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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2.11.09. 금요기도회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기도2)


창1822to33 -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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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창세기 18장 22-33절


기도는 그저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 믿음이 없으면 기도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여기시지 않으시는 일은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 우리 기도에는 어떤 믿음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의 기도는 우리에게 얼마나 풍성하고 강력한 은혜의 원천이 되는지를 함께 묵상해 보았습니다. 잠시 지난 금요일 설교내용을 되돌아 볼까요? 그저 기억을 더듬는 시간이 아니라 그 약속에 대한 믿음을 더 단단하게 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에는 약속이 있습니다. 사실 이 약속 때문에 기도는 응답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약속은 “구하라 얻을 것이요, 찾으라 찾게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라는 정말 어마 어마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그냥 그대로도 엄청난 약속이지만 그 참된 의미를 알면 더 어마 어마해집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최고로 좋은 것을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최고로 좋은 것을 찾게 될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최고로 좋은 문이 열릴 것이다.” 이것이 이 약속의 진짜 의미이고, 이 약속이 보장하는 진짜 복이기도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선하신 아버지이시니 이 믿음은 반드시 필요하고, 이런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모두가 다 가장 좋은 것을 응답됩니다. 믿으십니까? 안 믿으시면 엄청 손해입니다. 정말 어마 어마한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이 있는 자에게 믿는대로 주시는 복이 허락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이 금요기도회에 참석하실 때는 이 믿음을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기도회 시간이 여러분의 그런 믿음을 더욱 확고하고 든든하게 하는 그런 시간이 되도록 기도하는 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저도 금요기도회에 오시는 여러분을 위해서 항상 이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오늘 부터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기도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12번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오늘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이 시리즈 설교는 월터 부르그만이라는 성경학자에게 큰 덕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분도 제가 참 좋아하는 분 중의 하나인데요, 요근래에 저에게 큰 유익을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셔서 저같은 목회자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런 분들은 길을 모를 때 길을 알려주고 또 길을 만드는 방법도 알려주고 때로는 아주 풍성한 은혜도 선물해 주는 아주 고마운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를 앞서 하나님을 믿었고 또 기도했던 성경의 인물들도 우리에게는 참 고마운 분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분들의 기도가 우리에게는 우리의 기도를 위한 발의 등과 길의 빛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기도 하나를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잘 아시다시피 하나님의 친구로 불리웠을만큼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잘 살던 곳에서 갑자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훌쩍 살던 곳을 떠나서 방랑자가 되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그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그 약속에 의지해서 하나도 모르는,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길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약속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되리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것을 것이라”


정말 어마어마한 약속입니다. 사람이 복이 된다고 하십니다. 그 사람에 대한 태도로 다른 사람의 복과 저주가 결정되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 사람을 통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이니 정말 믿기조차 힘든 약속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이 뜬금없는 약속을 그대로 믿었고, 그래서 70년동안 살던 곳을 떠나 미지의 세계로 갑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하나있습니다. 이 약속을 우리가 물려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적인 복과 약속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그대로 전해진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데, 거기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로 왔습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잘 믿지 못해서 그렇지 정말 어마 어마한 위치와 또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이 되어서 그들이 참된 복을 알고 또 얻게 하는 통로의 역할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특권이기도 하지만 큰 책임이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의 삶이 남에게 욕먹을 만한 그런 삶이라면, 그래서 내가 욕을 먹게 된다면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악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이 되어 복되게 살아가려면 우리 삶이 그만큼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우리를 위해 축복하게 될 때, 그것이 그들에게도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이것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물론 그는 중간 중간에 불신앙에 빠져서 정말 엄청난 실수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가는 곳마다 자신이 복있는 인생을 살았을 뿐아니라 주변사람도 잘 되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나중에는 그들 스스로 아브라함을 인정하고 아브라함에게 찾아올 정도로 복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앞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나 복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그대로 따라 살아갔습니다. 뙈약볕에 나그네들이 지나갑니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던 아브라함은 그들을 깍듯이 대우하며 대접합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해서 이 사람들에게도 복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들이었고 그래서 그는 천사들을 대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을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가 그들 자신의 죄악 때문에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계획이었습니다. 그 천사들은 그 일로 소돔과 고모라를 향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그 소식을 듣고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입니다. 27절은 그 시작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떠나 소돔으로 항하여 가고 아브라함은 여호와 앞에 그대로 섰더니...”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왜 꿇어엎드리지 않고 섰을까요? 이 상황이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하려면 이런 생각을 해 보면 압니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 덜 하지만, 제가 자랄 때만 해도 아버지들은  함부로 범접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집안에 따라서는 얼굴을 마주하기도 힘든 사람들이었죠.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자녀들이 스스로 아버지 앞에 가서 서는 이례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때가 되면 자녀들은 그 무시무시한 아버지 앞에서도 기가 죽지를 않습니다.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작심을 하고 아버지 앞에 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심을 하는 이유는 아버지에게 반드시 들려주어야만 하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단호하게, 혼날 때 혼나더라도 말이죠. 그럴 때 자녀들이 가지는 감정 속에는 분노마저 섞여있기가 쉽습니다. 어떻게 아냐구요? 다 아는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섰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 가깝습니다. 이 기도, 그러니까 이 대화에서 주도권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싫으셔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들으셔야만 하는 분위기입니다. 아브라함은 섰던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더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시겠습니까? 만약 성 중에 의인 50명이 남아있다면 그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용서해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신다면 그것은 ‘부당’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정의롭게 심판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마음이 되셨을까요? 저는 속으로 이러셨을 것 같습니다. “오호, 이것봐라 많이 컸네.”하고 기뻐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의견을 받아들이십니다. “내가 만일  소돔 성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해 주겠다.” 


하나님의 입에서 ‘용서’라는 말이 떨어지자 마자 아브라함은 연속해서 의인의 숫자를 줄입니다. 50명에서 45명으로, 45명에서 40명으로 그리고 또 30명으로 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자는 대로 하십니다. 마치 두 사람은 흥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자꾸 더 깎아달라고 조르는 손님에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계속 가격을 낮추어 주는 가게 주인 같으십니다. 아브라함은 내친 김에 계속 갑니다. ‘노하지 마옵시고’에서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로 그리고 다시 ‘이번만 아뢰겠습니다’다로 점점 자세를 낮추어 가면서 그 숫자를 30명에서 20명으로 거기서 또 10명으로 의인의 숫자를 줄이고 또 줄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제안을 받아들이셔서 의인 10명만 찾아도 그 지역을 용서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거기서 두 사람의 거래가 끝이 났습니다. 


물론 이 기도는 결국 소용없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그 지역을 통틀어도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여겨주실 만큼의 의를 가진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19장 2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롯과 그의 딸을 살려주신 것도 아브라함을 보아서 그렇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소돔과 고모라에는 의인들이 하나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기도를 통해서 하려고 했던 일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서 기도하는 사람과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선 기도를 드리는 기도자는 항상 자신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이 되어야 하는 사람, 자신 때문에 다른 이들이 하나님의 복을 얻게 하는 사람이어야 함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게 망가져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또 지금 그 성읍에서 얼마나 더럽고 추한 죄악들이 버젓이 저질러지고 있는지도 모두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감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람은 자신이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수록 더럽고 추한 죄악들을 보는 것을 힘들어 하며, 또 그래서 그런 사회나 사람들에 대해서 더 쉽게 염증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볼 때, 마음에 분노를 품게 되었기가 쉽고, 그 악취나는 죄악으로 염증을 느껴서 아얘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그게 자연스럽겠지요.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마음과 생각을 이겨냈습니다. 그리고서는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를 살리기 위해서 아얘 작심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서고, 또 여러번에 걸쳐 하나님의 노하심을 뒤집어 쓸 각오를 하고 그들을 위해 중보를 합니다. 감히 일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부당’이라는 단어를 들먹이며 그것도 다섯 번씩이나 거래를 하려고 듭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이 만들어낸 자기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한 복이 되어야 하는 사람, 자기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복을 얻게 해야하는 사람이라는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기도는 이러한 소명에서 나온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하나님, 정말 잘 결정하셨습니다. 이참에 아얘 전부 쓸어버리십시오.”라고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섰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의 기도를 기뻐하실까요? 그 분은 우리들의 어떤 기도를 듣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사람들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다른 이들을 위한 ‘복’임을 잊지 않고 그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런 기도라면 얼마든지, 때로는 건방지고, 주제넘게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듣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은 사람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의 이런 기도를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땅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죄악들을 그 누구보다도 역겨워하셨고, 그 죄로 인해서 가장 큰 고통을 당하셨지만 그래도 이 땅의 족속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그들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 처럼 이 세상을 벌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구원하며 또 복을 주시려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위한, 땅의 모든 족속들을 위한 ‘마지막 복’ 그리고 ‘참된 복’이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우리들 또한 우리가 이 땅에 ‘복’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우리의 본능이나 분노에서 나온 기도가 아닌 우리의 소명으로부터 나온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에서 비롯된,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복’으로써 드리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는 얼마든지 들어주십니다. 


이 세상은, 그리고 사람들은 항상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너무나 악한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행해서 우리 마음과 영혼에 상처를 줍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 때문에 기도할 때라도 우리는 내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한 ‘복’으로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기도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준비를 하시고 우리 앞에 서서 우리에게 귀를 기울여 주실 것입니다. 


두번째로 오늘 본문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기도는 사실 기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를 드리는 태도도 그렇고 방법도 그렇고 일개 피조물이 창조주에게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도 들으십니다. 기쁘게 듣고 응답하십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은 ‘말이 통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가장 힘든 일들 중의 하나가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릴 때, 우선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들을 준비를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또 얼마든지 들으시고 이야기를 나눠주실 수 있는 그런 분이십니다. 또 그런 기도라도 들으시고 타당하시면 거기 맞춰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에 이런 신이 어디있습니까? 세상에 어떤 신이 이렇게 자신을 우리에게 맞춰주시고 마치 친구나 혹은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듯이 의견을 조율하는 일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만이 이렇게 하십니다. 하나님만이 기꺼이 이렇게 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실 자격이 충분한 분입니다. 이 세상에 우리 하나님이 될 자격이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가 되고 또 이야기가 통하는 분이시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기도를 그렇게 대담하게 드릴 수 있었고, 또 하나님은 그 확신에 따라서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알고 이해하는 그만큼만 성장할 수 있고, 또 그만큼만 우리에게 생생하고 풍성한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온 세상을 위한 ‘복’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살아갈 때도, 기도를 할 때도 다른 이들을 위한 ‘복’으로서 그렇게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 세상을 위한 ‘복’으로서 기도드릴 때, 그 기도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 기도가 거칠고 때로는 주제넘는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세상을 위한 ‘복’이 되기 위해서 용기를 내어 드리는 기도에 기쁘게 응답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말이 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꺼이 우리에게 귀 기울여 주시고, 우리와 ‘타협’마저 서슴치 않으시는 하나님, 당신의 뜻마저 변경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런 좋으신 하나님, 이런 넉넉하신 하나님, 이런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으며 또 그 분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드리는 우리에게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어떤 존재로 부름을 받았으며 또 어떤 존재로 기도드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내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서 그 분께 기도드리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런 든든한 기초 위에 세워질 때, 우리의 기도는 형식적이 되지 않을 수 있고, 생생하게 살아서 역사하는, 때로는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그런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가 누구인지,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실히 알게 하셔서 우리의 기도가 아브라함의 기도를 닮은 세상을 복되게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움직이는 그런 풍성하고 능력있는 기도가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