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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0.24. 수요저녁 - 다만 믿을 뿐아니라(2)(빌립보서 8)


빌0127to30 -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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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1장 27-30절 


우리가 살다보면 어떤 것에 대한 생각이 획기적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나면 이전과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같은 것에 대해서도 다른 반응과 다른 선택을 하게 되고 이런 것이 쌓여가면 인생전체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특히 그것이 작고 사소한 것일 때는 그 영향이 별로 크지 않지만 그것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인생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무척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 인생에는 정말 획기적이라고 부를만큼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저는 예수를 믿고 인생을 살아오면서, 또 목회를 하면서 다행스럽게도 몇 명의 아주 탁월한 스승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분은 제가 직접 보고 배운 스승이지만, 나머지 분들은 그저 책으로만 접했습니다. 이 분들 중에서 가장 최근에 만난 분은 존 파이퍼라는 미국의 목사님이십니다. 저는 이 분의 책을 접하면서 기독교의 본류라고 불릴만한 흐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 분이 쓰신 책들 속에서 만난 과거의 위대한 신앙인들 또한 저의 스승으로 삼는 행운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저에게는 너무 너무 고마운 분이죠. 파이퍼 목사님이 저에게 주신 선물 중에서 가장 큰 선물은 이 분이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앙에 대한 생각을 송두리째 뒤바꿔 버렸던 경험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신앙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분을 만나기 전에는 신앙이라는 것이 포기이고 희생이며, 자기비움이고 또 내려놓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분명히 좋은 점도 있었지만 사실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20대 때는 고민이 너무 깊어서 위장병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목회자가 되어서 교회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하는 내내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파이퍼 목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목사님을 만나기 전에도 신앙으로 인한 기쁨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그저 간간히 주어지는 선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파이퍼 목사님은 초기 기독교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위대하고 불릴만한 신앙인들과 신학자들의 사상 속에서 ‘신앙은 곧 기쁨’이라는 단순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신앙에 대한 사고방식을 다시 찾아냈고, 그것을 성경을 근거로 해서 증명해 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책들을 읽으면서 신앙에 대한 동일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기 시작하면서 이것이야 말로 신구약을 관통하는 신앙에 대한 가장 건강하고 올바른 시각이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전히 포기, 희생, 자기 비움 같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은 그것 자체로 추구되어야 할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 자체로 가치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짜 목적, 진짜로 가치있는 것을 위한 투자로 생각합니다. 진짜 목적은, 진짜로 가치있는 것은 바로 ‘기쁨’입니다. 그러한 모든 신앙의 덕목들은 믿음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이 땅위에서 누리는 기쁨, 그리고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그 영원하고 다함이 없는 기쁨을 얻기위한 투자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에게 1억원을 주어야 한다면, 그것이 단순히 선하고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할 때와 그것이 5억을 얻기 위한 투자일 때, 어떤 때 더 쉽고 심지어는 기쁘게 1억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파이퍼 목사님에게 배우고 또 스스로 확인하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신앙 안에서 받게되는 요구들이란 사실은 모두가 다 자신의 참된 기쁨을 위한 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의 신앙을 얼마나 많이 바꾸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도 힘든 일은 힘들게 여겨집니다. 그렇지만 예전보다는 훨씬 더 쉽게 여겨지고, 또 예전에 하지 못했던 것들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그런 일들을 그저 해야하기 때문에,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이기 때문에 했다면, 이제는 똑같은 일들을 나의 더 큰 기쁨과 영원한 기쁨을 위한 투자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 앞에서 큰 결단을 내려야 할 때에도, 그런 결단을 하면서 별로 무슨 특별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 기쁨을 위해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의 영광 안에서 찾고 또 얻을 수 있는 나의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신앙은 그 자체가 기쁨이고, 또 참된 기쁨을 향해 가는 여정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지금의 수준에서만 보아도 예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삶이 가능해 졌고 또 가능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저를 자유롭고 풍성하게 하며 또 기쁘게 해 주는지 모릅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우리는 기쁨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두 가지 배웠습니다. 하나는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믿음 안에서 기쁨을 지켜나가고 또 더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삶의 태도라는 사실과 나머지 하나는 나의 기쁨이란 나 자신의 일일 뿐만 아니라, 더 많은 부분이 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을 믿는 믿음 속에서 서로의 기쁨을 위해 서로에게 헌신해야 하며, 그럴 때 우리 모두가 주님 주시는 기쁨 속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진짜 기쁨을 위해서 다시 한 번 간절히 권면합니다. 결코 성도다운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당장은 힘들어 보여도 그것이 바로 나의 참된 기쁨을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투자입니다. 성도는 결코 성도답게 살지 않으면서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늘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갈 때 우리는 성도로서 자유와 당당함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서로의 기쁨을 위해 헌신하며 힘을 합해 주십시오. 서로 부족함과 연약함, 그리고 영적인 실패를 나누며 서로를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여러분이 몸된 교회에 속해 있다는 그 유익을 다 챙겨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수요일 본문에 이어지는 1장의 나머지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기쁨을 위해서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며 또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헌신하고 또 협력하는 사람들이 되어주라고 권면한 이유는 바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도 빌립보의 성도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두려움이 성도들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반대와 핍박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우선 성도로서의 나 자신에게 자신이 없을 때인것 같습니다. 내가 그래도 온전한 믿음을 유지하고 있을 때, 또 그 믿음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고 확신할 때는 주위의 반대와 핍박이 있어도 담대하게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작은 반대와 핍박에도 마음이 무너져 내립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성도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는 우리의 확신이 흔들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내 두려움이 찾아오고 우리는 기쁨을 빼앗겨 버립니다. 


또 한 가지 성도는 자신이 혼자라고 느낄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저는 왜 오늘날의 성도들이 이렇게 세속적인 유혹에 대해서 약하고 또 세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때 저는 그것이 함께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별로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아주 중요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앞을 보면 내가 가는 길을 먼저 가는 사람들이 있고, 옆을 보면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으며 뒤돌아 보면 나를 뒤따라 오는 성도들이 보일 때, 그 때 우리는 성도답게 믿음을 가지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일을 그렇게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 혼자만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금새 두려워지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 같은 길을 가며, 또 서로를 돕고 섬기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애쓰며, 또 다른 성도들의 같은 길을 가는 동행자가 되어주고 또 돕는 자가 되어줄 때, 우리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는 두려움을 서로의 힘으로 극복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 또 한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바른 길을 가는데도 좋은 결과가 눈에 보여지지 않거나 혹은 정반대로 나쁜 일만 생겨날 때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인과응보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는대로 거두게 마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각하는 방식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난 후에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 이 땅으로 한정되어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사고방식은 하늘과 땅을 아우를 때에만, 영원이라는 시간 안에서만 틀림이 없는 사고방식인데 말입니다. 우리가 뿌린 모든 씨앗이 전부 다 이 땅위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라는 열매가 맺히지 않고, 또 정반대의 결과만 돌아올 때, 혹시 내가 선택한 길이 잘못되었고, 또 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기게 되고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 이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이야기입니다. 반대자들과 악한 사람들의 핍박과 반대를 경험할 때, 우리는 마치 내가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완전히 망할 것 같아 보입니다. 그게 보이고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보이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다면, 우리를 향한 핍박과 반대는 우리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우리가 구원얻은 자들이며, 지금 그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가고 있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그러한 반대와 핍박은 분명히 아주 아주 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핍박하신다거나 핍박받도록 계획하셨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큰 일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은 그것보다 훨씬 큰 틀에서 하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악합니다. 그래서 선함이 우리가 원하는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선이 악으로 갚아지기도 합니다. 물론 바로잡으려고 여러모로 애쓰고 힘써야 하지만 이런 일들을 너무 이상하게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악에 휘말리기 쉽습니다. 그대신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악은 오히려 ‘악을 악으로 드러내어서 악인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라고 말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악인들 자신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피해를 보는 우리들은 어떻게 됩니까? 바로 이 부분에서 우리의 생각을 기존의 사고방식과 정반대로 뒤집어야 합니다. 모든 핍박과 반대가 그렇지는 않지만 우리가 정말 바른 길을 갈 때 이런 어려움들이 우리를 찾아오면 그 때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 내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세상과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구나. 나는 그래서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구나.”하고 말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이 맞는 생각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성도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런 고민과 고통, 그리고 손해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면 오히려 그 때가 더 걱정해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미 너무 세상과 닮아버려서 세상이 나를 환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른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한 반대와 핍박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상을 받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악인들은 스스로를 영원한 형벌 가운데로 밀어 넣을 것입니다. 악이 악으로 드러나게 하고 선이 선으로 드러나게 하는 일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악을 허용하시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왜 그 귀한 것을 주시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목적이 없는 일은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직접하시는 일 속에는 다 목적이 있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있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은혜는 능력입니다. 우리 힘으로 너무 힘든 일들,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능력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랑하는 일이 너무 힘드니까,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이 너무 힘드니까, 또 이 세상을 하나님만 신뢰하며 사는 일이 너무 힘드니까 그런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29절의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하심이라”는 말씀이 가지는 첫번째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믿음을 줍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에게 그 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우리가 성도로 받는 고난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주님을 섬기고 또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께는 가장 큰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받고서 즐거워하기만 한다면, 그저 거기서 끝납니다. 그렇지만 그 은혜를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이어지게 하면 그 은혜는 우리를 위한 큰 능력이 되어줍니다. 순종을 위한 능력이 되어줄 뿐아니라 그 순종때문에 당하는 어려움을 넘어가게 하는 능력도 되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그 은혜를 어떻게 간직할까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가지고 무엇을 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를 주시는 그 당시에 내가 가장 순종하기 어려워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일에 순종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러면 정말 신기한 일이 일어납니다. 이전에는 절대로 안되던 일이 훨씬 쉽게 됩니다. 그 뿐 아닙니다.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더 크고 강해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성장한 믿음 가운데서 이전보다 더 크고 견고한 기쁨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을 위해서 고난도 받을 수 있게 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은혜를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데 사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은혜의 중요한 사용처입니다. 


그런데, 29절의 뒷부분의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는 말씀은 “그를 위하여 하여 고난받는 것도 은혜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29절은 예수를 믿는 것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그 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도 똑같은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난도 은혜다. 믿음과 똑같은 은혜다... 이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궤변처럼 들리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왜 고난도 은혜일까요?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믿음과 똑같은 은혜라고 말씀하실까요? 사실 고난은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실력만 갖춰진다면 믿음보다 훨씬 더 큰 은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가 고난 때문에 두려워하며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통해서 그 기쁨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두번째 인식전환입니다. 고난이 은혜인  첫번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에게 주어진 신앙의 공인인증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이 공회에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잘못도 없이 흠씬 두드려 맞고서 석방되었는데 사도행전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맞고도 감격해 합니다. 맞고서도 기뻐하고 영광스러워 합니다. 정말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사도들이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핍박과 고통을 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 핍박을 억울하게 당하는 필요없는 일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시는 자격증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난은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인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내가 그만한 수준이 되었다고 보셨기 때문에 발급해 주시는 공인인증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다가 고난을 당할까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시려면 그럴만한 자격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실 것이니 너무 미리 걱정하지 마시고, 또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을 주시면 사도들처럼 “아, 나도 모르고 있었는데 하나님게서 나를 이만큼 인정하고 계셨구나.”하고 기쁘고 감사하게 여기면 됩니다. 


억지로 그렇게 하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해서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었습니까? 치과가는 것도 무서워하던 나였는데, 절대로 지기 싫어하고 절대로 손해보려고 하지 않던 나였는데 그런 내가 주님을 위해서 큰 고통과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정말 얼마나 큰 은혜입니다. 게다가 그런 일들을 가치있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니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그래서 구원얻는 것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 또한 은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존귀하게 변화되었고, 또 그것을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이 고난을 통해 확인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은혜일 수 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는 우리의 고난은 단순히 우리 개인의 고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성도는 예수를 믿는 순간 이미 자기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가 없게 됩니다.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온전히 연합되게 되고, 그래서 그가 받는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받는 고난이 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고난은 그리스도가 받으시는 고난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의 성도의 잠시 잠깐의 고난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는 영원한 영광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도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게 힘들어서 그렇지, 이 땅에서 믿음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또 믿음으로 그 고통을 이겨내는 일은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누릴 영광과 하나님의 상급을 더 크고 영광스럽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지나온 20절과 21절의 ‘지금도 내가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는 말씀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감옥에서 죽는다면 그 죽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가장 많이 닮아있는 죽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그가 하늘에서 누릴 영광은 커지고 또 커질 것입니다. 그러니 죽는 것도 유익입니다. 죽은 것이 가장 크게 그리고 풍성하게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은혜입니다. 믿음으로 받는 고난은 그것을 믿음으로 잘 견디어 내기만 한다면 영원히 영광스러운 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성도로 살아가면서 당하는 고난과 고통의 두번째 진짜 의미인 것입니다. 우리가 고통과 고난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고 또 대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이런 것들 때문에 기쁨을 손해보지 않고 오히려 그 기쁨을 더 크고 확실하게 소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지만 믿음 때문에 생겨나는 고난과 손해들만 이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믿음과 상관없이 어려움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큰 질병이나 실패, 혹은 경제적인 어려움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실제로 힘겨운 일상생활들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서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괴롭히게 되는데, 이런 일들 또한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고 믿음으로 잘 인내한다면 그것들 또한 하늘에서 우리의 영광과 상급의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 그것을 굉장히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우리의 삶 속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고, 해가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이 유익할 뿐입니다. 사시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은 것도 유익할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의미에서 기쁘고 든든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뒤집기를 잘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상식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을 신앙 안에서 얼마나 정반대로, 그리고 제대로 바르게 뒤집을 수 있느냐에 우리가 누리게될 믿음의 능력이 전부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뒤집어 보고 또 거기에 우리 믿음을 더하며 살아가게 될 때, 우리 삶에 찾아오는 고통과 고난, 그리고 억울한 일들까지도 오히려 우리의 기쁨을 돕는 시종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기적같은 믿음의 능력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고난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면, 아니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일 자체를 은혜로 여길 수 있게 된다면 뭐가 문제가 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을 알고 또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로 살면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망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우리가 잘 가고 있고, 그래서 영생을 향한 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가장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러니 기뻐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넉넉하게 이겨내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러니 고난이 아니라 그 풍성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또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런 고난 정도는 넉넉하게 이겨낼 사람으로 인정하신다는 인증서이고, 나아가서 우리를 위해서 준비될 하늘의 영광과 상급을 더 영광스럽게 해 주는 것이니 고난은 은혜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합니다. 고난 때문이 아니라 그 고난을 통해서 주어질 은혜와 영광 때문에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시기 바랍니다. 상식이 아니라 믿음에 따라서 다르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기쁨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쁨을 위해서 주시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닙니다. 어려움이 찾아오고 힘든 일이 닥칠 때마다 잠시 잠깐 힘들어 하다가도 이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이 고통이, 그리고 이 고난이 나의 구원의 증거가 되어준다고, 이 고난이 내가 얻을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 크고 풍성하게 한다고, 모두 나의 기쁨을 돕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 위에서 살아가십시오. 여러분의 걸음 걸음이 이 믿음 위에서 내딛는 발걸음이 되게 하십시오. 그러면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기뻐하고 또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기 때문에 빼앗을 수도 없는 그런 기이한 기쁨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여셔서 우리 눈이 고난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은혜와 기쁨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 보물을 찾아내어 기쁨 가운데 살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