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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1.14. 수요저녁 - 이 마음을 품으라 3 (빌립보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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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1-12절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원형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이 그 분을 닮아있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겉모습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닮아있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 몸의 균형과 아름다움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과 조화로우심을 닮아있을 뿐입니다. 직접적으로 그 분의 모습을 닮은 곳은 겉사람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그 분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 또한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우리의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 또한 하나님을 닮아 있습니다. 감성이나 의지도 하나님을 닮아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과 닮아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의 자녀가 될 수 있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또 그 안에서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리는 참된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의 행복과 기쁨을 위한 아주 중요한 한 가지를 알려주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을 형상을 잘 지킬 때에만 행복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닮아가면 더 닮아갈수록 더욱 더 깊고 풍성한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면 갈수록 그만큼 하나님과 우리의 교제는 더 깊어지고 온전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증명이 된 사실입니다. 여러분 보시기에 교회 안의 어떤 사람이 제일 행복해 보이고, 충만해 보이며 또 여러분이 부러워할만한 사람이라고 느껴지십니까? 건강한 사람입니까? 예수 믿고 세속적인 성공을 얻은 사람입니까? 자녀가 잘 된 사람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여러분 보시기에 누가 가장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 같으십니까? 누가 제일 많이 기뻐하며 제일 많이 행복해 하시는 것 같으십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을 제일 닮고 싶으십니까? 예수를 믿고서 인격도 영성도 예수님을 많이 닮아가고 있는 그런 사람 아닙니까? 그런 분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아, 나도 저 분을 꼭 닮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보시면 얼마나 부럽고 또 존경스러운지 모릅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기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점점 더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잘 지켜낼수록 그리고 더 닮아갈수록 우리의 기쁨과 행복이 더 커지고 든든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할 때, 그 형상 속에는 단순히 성부 하나님의 성품과 영성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잘 보시면 ‘내’가 아니라 ‘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성부 하나님의 형상만이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분들의 형상일까요? 우리의 어떤 부분이 삼위일체 성령님의 형상일까요? 그 답은 삼위일체라는 말 안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께서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가진 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편하게 표현하면 세 분이시지만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시지만 또 세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이런 것이 없어서 이게 무슨 뜻인지 우리 손에 딱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말만으로도 세 분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느낌은 오지 않습니까? 바로 그것이 삼위 하나님의 형상 중에서 무척 중요한 부분이고 바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사실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은 세 분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 관계의 풍성함과 온전함은 만약 세 분이 홀로 존재하셨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기쁨을 세 분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왜 인간은 모여살려고 하는가? 왜 가족을 이루고 사는가? 그리고 왜 혼자 살 때보다 함께 살 때 그 기쁨과 행복이 더 커지는가? 이런 질문을 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뭐, 없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왜 그런가 말입니다. 그 해답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온 인류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을 닮은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도 하나님을 닮도록 지음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 뿐만 아니라 모여있을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지음을 받았고 그것이야 말로 우리의 참된 기쁨을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고 또 회복되어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설교도 같은 맥락 안에서 이어지겠지만, 지난 두 주간 우리는 우리가 기쁨을 누리려면  어떤 것 하나를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바로 교회의 하나됨입니다. 교회가 하나될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라고 할 수 있고, 성도들 또한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하나가 아닌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니고, 하나됨이 깨진 교회 안에서는 참된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지난 시간에는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데, 오늘은 여기에 또 하나의 아주 중요한 이유를 덧붙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따라, 그 분들의 그 긴밀하신 관계를 닮도록 지음 받았고, 그래서 그 분들처럼 온전한 관계 안에 있을 때에만 그 분들처럼 온전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만 하는 두번째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십니다. 세 분이 하나이시며, 또 세 분이신 언제나 가장 완전한 공동체로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여기에 그 분들이 누리는 풍성한 기쁨이 있습니다. 삼위 하나님의 그 긴밀한 관계가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누리시는 기쁨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는 말이 가지는 중요한 의미 중에는 원래는 우리들도 가지고 있었지만 죄 때문에 깨어지고 망가져 버린 그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 때문에 교회의 하나됨이 우리 개인의 기쁨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없애버려야 할 장애물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두 가지였는데, 기억나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다툼과 허영입니다. 우리가 경쟁심과 허영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넘어가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는지를 믿고서 살아갈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하나되기 위해서 무엇을 하면 안되는가를 생각해 보았다면 오늘은 본문을 통해 그렇다면 하나됨을 지켜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꽃밭에 억센 잡초가 나는 것을 막으려면 잡초를 뽑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잡초보다 더 강한 좋은 꽃을 심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그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원리가 바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꽃밭에서 경쟁심과 허영심을 뽑아내고 그 자리에 겸손한 마음을 심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행동보다 마음을 앞세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행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행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행동의 원천으로 삼는 것, 그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우리가 행동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하고 노력하기 전에 우리 마음의 변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천이 썩어 있으면 잠시 잠깐은 좋은 물이 흘러나올 수 있겠지만 곧이어 다시 썩은 물이 흘러나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한 행동을 하려고 하기 전에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속사람이 그렇게 변화되도록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은혜인 동시에 명령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한 마음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을 향하도록 의지적으로 애써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겸손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이 말을 듣고 기분나빠지는 분은 안계시죠? 그런데, 이 말은 원래 그렇게 좋은 말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 말이 성경에 기록될 당시에는 이 겸손한 마음은 전혀 미덕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서 겸손한 마음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노예의 정신상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그 속에 천하고 부적당하고 추하고 비열하고 보잘 것 없다는 어감이 들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이 말을 들을 때 결코 좋은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상하게 이런 노예의 정신상태, 겸손한 마음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태도요 또 미덕으로 권장합니다. 특히 이러한 마음상태가 다른 사람들을 대하고 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칠 때에는 더욱 더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합니다. 


성도는 누구나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어디서든지 찟고 나누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게 하고 또 하나됨을 더 온전하게 만드는 일에 부름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이 소명을 충실히 행할 수 있을까요? 바로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군림하려고 하고 힘을 휘두르고 권위를 내세우는 사람은 결코 참된 하나됨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있기 때문에 하나됨이 깨어져 나가고 맙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권위를 내세우고 또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점점 하나됨을 잃어버리고 교회됨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주신 기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겸손함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교회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권위를 위임하고 또 그렇게 권위가 사용될 수 밖에 없지만, 그렇게 권위를 위임받은 사람들은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그 권위를 위임받은 것은 단지 주님께서 맡겨주셨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며, 나는 그 일을 통해 교회를 하나되게 하고, 또 그래서 교회에 기쁨을 더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겸손한 마음은 종의 마음입니다. 종은 자신을 항상 아래에 둡니다. 낮은 곳에 둡니다. 그러지 않으면 종이 될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보다 낮추는 것, 그렇게 종의 마음을 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적절함, 비열함, 천함이라는 단어를 싫어하는 것만큼 우리는 스스로를 낮추는 것을 어려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할 때, 우리가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나의 겸손한 마음을 통해 하나가 될 교회, 그리고 그 하나됨 안에서 누리게 될 ‘나의’ 기쁨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동기로 삼아 움직여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겸손한 마음을 위한 첫 발자국을 내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 종의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할 첫번째 일은 바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품기도 어렵지만 이것은 정말 더더욱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 몰라도 저는 이전에 이 말씀을 들으면 이 말씀의 부당함 때문에 속에서 화가 올라오곤 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머리 속에 도저히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는 어떤 사람들이 떠오르곤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래, 저 사람에게도 나에게 없는 장점이 있지.’라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달래 보려고 해도 되지를 않았습니다. 교만 때문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정말 인간같지 않은 사람을 나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못하는 것은 결코 교만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이 말씀에 대한 저의 오해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누구든 그 사람을 나 자신보다 ‘나은 존재’로 여기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죠. 모든 사람은 전부 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존재의 무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은 결코 억지를 부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똑같이 만들어 놓고 다르게 생각하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원 뜻은 ‘나보다 남을 중요하게 여기고’라는 뜻입니다. 이 일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만 보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본문의 맥락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놓치지 않고 또 누리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도 이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이런 뜻이 됩니다. ‘각자가 다른 사람을 자신의 기쁨을 위한 더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고’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실마리가 조금 보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공동체에서 기쁨은 나 혼자 잘 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옆 사람도 잘 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잘 해도 옆 사람이 잘못하면 기쁨은 깨지고 맙니다. 그리고 그래도 내 기쁨은 내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어도, 옆 사람의 기쁨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 때문에 그 사람의 기쁨이 깨진다면 나의 기쁨도 깨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누리는 기쁨에 관한 한 나보다는 그 사람이 더 중요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성도라면 다른 성도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내 기분이 상한다고, 내가 불편해 진다고 함부로 대할까요? 그 사람이야 상처받건 말건 내 할만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거칠게 대할까요? 내 생각 내세우자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겠습니까? 그 사람 때문에 내 기쁨이 깨지는데, 그러면 나도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는데 그렇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정말 정말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내 기쁨이 내 옆의 지체에게 달렸다는 것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그 사람은 적어도 그 기쁨에 있어서는 나 자신보다 그 사람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될 것이고, 그런 입장에서 그 사람을 조심스럽게 대할 것입니다. 오히려 내 기쁨을 위해서라도 그 사람의 기쁨을 더 크게 하는 방법을 찾아 그 방법으로 그 사람을 대할 것입니다. 그렇게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종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대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내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 나와 의견이 다르고 스타일이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 항상 이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번 따라해 볼까요? “그 사람은 나보다 내 기쁨을 위한 더 중요한 사람이다.” 어떠십니까? 이제는 많이 쉬워지셨죠? 이제는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는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이시죠? 노력이야 여전히 많이 필요하겠지만 여러분의 기쁨을 위해서 그 사람을 종의 마음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함께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 다음에 이야기하는 것은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아니라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말하는 겸손한 마음, 종의 마음을 품고 해야할 두번째 일입니다. 우리 말 성경으로는 ‘일’이라고 되어 있어서 마치 맡은 일을 할 때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이해되기 쉽지만 사실 이 ‘일’은 굉장히 범위가 큰 말입니다. 물론 ‘일’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 속에는 그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관심사, 이익, 의견 등등이 다 포함되어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내 입장, 내 관심사, 내 이익, 내 의견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입장, 다른 사람의 관심사, 다른 사람의 이익, 다른 사람의 의견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일을 할 때, 그 모든 것을 함께 생각하고 고려하여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겸손한 마음에서, 종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니 결국 나보다는 남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들의 입장, 관심사, 그리고 이익을 더 많이 고려하고 존중하면서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을 깨뜨리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자기 중심성’입니다. 자기 중심성에 빠진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해놓아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리고 내가 공동체를 섬기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공동체를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내 입장, 내 이익, 내 관심사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 그 교회는 좋은 교회입니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교회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관심사가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만 생각해야할 일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것 또한 교회에 속한 다른 지체들과의 관계 속에서 추구해야할 일입니다. 그 범위를 벗어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 일이 지켜져야 교회의 하나됨이 지켜지고, 또 그 속의 기쁨이 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의견을 내실 일이 있을 때는 항상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순전히 내 관심사, 내 이익, 내 입장, 내 기호에 따른 의견인지, 아니면 정말 교회를 위한 일인지 잘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더라도 절대로 다른 이들의 유익을 깨뜨리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가 깨지고 기쁨이 깨집니다. 나중에는 그 속에 속한 나 자신도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가 되고 또 하나됨을 유지하기 위한 바울의 권면은 너무나 단순하고 평범한지도 모릅니다. 정말 누구나 다 아는 것이죠. 요즘 서점가에 가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나 처세술에 관한 그래도 무게있는 책들을 읽어보면 이런 비슷한 종류의 이야기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남의 장점을 보고 그 사람을 나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기라’ ‘자신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라’라는 이야기들과 겉으로만 보면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똑같은 이야기가 다 똑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서두에도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 본문의 하나님 말씀은 실은 우리에게 그런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닮고 흉내내서 하나님이 누리는 참된 기쁨을 받아 누리라는 초청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이십니다. 어쨋든 세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이 세 분은 어떻게 해서 항상 하나됨을 유지하셨고, 또 그 속에서 그 무한하고 온전한 기쁨을 누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우선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그 가장 큰 비결이 삼위 하나님의 ‘겸손한 마음’에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는 분들이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의 똑같은 본질과 위격을 가지신 분들이셨습니다. 삼위 하나님께는 상급 하나님과 하급 하나님이란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 분이 똑같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주장한다고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당연한 권리이니까요. 그러나, 그렇게 하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세 분의 그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 내는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충만하고 넘쳐 흐르는 영원한 기쁨은 없었을 것입니다. 세 분은 각각 자신을 주장하는 대신에 자신을 낮추어 서로를 섬기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한 기쁨을 놓치지 않으신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우선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모든 것을 뜻하시고 계획하시는 일을 통해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다 혼자서 이루실 수 있으셨지만 나머지는 모두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 맡기심으로써 그 구원의 영광을 함께 나누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셨습니다. 계획을 세우실 수 없으셔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자 하나님께서도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뜻을 세우시고 계획을 세우시는 영광은 성부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으시고 또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모든 일들은 전부 다 성령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자신을 부활하게 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성자 하나님을 믿게 하고, 또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들은 전부 성령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직접 그 일들을 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누리셨을 뿐 아니라, 그렇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을 섬기신 것입니다. 기꺼이 일꾼의 위치, 종의 위치에 섬으로써 말입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쁨의 비결입니다. 세 분은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일하심으로써 완전한 기쁨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모든 일을 이런 식으로 하시니 삼위 하나님은 깨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 속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삼위 하나님의 그 온전한 기쁨의 비결은 그렇게 서로 자신을 낮추어 서로를 섬기며, 서로의 영광과 유익을 위해서 일하셨던 것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 속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리고 세 분이 이루시는 완전한 공동체 속에 있는 기쁨 넘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숨겨져 있는 참된 기쁨을 누리려면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서로의 기쁨과 영광을 위해서 스스로 낮아져 섬기는 자리에 있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과 섬김을 흉내내야 합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권면을 하면서 ‘각각’이라는 말을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의 기쁨을 위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도 기억해야 하지만, 나 스스로도 누군가에게는 그의 기쁨을 위한 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겸손한 마음을 품고 나보다 남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또 자신의 일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이 일들은 누구는 해도 되고 누구는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각각 해야만하는 일입니다. 모두가 함께 시작하고 또 모두가 다 함께 애써야 하는 그런 일들입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각 스스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이런 삼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삼위 하나님과 같은 마음이 되고, 삼위 하나님을 흉내내며 살아갈 때, 그렇게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갈 때 하나님의 영원하고 풍성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형상은 바로 겸손입니다. 서로의 기쁨을 위해서, 또 그 안에서 자신이 누릴 기쁨을 위해서 낮아지고 내려놓고 섬기고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세 분 하나님 속에 있었던 충만한 기쁨을 위한 형상입니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행위들을 본 받으려 애쓸 때, 우리 공동체 중에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기쁨이 가득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각각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각각 서로의 일을 돌아봄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복된 공동체를 이루어 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