집단에 속해있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지만, 항상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 견재하느라 평안과 기쁨이 전혀 없는 자기 자신들의 모습과 죄수이지만 당당하고 기쁨에 넘치는 바울의 모습을 비교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을 만나면 매력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일했던 바울이 이런 기회를 놓쳤을리가 만무합니다. 바울에게 이것은 결코 접근할 수 없었던 선교지에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때가 되면 그렇게 복음을 들을 사람까지 알아서 바꿔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있겠습니까? 그러니 바울이 기쁠까요? 슬플까요? 오히려 감옥에 있기 때문에 바울은 밖에 있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기뻐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지금 복음이 전해지기 가장 어려운 곳에서 가장 손쉽게 복음을 전하고 있으니까요. 


바울이 그 다음에 눈을 돌린 곳은 감옥 밖의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감옥 밖을 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바울이 어려움에 처하자 성도들 중 일부는 바울을 걱정하면서도 바울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에 더욱 헌신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다하지 못하고 있는 복음전하는 일을 이전보다 더 열심히 하기로 작정하고 그 일에 헌신적으로 뛰어든 것입니다. 첫번째로 바울을 기쁘게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속으로는 바울을 걱정하는 눈물을 삼키면서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복음에 헌신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더 많아진 것이 바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감사하고 기쁜 일이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나쁜 마음과 의도로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없는 틈을 타서 교회 안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고 더 열심히 전도했고, 바울을 미워했던 어떤 이들은 바울의 판결을 불리하게 하려고 무리하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상식대로 하면 이런 상황에서 바울은 기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미 사람의 상식에 묶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상식은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하지만, 그는 이미  그 안경을 벗어버렸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복음전파라는 것을 통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이유이고 또 의미이며 기쁨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더 많이, 더 빨리 전해진다면 그에게는 그것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자기 자신이나 상황이 아니라 복음에, 그 복음의 영광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고 해석하니 오히려 자기가 갇힌 것은 복음이 전해질 수 없었던 곳에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기회였으며, 자신을 대신하여 복음을 전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들어낸 하나님의 도구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시기와 질투에서 나온 것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에게 자기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복음만, 그 영광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의 없어지지 않고 꺼지지 않는 기쁨의 이유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미 전혀 다른 안경을 쓰고 자신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 바울에게 무엇이 문제가 될 수 있었을까요? 그는 풀려나도 좋습니다. 직접 마음껏 복음을 전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 분이 일하시는 것을 직접 볼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풀려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더 좋습니다. 그러면 로마 권력의 핵심부에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자기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로 복음을 이전보다 훨씬 더 열심히 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찌 되었든 그의 기쁨에는 전혀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의 기쁨은 세상은 알 수 없는 기쁨이고, 또 세상은 줄 수도 없는 기쁨이 될 수 밖에 없덨던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감옥 속에서 바울이 느꼈던 하나님에 대한 흥분이 어떠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가장 불리하고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력하게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때, 그의 감격과 흥분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그는 오히려 자신이 감옥 속에 있기 때문에 더 생생하게 하나님의 승리를 목격하며, 또 그것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이런 기쁨의 비결을 발견하고 연습하여 꼭 자신의 것으로 삼게 되기를 소원하며 또 축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의 흥분을 함께 공유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가난하게 사는 일은 굉장히 힘듭니다. 탈북자들이 우리나라에 정착해서 살면 북한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불행하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이것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 문제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인 것 같습니다. 성도들 중에서도 가난을 죄처럼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그것이 마치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생겨난 결과처럼 생각하시기도 합니다. 우리 신앙이 자본주의의 병폐에 잡아먹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돈이 없다는 것, 남들만큼 풍족하게 살지 못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불편하고 때로는 굉장히 아프고 슬픈 일로 이어지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이것을 믿음 안에서 바라보면 문제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가난은 굉장히 중요한 영적인 기회가 됩니다. 무슨 기회가 될까요?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지해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됩니다. 여러분의 경험도 분명히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말해줄 것입니다. 부유할 때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되던가요? 아니면 가난할 때 그렇던가요? 가난할 때죠. 그러면 언제 하나님을 더 간절히 바라고 찾게 되던가요? 그것도 가난할 때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보면 부유함보다는 가난히 훨씬 유리한 조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지해서 사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데 가난이라는 것은 우리를 어느 정도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것은 우리의 믿음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는 일에 있어서도 유리한 조건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산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우리가 잘 살면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일이 될까요? 아닙니다. 사실은 정반대 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데도 믿음으로 기쁘고 즐겁게, 그리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능력, 믿음의 능력을 가장 밝게 드러내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실제적으로 보게 해 주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지 않은 것도, 고난 가운데 있는 것도, 남들에게 내세울 자랑거리가 없는 것도, 나이가 많은 것도 마찬가지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불리한 상황은 그것이 불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 복음을 더 구체적으로 증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객관적인 상황이라는 것은 참고 사항에 불과합니다. 신앙 안에서는 똑같은 상황도 정반대의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이것이 믿음의 진짜 능력이고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도 우리에게 기쁨을 줍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지고 싶었던 것을 사고,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과 결혼하고, 오르고 싶었던 자리에 오르고, 이루고 싶었던 목표를 이루고... 이런 것들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고 그런 기쁨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은 결코 든든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은 이런 것들이 흔들리고 우리 곁을 떠나게 되면 함께 흔들리고 무너져 버립니다. 게다가 그런 것들이 우리 곁을 떠날 때는 거기서 얻었던 기쁨이 컸던만큼 우리를 더 큰 슬픔과 절망 가운데로 몰아넣습니다. 심지어는 거기에 익숙해 지면 더 이상 기쁨이 되지 못할만큼 연약한 것이 바로 이런 것들이 주는 기쁨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기쁨의 진짜 이유는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과 우리 삶 속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이 세상도 나 자신도 변할 수 밖에 없는 불안하고 나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쁨의 진짜 이유는 그래서 우리 밖으로 부터,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전파라는 그의 소명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복음의 영광이 드러나서 더 많은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그 소명과 소원이라는 안경을 쓰고 상황과 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절망과 분노의 조건은 오히려 감사와 기쁨의 조건들이 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을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중심으로 사는 삶에는 결코 참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잠시 기뻐하다가 이내 더 큰 허전함 속에서 더 큰 기쁨을 찾아 목마르게 해매는 삶을 반복합니까? 그것은 여전히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나 자신에게, 내 주변에 두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내 속에서 나온 목적은 항상 나보다 작게 마련입니다. 그것이 아무리 큰 꿈이라도, 심지어 이 세상을 전부 소유하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내 안에서 나왔기 때문에, 결국에는 나보다 작을 수 밖에 없습니다. 회원 여러분, 내 속에서 나온 나보다 작은 것으로 내 영혼이 참으로 만족하고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 목적은 우리에게 항상 빈 구석을 남기게 마련이고, 그래서 이루어지고 나면 나를 더 큰 갈증과 불만족으로 내몰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나를 만족하게 하고 샘솟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려면 나의 목적은, 내 삶의 이유는 내 속이 아니라 나의 밖으로 부터 주어진 나보다 큰 것이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소명'입니다. 소명은 바울의 경우처럼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라는 특별하게 정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개는 소명이라고 하면 이것을 생각하죠. 그러나, 그런 소명만이 소명이 아닙니다. 사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렇게 눈에 보이는 소명보다는 성도라면 모두가 다 가지고 있는 소명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드러내며 사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로 그것을 드러내야 하듯이, 여러분은 주부로 직장인으로, 집사로, 권사로, 그리고 어머니와 아버지로, 그리고 자녀로 살아가면서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비전이 되어야 하고 소명과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삶과 이 세상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고 또 전혀 다르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아주 밝은 안경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안경을 바꿔야 할 때가 충분히 지났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옛 날의 안경, 남들이 다 쓰고 있는 안경을 쓰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우리 신앙에도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나의 유익이라는 안경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안경을 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쁜 소명으로, 정말 행복한 소명으로 우리 모두를 부르고 계십니다. 꺼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기쁨의 원천이 되는 그 소명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소명은 절대로 고통이 아닙니다. 소명은 희생도 아닙니다. 우리의 직업, 우리의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은  우리에게 결코 아픔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가장 크고 든든한 기쁨으로 나아오라는 하나님의 초대장입니다. 

이제 잠시 잠깐의 만족을 팔아서 소명이라는 참된 기쁨의 안경을 사십시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 안경으로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처럼 우리의 시력이 그 안경에 익숙해 질 때, 우리는 뜻밖의 기쁨으로 가득찬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비록 감옥과 같은 상황 속에 있을지라도 넘쳐 흐르는 기쁨을 외치는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르심을 따라 사는 삶 속에서 살아서, 언제 어디서든  “내가 기뻐하고 또 기뻐하리라”라고 외치며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진짜 기쁨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