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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0.12. 수요예배 - 나의 간절한 소망과 기대를 따라(빌립보서 6)


빌0119to26 -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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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빌립보서 1장 12-18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예측할 수 없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다는 뜻이죠. 사실 이 말이 요근래처럼 시대를 이야기하는 정확한 표현이 되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한 나라의 잘되고 못됨은 전쟁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거의 전적으로 그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얼마나 잘 하느냐하는 것이 결정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소위 세계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여러 면에서 하나가 된 후에는 이런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국제간의 경제적인 관계가 자유로워지고 또 하나가 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훨씬 더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이제는 저 유럽의 한 나라가 잘못하면 온 세계가 몸살을 앓습니다. 그 나라가 조금 괜챦아 지면 또 옆의 나라가 어려워지고 그러면 또 다시 온 세계가 힘들어 집니다. 이런 일이 언제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르고 또 지금은 조금 괜찮다고 해도 또 언제 똑같은 일이 재발할지 그 누구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런 불확실함은 사람들을 해결할 수 없는 불안함으로 몰아넣게 되고, 그런 불안함은 사람들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저 안 그런척 하면서 또 애써 그런 것들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살아가서 그렇지 사실 요즘처럼 불안하고 기뻐할 이유가 없는 시대가 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우울증 환자들이 급증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를 믿고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유익하고 유리한 것인지 모릅니다. 이미 말씀드린대로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그렇지만 보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것들을 볼 수 있는 눈이기 때문에 특히 요즘같이 몸으로 느껴지게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있어서는 예수를 믿는 믿음은 현실적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안함을 진짜로 해결하려면 그저 누군가의 노래가사처럼 “다 잘 될거야”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잠시잠깐은 그런 말과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하고 달랠 수 있어도 영원히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모든 것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진짜로 불안함을 해결해 줄 수 있으려면 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실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그런 확실한 근거가 되어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세상 전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은 언제나 이리 저리 요동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 전체가 불확실성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부터 세상은 ‘다 잘 될거야’라고 말해 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안에는 분명히 참된 평안과 기쁨의 비결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정말 수많은 기쁨과 평안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묶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실하시고 지극히 선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머물 때, 우리는 그 믿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기쁨과 평안을 소유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온 세상이 흔들릴 때라도 바위같이 견고한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이런 견고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실제로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항상 우리 앞에는 그런 믿음을 방해하는 것들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상황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고, 그런 상황 속에서 흔들리기 쉬운 연약한 우리들의 믿음이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믿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유로우신 분이 아니시라면 하나님은 절대로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품 빼고는 그 어디에도 묶이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분을 신뢰한다고 해서, 그 신뢰를 가지고서 그 분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분이 우리의 믿음에 따라서 움직이셔야만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사실 우리의 불안함은 여기에서 생겨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해 주실 줄로 확신합니다’라고 고백하지만 이내 그 뒤에는 ‘그렇지만 믿는대로 행하시지 않으시면 어쩌지?’라는 불안함이 생겨나는 것이죠. 그러니, 우리의 믿음과 하나님의 자유라는 두 가지가 서로 부딛히는 이런 문제를 풀지 않으면 실제로 우리는 믿음이 있어도 그 믿음 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릴 수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그 확신이 그저 자기 확신이나 맹신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가지가 부딛히는 이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으며, 그 신뢰 안에서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가 있을까요? 오늘 바울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는 우리의 확신과 하나님의 자유가 결코 서로 부딛히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가지면서도 충분히 그 분의 자유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흔들리지 않는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을 풀어주실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아는 고로...”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감옥에 갇힌 일과 그로 인해 발생된 여려가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모든 일들은 일 자체로는 결코 선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이었지만 복음전파라는 소명에 비추어 보면 그 모든 일들은 복음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대로 복음을 전할 수 없었던 곳에 복음이 전해지게 했고, 또 복음이 더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고, 또 결국 더 많은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일들이 자신의 구원, 그러니까 감옥에서 석방되는 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믿는다’고 하지 않고 ‘안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원래 안다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나 혹은 벌어진 사실에 대해서만 사용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만큼 확실한 일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도무지 자신이 석방될 것을 ‘알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아직 재판도 받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리고 그저 객관적인 상황으로 보면 사형선고가 내려질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풀려나게 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정말 대단한 확신이기는 하지만 우리는 도대체 그의 이런 확신이 어디서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의 치밀하고 정직한 성품상 그가 그저 우리들 처럼 ‘다 잘 될거야. 난 그렇게 믿어’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달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행히 우리는 그의 말 속에서 그의 확신 뿐만 아니라 그러한 확신의 근거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도 여러가지를 말입니다. 다시 그의 말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신의 석방을 위해서 정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해 성령님께서 자신을 돕고 있다는 것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기도를 거절하지 않으시는 분이시고, 지금 그 기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려 올리셨던 성령님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상황이야 어떻든지 간에 하나님은  충분히 자신을 석방시켜 주실 수 있고 또 그렇게 해 주실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일들이 결국에는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확신에는 또 한 가지 더 확실한 근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 말은 사실 바울 자신이 처음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고난’하면 누가 떠오르죠? 네. 욥입니다. 의인의 고난을 대표하는 욥입니다. 욥기 13장 16절을 보면 ‘이것이 나의 구원이 되리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구절은 당시에 널리 읽혀지던 헬라어 구약성경으로 하면 바울이 사용한 말과 단어까지 똑같은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고난을 욥의 고난의 틀에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기 13장은 소발과 욥의 대화인데요, 소발은 철저히 ‘잘 하면 상을 받고 잘못하면 벌을 받는다’는 틀에만 갇혀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욥의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그런 생각 때문에 욥을 위로하러 왔던 소발은 오히려 욥에서 큰 상처를 주고 맙니다. 16절은 그러한 소발의 이야기에 대한 욥의 대답 속에 나오는 한 구절인데요, 욥은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정직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고난이 적어도 자신의 죄 때문은 아니었다는 사실만큼은 확신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실 것이고, 결국에는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그런 고난가운에서 건져 주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결국 자신의 확신대로 고난 가운데서 고난을 받고 의로움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는 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했습니다. 자신이 옥에 갇힌 것은 복음 때문이었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욥을 건져 주셨듯이 자신도 건져주실 것입니다. 옥에서 나가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 때 그렇게 역사하셨던 신실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일하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제가 담임목사로 위임을 받게 되었다고 페이스북에 소식을 올렸다가 정말 너무나 은혜롭고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저도 모르게 정말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를 가장 감동시켰던 댓글은 미국에 사는 제 대학부 동기가 올린 “You are in my prayer.”라는 답글이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너를 위해 기도해 왔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다.” 저는 그 짧은 한 문장을 읽으면서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해서 드리고 있는 기도가 이렇게 일하고 있었던 것이구나. 그래서 내가 이렇게 평안하게 살며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이구나.”라는 생각에 정말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친구, 아니 이 지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듣고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그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살려 올리신 그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혹은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항상 이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그 은혜롭고 능력있는 진리에 우리의 믿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들이 나를, 그리고 내가 기도해주는 사람들을 구원해 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개인적으로 욥이나 바울처럼 의롭게 살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욕심과 죄 때문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고난과 어려움을 당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욥의 하나님께서, 그리고 바울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우리의 거룩하려고 몸부림치며 애썼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힘썼던 삶이 우리의 구원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죄는 우리의 이러한 확신을 방해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우리의 능력이 되고 소망이 되는 그 확신을 가로 막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확신을 가지는 대신에 자책과 죄책감에 빠지게 해서 그 믿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능력을 가로 막아 버립니다. 


항상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그 기도를 통해 능력있게 일하시는 성령님을 신뢰하는 믿음 가운데 거하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께 소망과 확신을 두지 못하게 하는 죄악을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완전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선을 다해서 의인의 삶을 살아가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바울이 가졌던 확신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감옥과 같은 상황 속에 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구원을 알 수 있을만큼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계신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가 자신의 석방을 확신하게 된 세 번째 이유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게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함께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원래 바울이 더 원하는 것은 그냥 감옥에서 순교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와 영원히 거하게 되는 그 날을 사모하며 기다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소원보다는 더 큰 그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당한 일이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만약 나에게 선택을 하라면 나는 석방되는 것보다 오히려 죽는 길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니 그게 하나님의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그래서 지금 빌립보 성도들의 상태를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은 지금 나를 데리고 가실 타이밍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내가 죽지 않고 석방되어 빌립보의 성도들과 함께 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그들이 불신앙과 절망에 빠지는 대신에 그들의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또 그들이 기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풀려나면 오히려 이 어려운 상황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자랑하는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을 알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당한 일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은 죽지 않고 풀려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자신의 석방에 대해서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전에 제가 목회를 위한 조금은 힘겨운 상황에 있을 때, 제 목회와 삶에 대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잘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께 칭찬받기 위해서 더 유리한 상황은 무엇일까? 답은 분명했습니다. 불리하고 어려운 상황이 더 유리한 상황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내가 불리해 보이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잘 견디고 또 사역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영적으로 보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성도들을 돕고 섬기는 일이 더 큰 상급이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전보다는 훨씬 더 쉽게 그 상황을 견디어 내고 또 그 안에서 귀챦고 힘든 일에도 조금은 더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불리하게만 여겨지는 상황들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게 집착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라는 더 큰 틀에서 그런 것들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큰 유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이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을 수도 있고 또 전혀 하지 못했던 일들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런 불리한 환경 때문에 더 영광스러워지고 칭찬받을만한 것이 되게 됩니다. 


자신의 석방에 대한 이렇게 확실한 근거를 가진 확신이 있으니 그가 옥에 갇혀있다는 사실, 그리고 상황이 굉장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면 그는 갇혀있지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었고 그래서 전혀 불리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듯이 그의 투옥은 복음전파를 위한 둘도 없는 기회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깨닫고 또 확신했던 바울이 옥 속에서 슬퍼하고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모든 것이 자기 바램대로 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이 신뢰하는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주권 자유하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 안에서는 자신의 확신과 하나님의 자유는 결코 서로 부대끼면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욱 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아무 일에든지...”, “살든지 죽든지...” 무슨 뜻입니까? 그가 자신이 풀려날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믿고 있 었던 것,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이시며, 결코 의인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진리였습니다. 그 진리를 믿는 믿음은 그의 불안함을 온전히 넘어설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주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갑자기 “와!”라는 탄성을 지르게 만들었던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간증 프로그램이었는데, 아주 젊은 자매가 출연하고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아주 불운한 과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농촌봉사를 갔다고 풀밭에서 잠이 들었는데, 그 이후로 몇 년을 누워있다가 다시는 걷거나 일어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매가 얼마나 밝고 명랑한지... 그것만으로 저는 믿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의 말미에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꼭 완전히 고쳐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전혀 의심치 않습니다.” 그 때만해도 맹목적인 믿음을 굉장히 싫어했던 아주 날카로운 청년이었던 저는 속으로 ‘저게 무슨 믿음이야! 말도 안돼!’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 순간이 그 자매에게 실망하는 순간이었죠.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뒤에 그 자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땅에서 아니라면 하늘나라에서라도요.” 저는 그 때 운전을 하다가 말고 무릎을 치며 “와!”라는 탄성을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늘나라!!! 신앙의 가장 깊고 높은 차원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순간은 저에게 진짜 소망이라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진짜 평안과 기쁨이라는 것이 어디서 오는지 깨닫게 해 주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믿으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우리가 살며 경험하는 이 땅에서 모두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않는 것같은 상황을 보면, 그리고 지금 나의 경험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움직이시지 않으시면 그렇게 힘들어 하고 화를 내는 것이죠. 바울은 하나님은 결코 의인을 부끄러움에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셔서 의인을 구원하시고 반드시 의로움을 드러나게 해 주시는 분이심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믿음은 그 모든 것이 땅에서 모두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그런 종류의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눈은 항상 영원을 향해 있었습니다. 결국에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 하늘에서 모두 이루실 일들로 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그는 자신이 석방될 것을 여러가지 이유를 근거로 해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확신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 확신이 깨어지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확신보다도 더 크고 완전하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석방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의 손을 들어주시고 그의 의로움을 드러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부끄럽지 않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울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아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고통당해도, 풀려나지 않아도, 자신의 억울함이 증명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대로 죽게 되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그 분께서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실 것이고 또 바로잡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인내가 길수록 그 날의 기쁨은 더 클 것입니다. 지금의 억울함이 클수록 그 날의 영광은 더 클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은 “내가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에게 여기 우리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이 땅이 전부라면, 그리고 여기서 받을 복들이 전부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할 수 없고, 그 신뢰 안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이 땅 위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과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시는 자유로운 분이시라는 진리가 서로 화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 위만 놓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믿음 조차도 우리를 참으로 든든하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가지고서도 여전히 불안해 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을 볼 때, 그 하늘을 밝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의 확신과 하나님의 자유로우심이 함께 거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든 믿음의 기도는 다 응답될까요? 그 기도를 통해 성령님께서는 항상 능력으로 일하실까요? 믿음으로 드렸지만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들도 다 응답된 기도들일까요? 살려달라고 했는데 죽게 하셔도, 건져달라고 했는데 그냥 내버려 두셔도 우리는 그 분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믿음의 기도가 그 나라에서는 모두 응답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지 않고 풀려나게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도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믿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그것이 그의 불신앙이나 불안함의 이유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항상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날이 오면 그 나라에서 모든 것이 가장 완벽하게 바로잡아 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 이 땅 위에서는 자신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게 되는 것 한가지만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죄없이 옥에 갇혀서도, 사형선고를 앞에 두고서도 결코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기쁨과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땅에서 생겨나는 문제는 땅만 바라보면 결코 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이 땅만 보며 살아갈 때는 우리의 확고한 믿음 조차도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땅만 보면 확신 뒤에는 항상 불신앙을 만들어 내는 의심스러운 일들이 따라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의 문제는 하늘을 보아야 풀립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우리의 믿음은 우리 기쁨과 평강의 뿌리가 될 수 있습니다. 


때로 살다보면 억울한 일도 당하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일들도 많이 경험합니다. 그럴 때마다 땅만 보지 마시고, 하늘을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며 결국 마지막 날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고 온전하게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눈이 밝아질 수록, 그래서 우리가 그 나라를 더 밝히 바라볼 수록 우리의 이 땅 위에서의 삶은, 이 땅의 불확실함과 불안함에도 불구하고, 더 견고하고 기쁨으로 가득찬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 때문에 살아가는 복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땅에서의 어려움을 하늘로 풀어내는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하늘의 기쁨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