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127to30 -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1).pdf
본문 : 빌립보서 1장 27-30절
사람들은 누구나 기쁨을 원하며 또 그 기쁨을 얻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렇게 원하며 또 얻기 위해 힘쓰는 기쁨을 얻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성도들 중에서는 그래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경우보다는 비율적으로 볼 때, 이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그 사정이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목회자로서 성도들을 심방해 오면서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생각보다 이런 기쁨을 알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무척 드물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현상은 적어도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굉장히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이미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기쁨을 허락받아 놓았으며,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비결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믿음 안에 그러한 기쁨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하는 일은 굉장히 잘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에게 좋은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향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쁨을 훨씬 더 크게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우리의 기쁨을 더해주는 기쁘고 좋은 일들이 아니라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고 또 기쁨을 생기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나쁜 일들, 그러니까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고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에게 생겨난 기쁨을 지켜내려면 이런 일들을 잘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남는 장사를 하려면 많이 벌려고 하지 말고 손실을 줄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해서 은혜를 공급받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기쁨도 그렇습니다. 기쁨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얻은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방법, 그러니까 기쁨에 있어서 손해를 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아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들어서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여러가지 시험과 고통 가운데서도 기쁨을 얻고 또 유지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바울은 결코 그렇게 끝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 안에서 기쁨을 위해서 싸우는 싸움은 절대로 간단하거나 쉬운 것이 아니고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지식과 연습이 필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직접적으로 권면하고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그 첫번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번 시간이니 만큼 바울은 조금 큰 그림을 그려줍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어질 기쁨을 위한 교훈들을 듣고 또 거기에 순종할 때, 항상 잊어서는 안될 것들이 무엇인지, 반드시 지켜야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라는 도시는 로마의 퇴역군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국경지역의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가 군인의 태도와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또 자신들이 로마시민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아가서 그렇게 군인답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로마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이 도시가 국경도시였기 때문에 더욱 더 그랬습니다. 이 빌립보와 인접한 국경 너머에는 트라케라는 야만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빌립보의 시민들은 이들에게 로마의 높은 문명을 보여주는 것을 아주 중요한 자신의 임무라고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에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나라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지금의 우리와는 아주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한 나라를 한 지역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는 사람들이 인간적인 모든 선 가운데서 최고의 선에 이르게 할 목적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협동체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국가 안에서 개인이란 자기 혼자나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자신의 능력을 최고로 끌어올릴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속에는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상호 관계와 협력이라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늘어놓는 이유는 바울이 오늘 본문의 첫 머리에서 사용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합당하게 생활하라’라는 말은 ‘시민답게 생활하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통해 로마시민들이었던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가치에 어울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권면했고,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그 말 한마디로 알아 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로마의 시민들은 비록 그들의 시민권이 이 땅에 있으면서도 저렇게 자부심을 가지고 로마의 시민권을 지닌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내부적으로는 로마를 하나로 유지하며 외부의 침략에 대해서는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함께 싸운다. 그런데, 너희들은 복음이라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로마의 시민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너희가 가진 복음이라는 천국의 시민권에 어울리는 삶은 어떤 것이겠느냐?”하고 빌립보의 성도들을 권면했던 것입니다.
당시의 빌립보 교회는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단적인 가르침으로 인한 내부적인 균열도 있었고, 특히 고난과 핍박으로 인한 믿음의 약화라는 문제는 상당히 심각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빌립보 성도들의 기쁨을 방해하며 또 빼앗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사라짐은 그들을 더 큰 절망과 불신앙 가운데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빌립보 성도들은 그저 이리 저리 흔들리고 시험만 당할 뿐 어떻게 해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사도 바울은 그 처방을 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직접적인 첫번째 처방이자 가장 크고 근본적인 처방이 바로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너희는 너희가 가진 복음이라는 하늘나라 시민권의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오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이것만 우선적으로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너희의 상황이나 너희들 속에 존재하는 갈등, 그리고 근심과 걱정, 두려움.... 그런 것들이 아니라 오직 너희에게 있는 복음이라는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생각하고 거기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라는 뜻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문제처럼 보여도 가만히 보면 그 모든 문제를 하나로 묶고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큰 원리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작은 것 하나 하나를 붙들고 싸우기 보다는 큰 것을 먼저 붙드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효율적이며 확실한 해결방법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싸움은 실제로 크고 작은 모든 문제와 어려움들과의 싸움이 될 수 밖에 없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큰 원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모든 싸움이 훨씬 더 쉬워집니다. 훨씬 더 작아지게 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에게 수많은 문제가 있고, 그런 문제들이 너희의 기쁨을 빼앗아가고 너희 삶을 뒤흔들고 있지만 너희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너희를 얼마나 엄청난 대가를 치르시고 건져냈으며, 그래서 너희가 얻게된 그 하늘나라의 시민권이 얼마나 가치있고 영광스러운 것인지 그것만을 생각하라. 그리고 거기 어울리는 삶을 살아라”
지난 수요일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땅만 보면 문제가 풀리지 않습니다. 땅에서 내가 누구이며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만 생각하면 답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의 눈을 땅에서 하늘로 돌려주고 있습니다. 땅에서 보여지는 너희의 모습이 아니라 하늘에서 보는 너희의 모습, 하나님께서 보시는 대로의 너희의 모습을 보고 거기 맞추어 가라고, 거기서 답을 얻으라고 말입니다.
살다가 보면 우리는 정말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내 잘못 때문에 생겨나는 어려움들은 뒤로 하고서라도 이유도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하다가, 잘 믿어보려고 하다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많습니다. 사실 잘못 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내 책임이니 그래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감수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 어려움을 감당해 내기란 정말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 때문에 기쁨을 빼앗겨 버리고 영적인 낙심 가운데 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원래 우리의 기쁨은 이 땅에서 얻은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 안에서 발견한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쁨에 대한 문제를 땅에서 풀려고 하면 절대로 풀리지 않습니다. 다시 하늘을 보아야 풀 수 있고, 그래서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셨는지를 생각하면서, 그 대가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는 일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상식적인 생각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천국의 시민이라는 사실이 나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가치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라는 고귀한 신분에 어울리는 반응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기쁨은 지켜지고 또 더 단단해 질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에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어떤 일 때문에 정말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냥 그대로 계속 갔다면 마음과 생각의 에너지가 다 떨어져서 쓰러져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저도 너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일을 당한 그 날은 표현대로 힘들어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지금 당한 일은 힘든 일이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억울하고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믿음의 기쁨까지 빼앗겨야 할까? 내 기쁨은 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억울했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사람 때문에 생겨난 어려움을 겪는 것도 억울한데, 그것 때문에 그 귀한 하늘의 기쁨까지 빼앗기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자녀인 나에게 주어진 약속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묵상하면서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그렇게 힘들던 상황에 크게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큰 어려움을 준 사람도 크게 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도 훨씬 덜 미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굉장히 힘은 들었지만 오히려 기쁨은 그 이전보다도 더 충만해졌습니다. 제 기쁨은 더 견고해 졌습니다. 아마 그렇게 회복된 더 단단한 기쁨이 없었다면 지금 제가 우리 교회에서 사역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이렇게 여러분의 믿음을 위해서 하늘의 일을 기뻐하며 증거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로서의 우리의 참된 기쁨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원리대로라면 우리의 기쁨은 누가 빼앗아가기 전에는 빼앗길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죠. 하나님입니다. 무슨 이유로건 하나님게서 빼앗아가지 않으시면 우리의 기쁨은 빼앗겨서도 안되고 빼앗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이 이 땅 위에서 이 불완전한 몸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가 땅에 속한 조건들에 의해서 전혀 영향받지 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의 기쁨이 하늘에 뿌리를 둔 기쁨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 위에서의 우리의 경험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의 삶을 보시면서 ‘너희가 잠시 근심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많은 시간을 영적인 기쁨없이 살아가거나 인생의 대부분을 근심하고 걱정하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끌려다니며 살아가는 것, 그리고 작은 충격에도 하염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풍성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 풍성한 생명을 우리의 것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그리고 나아가서 계속해서 하늘로부터 기쁨을 공급받으려면 우리는 항상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고 영적인 자존심을 지켜야 합니다. 땅의 이유 때문에 하늘의 기쁨을 빼앗길 때, 화가 날 정도의, 속이 상해 미칠 정도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존심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나를 억울하게 한다고 자존심이 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것들 때문에 하늘에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 자존심이 훨씬 더 상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늘의 시민답게 반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또 안타까워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안타까움과 그 억울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고난과 어려움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고 방해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기쁨을 더욱 더 굳게 만드는 고마운 역할을 해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 이 억울함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존심이 강해지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위해서 스스로 싸우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이것을 위한 아주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이 일, 그러니까 믿음의 기쁨을 지켜내는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결코 성도 개인이 혼자서 해 낼수는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조금 이상하게 생각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은 내 마음과 영혼 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왜 그것을 지키는 일이 나 혼자의 일이 될 수 없는지 말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기쁨을 지키는 일은 나만의 일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실 때 우리를 모래알처럼 낱알로 있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 불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우리는 서로 서로 전혀 상관없는 개개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르심을 받고 교회에 들어오면 이런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편입됩니다. 형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내용적으로도 그렇게 됩니다. 모두가 다 몸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은 누구나 다 몸된 교회의 뗄래야 뗄 수 없는 일부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ㅏ
우리 몸에 치명적인 병균이 침투했을 때, 그 병균이 침투한 부분만 싸우지 않습니다. 온 몸이 몸살을 앓으면서 그 병균을 쫓아내기 위해서 힘씁니다. 심지어는 다른 지체의 기능을 일부분 제한하면서까지 몸 전체가 달려들어 그 곳의 문제를 해결해 냅니다. 우리의 몸에서는 이것이 본능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교회 안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몸 안으로 부르심을 받지만 그래도 여전히 하나 하나의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적이고 의지적인 순종과 헌신을 필요로 합니다. 27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한 마음, 한 뜻, 협력.’ 바울이 이 권면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짧은 구절 속에 하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또 그것을 위해서 성도가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지닌 자답게 반응하며 살아가려면 교회가 하나되는 것과 성도들이 서로 힘을 합하는 것이 그만큼 절대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서서’라는 단어도 그렇고 ‘협력’이라는 단어도 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먼저 ‘서다’는 단어는 로마군대의 전투방법으로부터 온 단어인데요. 영화를 보면 로마군대는 다른 군대들과는 싸우는 방식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로마군대의 승리의 비결이기도 했습니다. 로마 병사들의 방패는 기다란 사각형 모양입니다. 전투에 임하게 되면 대열의 겉에 선 로마 병사들은 이 방패를 어깨에 어깨를 맞대어 빈틈없이 연결합니다. 그리고 가운데 선 사람들은 그 방패를 치켜들어 위쪽에서 모두 연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사방과 위쪽이 빈틈없이 막혀진 정방형이 됩니다. 그렇게 버티고 섭니다. 그러면 왠만한 공격에는 끄떡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서다’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협력’이라는 단어는 한 팀을 이루어 싸우는 운동경기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것은 미식축구경기에서 선수들이 스크럼을 짜고 상대방의 공격에 저항하며 승리를 위해서 힘써 싸우는 모습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서는 일도 그렇지만 협력하는 일에 있어서도 거기 속한 단 한 사람이라도 제외될 수 없습니다. 내가 전체를 위해서 애써 싸우지 않으면, 내 자리를 지키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결국 나도 승리할 수 없습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다 영적인 기쁨을 빼앗겨 벼리고 맙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에 있어서 공동체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다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교회는 그저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이거나 혹은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지,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신앙과 영적인 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인식과,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맘 한 뜻으로 생사가 달린 전투를 함께 치러내듯이, 경기에 참여하듯이 서로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영적인 기쁨조차 제대로 지킬 수 없다는 그 중요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한 몸입니다. 함께 싸우는 한 부대이고, 한 팀을 이루어 경기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내가 옆 사람을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과 협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렇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싸우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 있는 성도들 모두가 다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미 얻은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더 크고 견고한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확실한 구심점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하나가 되느냐 하는 중심이 되는 목적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군대가 되어 서서 싸워야 하며, 또 한 팀이 되어 서로 협력해야 하는데,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복음의 신앙’을 위한 협력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에는 구원을 얻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이 들어와서 복음에 대한 신앙을 흔들어 놓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신앙을 위한 협력이라면, 일차적으로는 그러한 공격에 저항하며 복음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싸움에 모두 협력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교리를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일 오후에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지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은 전부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게 구원이든, 복이든, 평강이든, 능력이든, 은사든....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좋은 것들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바로 복음을 믿는다는 말의 큰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믿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부이시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믿음이 흔들리면 그 믿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들어오는 모든 좋은 것들도 다 끝어지고 맙니다. 빌립보서가 가장 큰 주제로 삼고 있는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 또한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복음을 믿는 믿음이 흔들리면 기쁨도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그 무엇보다도 복음을 믿는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고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이며, 그 분으로 충분하다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전쟁하듯이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런데, 이 전쟁은 교회가 하나될 때만, 하나가 되어 함께 싸울 때에만 승리할 수 있는 전쟁입니다. 함께 서서 싸워야 하며, 함께 협력해서 싸워야 이길 수 있는 그런 전쟁입니다. 다른 모든 전쟁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광현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들 속에는 이것이 반드시 포함되어 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믿음을 위해서,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함께 서서 협력하며 싸우는 것 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서로의 믿음을 살피며 또 내 일처럼 여기고 함께 기도로 권면으로 싸워줄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의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절로 그렇게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우선은 우리들이 서로의 신앙과 영혼을 향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모이고 또 만나면 서로의 믿음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나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이유들에 대해서 고민을 말하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신앙적인 이야기를 꺼내도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머쓱해지지 않고, 듣는 사람들은 불편해 하고 어색해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서로를 위해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싸워줄 수 있는 영적인 전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참된 기쁨을 돕는 조력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런 교회를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저는 우리 교회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로, 권면으로, 그리고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한 싸움을 함께 싸우는 일에 자신을 헌신할 수 있다면 저는 우리 교회가 충분히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서 개인이 교회에만 허락하신 그 풍성한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먼저 여러분의 다른 성도들을 찾아가 용기를 내십시오. 자신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왜 내가 기뻐할 수 없는지 그 이유를 내놓고 기도를 부탁하십시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나를 이상하게 볼지도 모른다구요? 오히려 나를 멀리할 수도 있다구요? 뒤에서 수군거리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대수입니까? 제가 살아보니 대수가 아닙니다. 남이 나를 이상하게 본다고 내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나를 멀리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은 내가 가까이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가지고 수군거린다고 해서 별로 손해볼 것이 없습니다. 물론 쬐끔 기분은 좋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잃은 것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우선 영적인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얻어 외롭지 않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무엇보다도 100사람이 그 일 때문에 나를 멀리한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보는 손해보다는, 그로 인해서 10사람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 수 있다면 거기서 얻는 유익이 훨씬 더 큽니다. 잃을 것만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건 지혜로운 삶의 방법이 아니라 어리석은 삶의 방법입니다. 교회가 이런 사람들로만 채워진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영적으로 궁핍한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현실 속에서 함께 싸우는 기쁨을 위한 싸움에 실패해서 믿음과 기쁨을 상실한 교회와 성도들을 충분히 보아왔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함께 싸우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믿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다른 일로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위해서 싸우지 않고 서로를 향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한 군대가 되고, 한 팀이 되어 싸워야 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칼을 휘두르는 그런 형국이 되었고, 결국에는 서로가 서로에게서 믿음과 기쁨을 빼앗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서로 싸우는 그런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모임에 목적이 없어지고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성도들이 자기 중심적이 되어버리고, 얻는 것이 없어 배가 고프니 거칠어지고 날카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서로를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기쁨을 위한 전투에서 함께 싸우는 전우가 되어주지 않으면 거기에는 나를 위한 참된 기쁨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지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그 삶을 통해서 기뻐하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온 교회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하나가 되어 서로의 믿음을 위해서 싸울 때 비로소 그 기쁨을 지켜내고 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한 번 두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우선은 기도할 때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믿는 믿음만으로 충분히 기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이것이 함께 싸우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두번째는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먼저 다가가셔서 여러분에게 있는 연약함과 시험의 이유들을 나누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해 주십시오. 이것이 함께 싸우는 두번째 방법입니다. 한 번 꼭 이렇게 해 보십시오. 일단은 이렇게 해 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기쁨을 더하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 속에 거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런 마음과 용기, 그리고 결단을 주셔서 그런 변화와 복이 나로부터 시작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