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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20. 새벽예배 -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요한복음 57)

 

요08334to40 -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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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요한복음 8장 34-40절


무언가 의지할 수 있고 또 믿을만한 든든한 구석이 있으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제대로 보기 힘듭니다. 정말 똑똑한 사람, 권력자들, 돈이 아주 많은 사람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부러워할 때가 많지만 실제로 이런 쪽에 속한 사람들일수록 자신의 본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아가기가 더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는  자신이 믿고 기댈 구석이 있을 때는 그 뒤로 숨어버리고 자기의 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누구도 자신의 본모습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또 꺼려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언가의 뒤에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살아가는 시간이 오래되면 사람은 그 뒤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자신을 가려주는 것이 자기 자신인양 착각하게 됩니다. 자신을 가려주는 것의 힘과 크기를 자기 존재의 크기로 착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세속적인 것들만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앙 안에서 만나는 형식적인 틀들 또한 그런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사랑의 교회에 다닐 때였습니다. 저는 27살에야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에 비교적 밖에서 그 교회를 바라볼 수 있었는데, 제가 그 교회 청년들과 만나면서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그 당시 정말 좋은 교회였습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좋은 교회였죠. 그런데 이게 그 교회의 일부 청년들에게는 오히려 신앙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 교회에 오래다닌 청년들은 아주 근거없는 착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기가 좋은 교회에 다니고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아주 높은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들어간 저에게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 인간은 언제나 저런 이상한 오류에도 빠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똑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건 사실이었죠. 혈통적으로 보면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손이 맞으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말이 단순한 혈통적인 개념이 아니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자신들을 보호하는 난공불락의 성벽처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녀들, 랍비들의 표현대로 하면 왕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비록 정치적으로는 그 어떤 세력 밑에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은 종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좋았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 사실이 자신들의 구원은 이미 정해진 것이라고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니까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들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의 후손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와서 풀어주지 않으면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하고 또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없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장벽 뒤에 숨어서 자신들이 죄의 종이라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래서 거의 잊어버릴 정도의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편안해 하고 자랑스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와서 그들이 숨어있는 벽을 허물고 환한 빛으로 그들을 끌어내어 여전히 죄의 종으로 남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하려고 하니 그것이 편안할 리가 없었습니다. 불편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사람을 거부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까지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보다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언약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정말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 언약에 대해서 알고 배울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사람은 그 언약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 언약에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껍데기 뒤에 숨어있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않았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약 참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을 닮은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브라함과는 정반대입니다. 완전히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 아니라 사탄의 종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 때문에, 혈통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 때문에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들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사탄에 묶여있고,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틀에 묶여 있는 자신의 본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내가 진짜로 자유로운가를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저 자신들이 숨어있는 벽을 허물려고 하는 것에만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향해서 너희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다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만 분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죄의 종된 상태에서 풀려나 참된 자유를 얻고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의 집에 거할 수 있는 기회를 그렇게 날려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모두 죄인입니다.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겠지만, 죄인의 가장 큰 특징들 중에는 자신의 본래 모습을 보기를 싫어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보다는 무언가 그럴 듯한 형식 뒤에 숨어 있는 것을 더 편안해 하고 더 선호한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연한 것도 아니고 그대로 두어도 괜찮은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뒤에 숨어있는 한, 인간은 결코 자신을 진실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분께로 나올 수 없고, 그 분을 통해서 참된 자유를 얻을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자녀만 들어갈 수 있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처음과는 달리 이런 모습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받고 다시 새롭게 되는 것을 좋아하지만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합니다. 이럴 때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높은 벽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본 모습을 가릴 수 있는 든든한 장벽 말입니다. 이 장벽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해 온 세월들이 될 수도 있고, 내가 몇 대째 믿는 집안 자녀라는 사실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직분이 될 수도 있고, 내가 교회나 기독교에 관련된 많은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열하자면 우리에게 벽이 되어주겠다고 유혹하는 것들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그런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닙니다. 내 본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 진실로 의미가 있으려면 내가 그 형식 속에 내용을 꽉 채우는 그런 사람이어야 합니다. 오래 믿었기 때문에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만큼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고, 그 많은 일들을 정말 주님 섬기듯 해야 하고, 그 귀한 직분에 어울리는 삶과 헌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하고, 집안이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내가 그만큼 더 뼈속까지 크리스챤이 되어 있어야 하고... 이런 것이 있어야 비로소 그 모든 형식들은 나에게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있는 이런 틀 속에 내용물을  꽉 채울만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노력을 해도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애초에 이런 것들은 우리를 위한 든든한 산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의 든든한 산성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가지고, 또 연약함을 가지고 그 뒤에 숨어도 괜찮은 그런 산성이 되어줄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완전한 의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온전히 숨겨줄 수 있고 또 숨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그런 산성이 되어 주실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를 오랫동안 믿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꽤많은 틀과 껍데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껍데기는 죄의 종인 아담의 후손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자녀가 되게 해 줄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껍데기를 온전하게 채울 수만 있다면 그래도 희망이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죄의 종인 아담의 후손들은 그런 능력을 가질 수가 없고, 그래서 그 껍데기를 채우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도 우리를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줄 수가 없습니다. 물론 분명히 노력은 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니까요. 그러나 그 의무를 다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힘으로는 자유롭게 될 수 없습니다. 


종은 절대로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없습니다. 종이 자유로워지려면 주인의 아들이 그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능력도 권한도 주인의 아들에게 밖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참된 자유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지할 때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운 노력 위에, 진리에 대한 순종 위에 결국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더해져야만 우리를 참으로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실하심 위에 그 분의 의로우심이 덧붙여 질 때에만 우리는 자유케 되어서 우리 하나님의 집에 거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틀을 채우려는 노력도 그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더욱 더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은혜에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진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우리를 풀어 자유롭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이런 든든하고 참된 자유를 소망하면서 진리에 순종하고 또 주님의 의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서 주님께서 약속하신 당당하고 온전한 자유를 놓치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