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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1.21. 수요일 저녁 - 이 마음을 품으라(빌립보서 12)


빌0201to12 - 이 마음을 품으라(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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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5-11절 

목적 :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어떻게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기쁘게 사셨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또 공동체적으로나 모두가 항상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백퍼센트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삶 속에는 우리의 기쁨을 방해하고 또 빼앗아가는 수많은 일들이 있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일들의 크고 작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충만한 은혜 가운데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그 어떤 것에도 영향받지 않는 완전한 기쁨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적어도 잠시 잠깐 동안은 그런 일들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기쁨이 흔들릴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직접 당하는 어려움이라면 그래도 하나님의 은혜로 견딜만하겠지만, 특별히 사랑하는 가족들이 내가 도와줄 수 없는 큰 아픔과 곤경 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 때문에 상한 우리의 마음은 우리를 아프고 힘들게 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의 기쁨도 어느 정도 그런 일들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또 교회 안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교우가 그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도 우리는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직 믿음이 없어서 생겨나는 연약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마음이고,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의 고통과 죽음을 슬퍼하시고 함께 아파하셨고, 우리를 그러한 곤경에서 영원히 건져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우리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찾아 오셨으니까요. 그래서 이런 일들 때문에 우리의 기쁨을 통째로 그리고 영원히 빼앗겨 버려서도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저 내 기쁨 지키자고 인간다운 마음, 우리 주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까지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를 오래 믿으면서 자꾸 자꾸 남의 아픔에 무관심해 지고 점점 더 더 냉정해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런 점에서 이런 모습은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진정한 영성, 우리 주님을 닮은 영성은 남의 아픔에 무관심한 마음이 아니라 남의 아픔을 더 온전하게 느낄 수 있는 마음 속에서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의 기쁨에 영향을 주는 수많은 일들이 있겠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이란 자기 자신의 원래 크기보다 자신을 더 크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항상 우리의 자아를 부풀립니다. 자신의 원래 크기보다 자신을 훨씬 더 크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잔뜩 부풀려진 빈 주머니들을 우리에게 가져다 붙이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는 그렇게 덧붙여진 주머니의 크기까지 다 합해서 나 자신의 크기라고 믿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그 전부가 다 나의 크기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래서 허겁지겁 그 주머니를 채우려고 합니다. 이것 저것 끌어모아 주머니를 무겁게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어느 정도 채워졌다 싶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부풀려진 크기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덧붙여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교만은 우리에게 그런 주머니들을 끝도 없이 가져다 붙인다는 것과 다른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나의 크기만큼 나를 대접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살면서 너무도 확실히 깨닫게 된 것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제일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덧붙여진 것을 모두 자신의 크기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특히 진짜로 사람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일수록 우리에게 덧붙여진 것들이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 가지고 나라는 사람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만큼의 크기로 우리를 대접해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부풀려진 자아를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여기다가 교만이 가져다 붙이는 계속 늘어만 가는 부푼 주머니들까지 있기 때문에 교만한 사람은 결코 만족을 알 수 없고, 그래서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만한 사람은 결코 만족할 수가 없고, 그래서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계속 늘어만 가는 부푼 주머니를 채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욕심을 부리며 살아가야 하고, 또 허영에 들뜬 자아는 사람들의 인정과 대접에 목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도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더더욱 문제가 커집니다. 더 불만스럽고, 더 갈증이 커집니다. 모두가 다 배고파 있고, 모두가 다 목말라 있고, 그래서 서로에게 줄 생각은 없으면서 서로가 서로에게서 얻으려고만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다면 본문이 우리에게 품으라고 하는, 꼭 품고서 살아가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계속 살펴보겠지만 다름 아닌 ‘겸손’입니다. 그러면 본문은 왜 우리에게 겸손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로 겸손한 마음에만 만족과 기쁨이 깃들 수 있고, 교만한 마음에는 만족과 기쁨이 살 자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삶을 생각할 때마다 그 분의 삶이 굉장히 고통스럽고 힘겨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저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야 했으며, 그래서 언제나 슬프고 우울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숭고한 삶이란 바로 그런 삶이어야 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기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참된 교제와 잔치가 있었으며, 병자가 고침을 받고 악마가 쫓겨났습니다. 사람들의 삶은 온전히 회복되었고, 죄인은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언제나 이런 일들을  하시고, 또 자신으로 인해 회복되고 또 행복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지내셨던 예수님께서 침울한 희생만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우리가 자꾸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훌륭한 삶, 숭고한 삶이란 다 고통스럽게 마련이라고, 아니 고통스러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고정관념 때문입니다. 물론 그 분은 사람들의 고통과 죄, 완악함들을 보시며 아파하시고 힘들어 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분이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서 평생을 불행하게 사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그 분은 우리의 본이 될 수 없습니다. 두번째 아담, 새로운 피조물의 풍성한 삶을 보여주는 본이 될 수 없으니까요. 분명 그 분은 슬퍼할 때도, 괴로워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항상 기쁨 중에 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고 그 분의 가득 찬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천국은 지옥에게 사로잡힐 수가 없으니까요. 


예수님은 겸손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충만한 기쁨 가운데 거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그 분처럼 겸손한 마음을 품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당연히 예수님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을 따라 겸손해야 합니다. 그 분이 우리의 모범이시고 스승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단지 그 분을 본받기 위해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살면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기쁨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 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교만해지면 만족스럽고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교만을 택했지만 그들은 그 교만 때문에 모든 풍성함과 기쁨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두번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다시 그 기쁨을 회복할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저 말로만 우리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삶 전체로 그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겸손하게 살면 얼마나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범은 단순히 아름다고 향기로운 삶, 숭고한 삶의 모범이 아니라 기쁨의 모범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기쁨을 위한 이미 검증된 모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놓고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도 되고 그 분의 뒤를  따라가도 됩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으로서 누려야 할 모든 것들을 누리겠다고 고집부리지 않으셨습니다. 마땅한 권리를 마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똑같으신 분이십니다. 존재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두 분의 무게는 한치도 틀림없이 똑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고, 똑같은 자리에 있어야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움켜잡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은 피조물이면서도 하나님과 같은 자리를 움켜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면서도 그 자리를 움켜잡으려 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과는 달리 충만한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겸손을 위한 첫번째 단계를 보게 됩니다. 겸손을 위한 첫 단계, 그러니까 기쁨을 위한 첫 단계는 당연한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고, 혹시 당연하게 여기더라도 그것을 움켜쥐려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크기는 정확합니다. 예수님께는 교만도 없고 허영도 없어서 자기평가에 있어서 틀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 분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그 안에서 기뻐하고 또 기뻐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시고, 그러한 자신의 크기를 정확하게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그 크기만큼의 대접을 받는 것을 고집하지 않으셨다면, 그 분의 피조물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항상 자신을 부풀려 볼 수 밖에 없는 교만에 빠져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더더욱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크기는 항상 과대평가되어 있기 때문에 그 크기만큼 대접받으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려놓지 말아야 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는 그럴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진짜 크기, 우리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크게 부풀려진 풍선에서 바람을 빼고 우리 자신을 기뻐하며 살 수 있는 크기로 되돌려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을 위한 첫번째 단계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겸손함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었습니다. 7절은 그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예수님은 마음만 비우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당연한 것을 포기하는 수준에만 머물러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그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채우려고 들지 않으셨을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권리를 비우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자신의 영광을 비우셨습니다. 또 전지하심과 전능하심, 모든 곳에 충만하실 수 있는 능력까지도 비우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비워진 곳을 사람됨으로 채우셨습니다. 종됨으로 채우셨습니다.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됨을 움켜쥐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고 종이 되시는 것을 붙잡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꼭 생각해야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비웠기 때문에 자신을 상실했느냐, 자신이 사라지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 분은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가 되셨지만, 우리들처럼 낮아지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비우셨어도 예수님은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게 하심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충만한 분이신지를 만천하에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며 사람들을 충만한 생명가운데로 인도해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자신의 영광을 더 온전히 빛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비우는 것을 많이 두려워 합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그 두려움은 그렇게 자기를 비워버리면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없는 추측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마저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자신의 삶으로 그게 전혀 그렇지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비우면 비울수록 더 충만해지고 더 영광스러워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너를 비워야 하나님도 기쁘게 할 수 있고, 너 자신도 진실로 기뻐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종종 성도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정말 어려운 지역에서 어찌보면 목숨걸고 선교하시는 분들이 우울해 하시는 것 본 적이 있느냐고, 그 분들이 불행해 하는 것을 보신 적이 있느냐고 말입니다. 어떠십니까? 여러분은 그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단순히 생각만으로는 그 분들은 항상 우울하게 쪼들려서 그리고 두려워하며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자꾸 눈물을 흘리고 짠한 마음으로 기도드리는 것이죠. 그러나, 막상 그런 분들을 만나면 그 모든 것이 우리만의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제 경험으로 보면 이 세상에 그 분들처럼 행복한 분들이 없습니다. 그 분들처럼 당당하고 기쁘게 사시는 분들이 없습니다. 말 그대로 그런 분들에게서는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그 분들이 많이 비워서, 거기까지 다 비워내서 그만큼 더 충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 비움을 통해서 오히려 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대로의 자기의 모습을 되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형이신 예수님, 우리의 모델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움으로써 더 충만해 지셨고, 더 큰 기쁨을 누리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또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심으로써 그 분은 항상 기쁨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형상대로, 예수님을 틀로 해서 만들어진 우리들 또한 움켜쥐고 채우려 할 때가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비로소 더 충만하고 더 큰 기쁨을 누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야 하나님도 기쁘게 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겸손은 겸손 자체를 위한 겸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순종을 위한 겸손이었고,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완전한 기쁨을 위한 가장 중요한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 되시기 위해서 자신을 비우시고 인간이 되셨고, 그렇게 종이 되셔서는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거기까지 자기 의지를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시키셨습니다. 원래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뜻과 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표현대로 본체가 같은 분이시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냥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대신에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심으로써,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서 최고로 기뻐하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예수님이 성부 하나님을 그만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이런 말이 있죠? ‘부모가 언제 가장 좋은 줄 아느냐? 자식새끼 입에 맛있는 거 들어갈 때가 가장 좋다’는 말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되는 말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사랑이 만들어 내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너무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이루는 것보다는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더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종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시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그저 하나님으로 남아계실 때보다도 더 크고 만족스러운 기쁨을 누리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바램과 목적을 이루며 살면 가장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이것이 전혀 진실이 아닙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를 속여 그 충만한 기쁨을 빼앗았던 사탄은 오늘도 똑같은 말로 우리를 속이려고 듭니다. 한 번 보십시오. ‘네가 너의 하나님이 될거야’라는 말과 ‘네 마음대로 네 목적을 이루며 살아라’라는 말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저 조금 세련되어있고 하나님이라는 말이 슬쩍 빠져 있을 뿐 내용상으로는 다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의 열매 또한 똑같습니다. 모두가 다 충만한 기쁨을 잃어버린 갈급하고 무의미한 삶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야 가장 행복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정상대로라면 가장 사랑스러운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짜로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그것은 인간이 타락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그 행복의 원리, 그 기쁨의 원리는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을 가장 사랑해야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진짜 행복이 무엇인지,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가장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 흔적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일 속에도 그대로 나아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아주 간지럽고 낯뜨겁고 유치한 발언을 서슴치 않게 되는데요. 물론 저는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나는 당신의 노예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제 정신이라면 가능한 일이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남자의 표정은 언제나 진지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적어도 그런 바보같은 사랑이 식기 전까지 그 남자는 여자가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 자기 의지를 복종시키면서 가장 큰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꺼이 그 분의 종이 되어서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서 내 의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보다도 훨씬 더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최고의 겸손이셨으며, 최고의 기쁨을 위한 최고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자신을 낮추고 비워 종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장 기뻐하고 또 기뻐하셨습니다. 아프셨지만 정말 고통스러우셨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을 자신의 비밀스러운 양식으로 삼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날 그 십자가 위에서 하늘의 기쁨으로 당신의 배를 가득 채우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우리도 이런 주님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자기를 비우라, 종이 되어 순종하라는 말씀을 부담스러운 요구가 아니라 참된 사랑의 향연으로 나아오라는 초청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로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산을 넘고 숲을 헤맸던 아가서의 왕자처럼 기뻐하며 그 길을 갈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은 교만한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는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면에서 보더라도 기뻐하며 살 수 없습니다.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교만으로 부풀려진 자아는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밑빠진 독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의 기쁨을 빼앗아서라도 자신을 채우려 들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겸손해야만 합니다. 부풀려진 자아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고, 그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만족을 알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을 내려놓는 것, 이것이 우리가 주님처럼 진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첫번째 단계입니다. 그 다음에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을 비우시고 종됨으로 그 자리를 채우셨던 것처럼 우리도 자신을 비우고 그 자리를 하나님의 종됨으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들 또한 그 분처럼 비움으로써 더 충만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자신을 비워야 합니다. 이것이 기쁨을 위한 두번째 단계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가장 중요한 기쁨의 비결은 우리가 우리의 주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종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기쁘게 순종하고, 하나님의 기쁨 속에서 자신의 기쁨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 자리, 자기의 원래 크기로 돌아와서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게 될 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 우리 주님을 닮은 마음은 그래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모델이신 우리 주님이 그 사랑과 그 겸손함으로 최고의 기쁨 속에 거하셨으니까요. 이제 쥐었던 손을 펴시기 바랍니다. 부풀려진 자아가 있다면 부디 제 크기로 돌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비워서 기쁨을 채울 공간을 꼭 마련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처럼 하나님의 기쁨 안에서 참된 기쁨을 찾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하게 하셔서 자신을 낮추고 순종하는 진짜 기쁨을 알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