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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2.11.27. 새벽예배 - 보게 되었노라(요한복음 62)


요0908to23 - 보게 되었노라.pdf


201211227D (#1).mp3.zip




    본문 : 요한복음 9장 08-23절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눈을 뜨는 일은 그 사람에게는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일입니다. 온 세상에 캄캄했고, 어디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어느 것은 유익한 것이고 어느 것은 해가 되는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모든 것들을 알아보고 구분하고 분별할 수 있게 해 주는 명확한 빛이 그를 비춰주는 너무도 환하고 밝은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상하게도 그 사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어둠 속에 있던 사람은 나면서 부터 맹인인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만이 빛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빛을 통해서 세상을 볼 수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 맹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스스로 빛을 통해 이 세상과 거기 있는 것들을 보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비록 이제는 보게 되었지만, 맹인이 가장 불명확하고 불투명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이제 막 눈을 뜬 것이니까요. 그리고, 맹인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세상이든, 영적인 것이든 가장 명확하게 보고 분별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빛을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었고, 또 그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들 속에 이제 막 빛을 알고 세상을 보기 시작한 사람이 한 사람쯤 더해진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말아야 정상입니다. 이미 모든 사람이 빛을 알고 또 세상을 보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사람들의 세상에 이제 막 보기 시작한 한 사람이 더해졌을 뿐인데 그 세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우선 그 맹인을 알던 주변 사람들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리새인들이 흔들렸고, 심지어는 그 맹인의 부모들까지 흔들렸습니다. 정확하게는 그렇게 모두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이 이제 막 다시 보기 시작한 한 사람을 이미 모든 것을 보고 있는 자신들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그렇게 힘들어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을 볼 수 있었어도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한 상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 본다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날 진짜로 보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비록 이제 막 보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진짜로 보아야 할 것을 보았던, 그래서 참된 빛 가운데로 나왔던 한 사람이 그들 속으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모두는 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복잡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너무 잘 알던 앞을 보지 못하던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멀쩡하게 눈앞에 나타납니다. 반신반의하던 사람들에게 그 사람은 내가 당신들이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냥 믿어버리면 됩니다. 겉모습도 똑같고, 목소리도 똑같고, 당사자가 그렇다고 하니 말입니다. 바리새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고, 당사자도 있습니다. 그냥 믿으면 됩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요. 부모들도 그렇다, 아니다만 이야기하면 됩니다.  모든 것이 너무 명확하고 너무 간단하니까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 어느 부분도 이런 모양이 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이야기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는 ‘눈 뜬 장님’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빛 가운데 있는 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모든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선 빛 속에 있는 한 사람, 바로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사람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부분까지만 보더라도 이 사람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내가 앞을 보지 못했던 그 사람이다, 예수가 나를 고쳐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가 어디있는지 잘 모른다, 예수는 선지자다. 이 사람에게 불분명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닙니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 이제까지 밝은 눈으로 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다 그렇지 못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평생 알고 지냈던 사람을 눈 앞에 놓고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나, 아니다 혼란을 겪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에게로 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증언도 있습니다. 당사자의 증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그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이들이 믿지 못했던 것은 이 일이 너무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적인 논쟁을 하느라고 의견이 일치되지 않습니다. 혼란을 겪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은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똥이 이상한데로 튄 것입니다. 한쪽에서는 고친 사람이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쳤다고 해서 안식일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고,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반대쪽에서는 죄인이 어찌 이런 기적을 행하겠느냐는 반론을 제시했습니다. 서로 혼동을 겪다가 당사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그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요. 그는 선지자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모든 바리새인들이 그 사람이 맹인으로 있다가 치료받았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추궁을 받는 그 사람의 부모는 그 일에서 슬그머니 발을 뺍니다.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의 눈을 가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빛 가운데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많이 다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명확합니다. 맞는 것은 맞다, 아닌 것은 아니다, 아는 것은 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바에 대해 밝히는 일에 있어서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둠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명확한 것이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모든 것이 분명한 것 같지만, 정작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 반드시 분별해야 할 것을 분별해야 할 순간에는 당황합니다. 혼란을 겪습니다. 그리고 정직하지 못합니다. 일단 믿는 일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명확한 증거를 보면서도 믿지 않습니다. 반면에 전혀 근거없는 것을 믿을 때는 막무가내로 믿습니다. 그리고 진리와 진실을 말하는 일에 있어서 정직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했을 때 잃어버릴지도 모를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그의 마음에 어둠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눈을 실로암에 가서 씻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로 깨끗하고 새롭게 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눈을 새로 만들어 주시고, 그리고 그 분의 진리로 우리의 눈을 깨끗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우리들 또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머물고 있었던 그런 어둠 가운데 거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래도 자신이 예수를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신이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하나도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보는 현실은 어떻습니까? 때로는 이 세상보다 더 깊은 어둠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는 신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정반대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가장 근심하게 하고 그 분을 욕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스스로 믿고 있는 것과는 달리 아직 빛가운데로 나아오고 또 빛가운데 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당시의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그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에 익숙해 지고, 또 그것을 통해서 내 인생을 보고, 세상을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어둠 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혼란과 부정직함, 불신과 두려움... 이런 것들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절대로 그러지 말아야 할 때,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그것이 바로 내가 찾던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빛 가운데 있어야 자유롭습니다. 빛 가운데 있어야 분명합니다. 그리고 빛 가운데 있어야 정직하고 당당합니다.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중심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된 것을 바라보는 시력이 다시 흐려지지 말고 날마나 날마다 더 밝아져서 주님 안에서 명확하고 분명한 삶,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