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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12. 새벽예배 -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51)

요0801to11 -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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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요한복음 8장 1-11절


     예수님 때문에 유대인들 간에 설왕설래가 많아졌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심각한 의견대립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그런 갈등은 유대인들의 지도자 안에서도 큰 균열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정직한 지도자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처리하는 일에 대해서 신중하고 정당한 절차를 밟으려고 했고, 그렇지 않은 지도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처리하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점점 더 완악해져 가기만 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간음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 앞에 세웠습니다. 그리고는,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고 되어 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굉장히 정중하고 또 단순한 질문같지만, 이 질문은 미리 치밀하게 계산된 후 던져진 그 속에 커다란 올가미를 숨기고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만약에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하시면, 그것은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실정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당시 사형집행권은 유대인들이 아닌 로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유대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빌라도의 동의를 얻어내려고 그렇게 애썼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반대로 용서하라고 하면, 그것은 율법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 됩니다. 어떻게 대답하여도 예수님께서는 함정에 빠지게 되어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번에는 예수님을 확실히 잡았다고 생각하면서 그 여인을 데리고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잠시 앉으셔서 땅에 무언가를 기록하신 후에,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흥분한 사람들의 마음을 가라앉히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지금 본디 흙이었던 그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채근은 수그러들 줄 몰랐습니다. 이제 주님은 천천히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치라” 성경은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모두 하나씩 둘씩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듣고서야 자기 자신들도 본질적으로는 그 여인과 별반 다른 것이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래서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돌을 던졌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꼭 같은 비중의 죄악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크고 작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그 누구도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는 그런 죄인들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없었다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진노 밖에 남지 않을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이제 성전 안에는 그 여인과 예수님 밖에 없었습니다. 여인을 잡아와서 고소하면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 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마저도 모두 다 슬그머니 빠져나가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너를 고소하던 자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은 어디 갔느냐? 그들이 없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이 죄인을 보는 눈과 예수님께서 죄인을 보시는 눈은 무척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 여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정말 쥐구멍이라고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고, 수치감에 고개를 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런 여인을 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을 예수님을 얽어 메는 올가미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전혀 죄지은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여인의 마음과 삶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회개나 혹은 회복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죄인이기에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중요성도 없는 사람, 그저 자신들의 악한 목적을 이루어줄 도구로만 여겼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어떤 눈으로 우리가 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을 바라봅니까? 혹시 우리들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우리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사회적인 통념에서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전혀 중요하지 않은, 하찮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잘못을 했으니 그렇게 대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으면 그런 취급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비록 죄인이어도 우리는 그들을 하챦게 취급하거나, 그저 벌이나 받아야 할 사람들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큰 죄인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망가져 있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 보면, 예수님께서는 결코 죄를 가볍게 다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조건 덮어주고, 죄 없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는 죄라고 짚고 넘어가시는 분이십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기는 하지만 꼭 처리하고 넘어가십니다. 주님은 먼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그 여인을 용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죄는 지었으나 용서하고 더 이상 비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내시지 않고,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여인이 전에 한 행동들은 엄연히 큰 죄이고 잘못된 것임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이 주님께서 죄를 가볍게 여기신다는 말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죄를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죄를 싫어하시는 싫어하심 보다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의 크기가 더 크기 때문에 용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 속에 주님께서 죄인들을 용서하시면서 그들에게 가지시는 기대와 요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때 그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기를 기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바램이며 관심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용서를 빌 때에 우리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다시는 그런 죄악을 범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서 그것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의 현재 상태보다는 미래에 더 관심이 많으십니다. 주님께 용서함을 받은 후에 다시는 동일한 죄, 혹은 심한 죄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주님께서 지적하셨듯이 정죄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의 잘 잘못을 따지고 넘어가야 속이 풀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죄인 자신이나 그 사람의 미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의 잘못이 무엇이냐? 그 사람의 죄가 얼마나 심한 것이냐 하는 문제에 매달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정죄함으로써 일종의 재판관으로서의 쾌감, 비교우위적인 쾌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님께서 죄인들을 바라보시는 그 눈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눈으로 죄인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비록 죄를 죄로 여기더라도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그를 용서하며 그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도록 기도하고 도와야 합니다. 사람은 정죄를 받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를 용서해 주고, 그에게 기대를 걸고 진심으로 걱정해 줄 때 변화됩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의 눈으로 우리의 형제 자매들, 우리의 이웃들을 바라봅시다. 

   

    어렵고 힘들지만, 용서하고 진심으로 걱정하며, 그의 미래의 더 나은 삶, 의로운 삶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주님의 눈을 닮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