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2장 1-12절
우리는 지난 주 수요일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난에 대한 견해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로 우리에게서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을 빼앗는 것이 고난과 고통이며 그것이 가져오는 시험이기 때문에 고난의 의미를 신앙적으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고난과 시험 앞에서 기쁨을 빼앗기고 믿음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신앙때문에 당하는 고난은 모두가 다 우리가 올바른 길을 제대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믿는 사람에게 고난과 시험은 당연히 찾아올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믿음의 견고함과 순결함을 지키면 그것이 하나님께는 가장 큰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과 시험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계획하시는 것은 아닐지라도 항상 우리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난과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수요일에 살펴본 고난에 대해서 가져야 할 마땅한 시각인데요, 우리가 이것과 더불어 살펴본 또 한 가지 내용은 바로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기억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죠? 적어도 빌립보서 1장은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죠?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받게 하기위해서”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그 고난 때문에 믿음과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그런 것들을 은혜의 능력으로 이겨내게 해 주시려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이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은혜의 엄청난 유익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한 번 따라해 볼가요? “은혜는/ 죄와/ 고난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다시 한 번요. “은혜는/ 죄와/ 고난을 이기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꼭 기억하셨다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은혜를 항상 기쁨을 빼앗아가는 죄와 고난과 시험을 이기는 일에 사용하셔서 항상 기쁨 가운데 머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은 2장으로 넘어가면서 또 다시 성도가 누리는 기쁨에서 교회 공동체가 차지하는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성도의 기쁨을 다룰 때 항상 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은 바울은 성도를 결코 개인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시듯이 바울도 항상 몸된 교회의 지체인 성도들만을 생각할 수 있었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성도 개개인을 생각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는 마치 몸에서 떨어져 나온 몸의 부분 부분을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시각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자리는 교회이고, 그 몸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하나님의 시각 말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각을 회복하고 잃어버리지 않을 때, 우리는 몸된 교회가 가져다 주는 훨씬 더 풍성한 기쁨과 은혜를 알게 될 것입니다.
2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표지판입니까? 지금부터 나올 이야기는 앞 부분의 결론이라는 표지판입니다. 그럼 앞 부분로 가 봐야죠. 거기 무슨 내용이 있습니까? 은혜의 목적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해서 은혜를 주신다는 말씀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니까 2장은 그런 은혜를 받은 자로서 빌립보 교회는, 그리고 우리들은 고난과 시험을 이기고 또 기쁨을 지키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그 은혜를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 무엇에 우선적으로 사용해야하는지를 말해주는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2장 1절은 우리 말로도 그렇지만 원어성경에서도, 그리고 영어성경에서도 제대로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구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성도 여러분 이게 무슨 뜻입니까? 도대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런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말만 보아서는 잘 구분이 안되는 것이 사실인데요. 이렇게 생각해 보면 금방 이해가 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한 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 정신이 있다면 그래서는 절대로 안돼.” 정신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것입니까? 있다는 것이죠. 확실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래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고, 나는 당신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1절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가정하고 조건을 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의미는 정반대입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에게는 앞으로 바울이 말할 것들이 있습니다. 확실히 있습니다.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똑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1절 이하의 내용은 “이런 은혜들이 없다면 안해도 좋지만 만약 있다면 이렇게 해라”라는 의미가 아니라 “너희에게는 이미 이런 은혜가 있으니까 꼭 해야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너희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충분하니까 꼭 그렇게 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무슨 은혜가 있다고 하는지 먼저 그것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첫번째 은혜는 ‘그리스도 안의 권면’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지금껏 빌립보 교회에게 주었던 가르침과 격려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빌립보의 성도들을 권면하고 또 격려했습니다.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었고, 떨어져 있는 상황에서도 편지를 통해서 계속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에 주신 첫번째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은혜, 가장 강력한 능력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 안에 담겨져 있는 진리와 약속들이야 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은혜요 능력입니다. 일차적으로는 기록되어 있는 성경 자체가 그렇지만, 조금 확장한다면 여러분이 목회자들을 통해서 듣고 있는 설교와 가르침 속에 담겨져 있는 진리와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성경의 진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을 분명히 적어놓으시고 또 거기서 약속하시고 보증하신 분이 바로 신실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경은 일종의 계약서와도 같은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렇다. 그래서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보증이 담긴 계약서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큰 은혜가 되고 또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두번째 은혜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이 사랑의 위로는 지금 바울이 고난 가운데 있는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주고 있는 사랑가득한 위로를 말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이 가장 신뢰하고 또 의지하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진심어린 사랑의 위로는 엄청난 힘이 됩니다. 특히 신앙 안에서 받게 되는 위로는 믿음의 용기를 주며, 소망을 주고, 다시 믿음을 회복하게 하는 계기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어려움 가운데서 정말 신뢰하는 누군가의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평범한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특히 그 위로가 성도들 사이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은혜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을 만지고 또 살리는 그런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세번째 은혜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강력한 영적인 유대감을 말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주시는 가장 강력한 은혜입니다. 제가 예전에 사랑의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을 때, 제가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첫번째 그 교회에 출석했던 날로 기억되는데요. 그 날 예배를 드리는데, 갑자기 거기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가족이라는 아주 강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족이 아버지 앞에 모여 아버지를 만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때 그것만으로도 저에게는 얼마나 놀라운 위로가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든든하고 기쁨이 충만해졌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 때, 그게 진짜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힘이 되고, 기쁨이 되는 모임이 바로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느낌과 확신을 잊지 못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품고 목회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저 여기 들어와 앉는 순간 우리가 하나라는 것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교회 말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령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성도의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그것이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가지는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좋습니다. 여러분, 듣기 좋으라고 빈말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좋습니다. 서로간의 관계가 형식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따뜻하고 또 자연스럽기 때문에 참 좋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그저 ‘좋은 분위기’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사실 그것만도 우리에게는 큰 은혜이지만 그렇다고 그것에서 끝나면 안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성령님 안에서 누리는 강력한 연대감, 그러니까 코이노니아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묶어주셨기 때문에, 그 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그러한 영적인 교제가 풍성해야 합니다. 모두가 다 성령님과 교통함으로써 그 분 안에서 함께 영적으로 교통하는 그런 교제가 풍성해야 합니다.
네번째 은혜는 두 가지이지만 한 덩어리입니다. 그것은 바로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음을 다하는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인한 고난 중에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과 똑같은 마음이 되어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네번째 은혜입니다. 사람이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고 또 동정심을 갖는 것은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능력도 없습니다.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크든 작든 그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유익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전혀 다릅니다. 물론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을 마음을 다하여 아끼고 사랑하시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은 그것 자체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 마음과 행동은 언제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같은 마음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헤아리실 때, 그것은 항상 우리를 향한 구체적이고 강력한 도움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저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리는데, 그게 만약 “그저 나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러기만 하면 됩니다”라는 뜻이라면 그런 기도는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드리는 이유는 그 분의 불쌍히 여기심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남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은 그것 자체가 아주 구체적인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이미 이런 네 가지 은혜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들, 그러니까 교회 안에는 모든 고난과 시험을 이겨낼 넉넉한 능력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이미 충분한 자원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탄의 공격에도 기쁨의 성을 지켜낼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확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싸우기만 하면 됩니다.
바울은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 27절에서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사도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가 될 것을 반복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미 너희는 너희를 하나로 만들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은혜라는 자원을 확보하고 있으니 꼭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수많은 답이 있을 수 있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교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되는 것입니다. 크게는 모든 기독교회들이 그래야 하고, 작게는 하나 하나의 지역교회들이 그래야 합니다. 사실 엄밀하게 본다면 성경은 하나가 아닌 교회를 결코 교회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개로 찟어진 몸을 이미 몸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찟어지고 나뉘어진 교회는 이미 교회로 불릴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이미 사탄의 시험에 실해한 교회이며 앞으로 닥쳐올 고난과 시험을 이겨낼 능력이 없는 교회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서라도 하나가 되지 못한 교회 안에, 이리저리 갈라지고 찟겨진 교회 안에 신앙의 기쁨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가 하나됨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 교회는 이미 신앙이 줄 수 있는 기쁨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스스로 교회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서는 하나가 되고 그 하나됨을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신 은혜를 사용해서 교회의 하나됨을 회복하고 또 지켜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우선 성경의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성경의 진리를 믿고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주는 확신과 소망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교훈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이 가리키는 방향은 언제나 한 방향입니다. 그래서, 모든 생각을 하나로 묶는 성경의 권면을 모든 성도들이 받아들이게 될 때, 그 교회는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성경 자체 보다는 자꾸 다른 은혜의 도구들이나 프로그램에 의지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입니다. 다른 은혜의 도구들이나 프로그램에 의지하는 일은 교회를 결코 하나로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로 만들지 못합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필요합니다. 건강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필요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런 것들을 교회의 기둥으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교회를 하나로 묶는 끈으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전부다 악하고 틀렸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그런 것들이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가장 큰 은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은혜를 붙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모일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공급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로 묶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그 누구의 말이 그런 권위를 가지겠으며, 또 그렇게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겠습니까? 그럴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강력한 은혜를 자신들을 묶는 가장 강하고 중요한 끈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붙들어야 할 두번째 은혜는 바로 사랑의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 사이의 관계 또한 은혜를 주시는 아주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십니다. 특히 성도들이 서로 서로를 향해서 같은 사랑 안에서 나누는 위로는 교회를 하나로 묶는 강한 은혜가 됩니다. 성도들은 같은 사랑을 나누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모두를 사랑하는 그런 모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의 사랑은 이와는 많이 다른 아주 안타까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많은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은 오히려 어떤 동우회 회원들끼리 나누는 사랑보다도 못합니다. 제가 예전에 물고기에 푹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우회 하나에 가입했는데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회원들끼리 얼마나 잘 퍼 주는지... 한 마리에 몇 만원하는 물고기를 몇 마리씩 아낌없이 주고 또 줍니다. 물고기 뿐만이 아니라 집에 쓰지 않는 물건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눠 줍니다. 그래서 저도 그 덕을 좀 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물고기 사육을 그만둘 때, 다른 분에게 그런 은혜를 좀 나눠 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왜 그들은 그럴 수 있었을까요? 왜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향해 너그러워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의 관계가 서로 주고 받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 자신이 가진 것을 공짜로 나눠주기 시작한 것은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그렇게 하니 받은 사람이 또 그렇게 하고, 그것을 받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하고... 그래서 그들은 단지 물고기라는 공통분모로 만난 사람들이었으면서도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 안의 사랑이 풍성하지 못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서 아얘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면서 서로 싸우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니까 도무지 사랑이라는 것이 생겨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랑이 일방적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일하는 사람만 일한다”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한 몸된 교회 안에서 이게 말이나 됩니까? 한 쪽은 주기만 하고 한 쪽은 받기만 한다면 그게 정상적인 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냥 사랑이라고 말하지 않고 “같은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내 사랑이 너의 사랑과 같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가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이 누군가에게로 흘러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꼭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을 나를 사랑해준만큼 사랑하지는 못할지라도 그 만큼의 사랑을 다른 방식으로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서 나온 위로만이 교회를 하나로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런 위로는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확신 속에서 주고 받는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시험 가운데서 받는 위로가 도리어 상처가 되고 더 큰 시험이 될 때가 있는 것은 교회의 성도들이 같은 사랑을 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몸 안에서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있는 위로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게 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세번째로 붙들어야 할 은혜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교제라고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유대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한 몸에는 한 영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만 계셔야 합니다. 이렇게 한 몸 속에 한 영이 있을 때, 비로소 교회는 ‘한 사람’이 됩니다. 한 몸에 속한 지체들을 서로 교통하여 한 몸을 이루고 그 속에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듯이 성도들도 ‘한 사람’이 된 교회 안에서 서로 교통하며 풍성한 영적인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또 그럴 때라야 한 뜻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며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싸워줄 수 있습니다. 콩가루 집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가 되지 않는 가정을 말합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는데, 아들은 저렇게 말합니다. 어머니는 그 일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가정 안에 기쁨이 있을리가 없습니다. 외부에서 오는 고난을 이겨낼 힘은 더더욱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누리는 교제가 없는 교회는 이런 교회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방향이 없습니다. 또 그 방향으로 갈 수 있는 힘도 없습니다. 안에서 생겨난 문제들을 해결하느라고 다른 일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기쁘고 충만한 신앙생활은 남의 이야기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미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주신 ‘하나됨’이 있습니다. ‘영적인 유대감’이 있습니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에 이미 주어진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느껴지고 안느껴지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선 우리의 믿음으로 받고 또 취해야할 은혜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셨습니다. 하나의 몸이 자신의 생존이라는 목적을 향해 움직여 가듯이 우리가 한 뜻을 가지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같은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서로 다른 싸움을 싸우거나 혹은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믿음 때문에 생겨나는 이런 저런 고난과 시험들의 공격으로 부터 우리의 믿음을 지켜내고 또 믿음으로 승리해야 하는 똑같은 싸움, 그렇게 해서 기쁨을 지켜내야 하는 똑같은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한 소대원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싸워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믿음을 지켜내고 기쁨을 지켜내겠다는 옆 사람과 똑같은 뜻을 품고 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모두가 승리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고, 주님께서 주신 기쁨의 고지를 지켜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붙들어야 할 은혜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언제나 의지해야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것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라는 은혜에 의지하기 위해서 온통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 일에 대해서 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앞에 나온 것들도 중요하지만 이 마지막 두 은혜는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되고, 그것을 지켜가고 그래서 교회의 교회됨을 지키고 교회에 주신 기쁨을 지켜내려면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는데, 그 겸손함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계속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영혼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자신을 의지하려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의지한다는 것은 구심점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기 중심적이 되고, 그래서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이 결코 연약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강한 것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그 분의 긍휼과 자비는 멈춰있지 않고 항상 움직이며 가장 강력하게 일하는 긍휼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은혜를 붙들 때, 그리고 주님이 그 은혜로 우리를 묶어 주실 때, 우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가장 강력한 사슬을 얻게 되고, 그 안에서 함께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쁨을 위해 주신 가장 강한 산성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기쁨을 지켜내려면 바로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산성을 지키며 그 안에 온전히 머물고 있는 한 우리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그 능력에 의지해서 믿음을 지키는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은혜를 붙들어야 하고, 사랑의 위로라는 은혜를 붙들어야 하며, 성령의 교제라는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라는 가장 강한 은혜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됨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를 향해 달려드는 고난과 시험들은 너끈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싸움은 힘들지라도 그 싸움의 승리를 누리는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있는 은혜를 붙들고 서로가 서로의 기쁨과 믿음을 위해서 싸워주는 강한 군대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모두가 이기는 은혜를 주실 때, 그 기쁨을 충만하게 받게 되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