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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1.28. 수요저녁 - 이 마음을 품으라 5(빌립보서 13)


빌0205to11 - 이 마음을 품으라(5).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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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5-11절 


모든 일에는 차례가 있습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앞에 와야 할 것은 앞에 와야 하고 뒤에 와야 할 것은 그 뒤에 놓여져야 모양도 좋고 무엇보다도 그 일의 결과도 확실합니다. 그런데 항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먼저 가르치고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먼저 배워야 합니다. 그 뒤에 배워야 할 것은 그 뒤에 가르쳐 져야하구요.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모든 가르침이나 요구들, 심지어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도 하늘나라가 있고 거기 가야만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서 이야기되어 집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가르쳐 져야 하고 또 배워야 할 것, 가장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 그리고 믿음의 가장 우선적인 목적과 소망으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이렇게 좋고 중요해 지고, 그래서 소망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되는 것은 쉽다, 어렵다를 떠나서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는 이 문제가 확실히 될 때까지 다음 문제로 넘어가서는 안되지만, 실제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시간 안에서 될 수 있는대로 많은 기독교의 진리와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고 또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확실히 해 놓아야 할 것들을 확실히 해 놓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치는 저로서는 청중들에 대해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되고, 그래서 굉장히 답답해 질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늘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의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자고 설교하려고 마음 먹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준비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에게도 하늘나라의 영광이 이 땅에 속한 것들을 투자할 정도로 중요한가? 그만큼 확실하고 절실하게 느껴지는 문제인가?”하고 말입니다. 요즘 새벽에는 요한복음을 설교하고 있는데, 비슷한 질문이 또 생겼습니다. 요한복음은 무엇보다도 진리를 아는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서 그것에 대한 설교를 굉장히 많이 하게 되는데, 문득 “그런데, 성도들이 과연 진리를 알고 그 진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을 꼭 필요로 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일로 인식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수요일마다 빌립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연 우리 성도들이 이 기쁨을 그렇게 소망하고 있나? 하늘에 뿌리를 둔 기쁨을 정말 필요로 하고 있나?”하는 질문이 생겨납니다. 물론 성령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면서 사역을 하고 있지만,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것이 분명히 되어 있는지 확신할 수 없고, 또 그것이 다 될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저로서는 이런 질문을 반복해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 하늘에 뿌리를 둔 기쁨, 그래서 쉽게 흔들리거나 빼앗기지 않는 기쁨이 정말 필요하십니까? 우리가 이렇게 그 기쁨을 얻기 위한 방법들을 공부해 가고, 또 거기에 순종해야할만큼 그만큼 절실하게 필요하십니까? 실은 이것이 빌립보서를 공부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분명히 해야할 문제입니다. 이 기쁨이 별로 필요없다면,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가 빌립보서를 공부하는 일이 별로 큰 유익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수요일 날은 예배에 오셔서 그 기쁨만 생각하시고 예배를 드리기 전에는 그 기쁨을 위해서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수요예배를 통해서 바울이 알았던 그 기쁨을 맛보게 해 주시고, 그래서 그 기쁨이 정말 절실해지게 하시고, 그 기쁨을 더 확실히 붙들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를 배우는 일이 너무 너무 즐겁고, 큰 기쁨이 되며 거기 순종하는 일이 쉬운 일이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위해서 이 문제를 놓고 한 번 기도하겠습니다. 아직 하늘의 기쁨을 맛보지 못한 분들은 그 기쁨을 맛보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 기쁨을 아시는 분들은 이 기쁨이 더 절실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또 수요예배를 통해서 내 기쁨의 이유가 조금씩 땅에서 하늘로 옮겨가게 해 달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기쁨을 허락해 달라고 소리를 내어서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는 요즘 참된 기쁨을 얻는 가장 중요한 기초인 겸손에 대해서 계속해서 함께 묵상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겸손한 마음에만 기쁨이 깃들 수 있고, 또 겸손이야 말로 예수님께서 최고의 기쁨을 누리셨던 방법이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향해서도 겸손한 마음을 품고, 서로 경쟁하고 허영을 부리는 일을 그치라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알았던 그 기쁨을 누리는 일이 절실해 져야 기쁨을 위해서 겸손할 수 있겠지만, 실은 이런 문제가 해결되어도 우리의 겸손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장애물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에 대한 오해입니다. 이 오해라는 장애물이 겸손을 향해 가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자주 겸손해 지는 일에 실패하게 되고, 겸손이 주는 참된 기쁨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에 대한 첫번째 오해는 겸손을 약한 자들, 빈궁한 자들이 가지는 태도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겸손할 수 밖에 없어서, 내세울 것이 없어서 겸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겸손을 비굴함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오해입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없기 때문에 겸손한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겸손이 아닙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함입니다. 때로는 이것이 교만으로 나타날수도 있지만 그것 또한 비굴함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실제로 저는 목회를 하다보니 그런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 때는 참 겸손했습니다. 태도도 부드러웠구요. 그런데, 갑자기 자녀가 잘 되어서 ‘...사 엄마, ...사 아빠’라는 타이틀이 붙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보는 사람이 당황스러울 정도입니다. 그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는 점점 더 딱딱해지고 목소리의 톤은 점점 더 카랑카랑해 집니다. 물론 이렇게 갑작스럽게 환경이 바뀔 때, 계속해서 예전의 태도를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렇게 태도가 바뀐다면, 그것은 이전의 겸손이 진짜 겸손이 아니라 내세울 것이 없어서 기가 죽어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일 것입니다. 

 

원래 겸손함이란 풍성함의 표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분이 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그 누구보다도 풍성한 분이셨으니까요. 풍성하지 않으면, 충만하지 않으면 흘러넘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셨지만 하나님의 자리를 움켜쥐고 하나님의 자리에 머무는 것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대신 자신을 비우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자신을 비웠다는 말이 희생을 말하고 포기를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흘러넘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너무 풍성하셨기 때문에, 너무 충만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자신을 내어주시고도, 그렇게 자신을 낮추시고도 불편하거나 불만스럽지 않으셨고, 그래서 기뻐하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참된 겸손은 풍성함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고 자신을 기꺼이 낮출 수 있는 것은 그가 그만큼 풍성하고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겸손한 사람이 그렇게 드문 것은 실은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그만큼 빈궁한 삶, 허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빈궁하고 허전해서 여전히 움켜쥐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높여서라도 자신이 가득 차 있다는 느낌을 얻어야만 하니까요. 그런 점에서 보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야 말로 겸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이미 모든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움켜쥐려고 하고 그렇게 얻은 것들로 우리 자신을 채워야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여러분은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는 아낌없이 주셨지만 다른 별 볼일 없는 것들은 아끼시는 분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런 대답은 불가능합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들을 내어주신 것은 그 아들과 함께 이미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내어주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들 안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심지어는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통해 성령님까지 보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아들을 주시면서 하나님의 영까지 함께 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들을 주실 때,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증거가 성령님이시라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가난합니까? 부요합니까? 부요합니다. 부족합니까? 충만합니까? 충만합니다. 우리도 우리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풍성하고 충만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충분히 겸손할 수 있습니다. 이미 자기를 비울 수 있는 여유와 자기를 내어줄 넉넉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안에서는 현실 뒤에 믿음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느끼기에 넉넉하니까, 써보고 풍성하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풍성히 주셨다, 충만하게 채우셨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는 믿음 뒤에 현실이 따라옵니다. 성경의 약속을 믿으면 그 약속이 현실이 되어서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부요케 하셨고, 넉넉하게 하셨고, 충만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면 그 믿음을 통해 충만하게 하시는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음을 진실로 믿으면 그 풍성함이 우리 현실 속으로 흘러들어 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풍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삶과 영혼이 꽉 채워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으로 겸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충만함을 드러내고 또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겸손에 대한 두번째 오해는 사람들은 겸손하려면 비우고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빼앗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분명히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빼앗기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겸손은 오히려 얻는 것이며 더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는 7절이 예수님께서 자신을 비우셨기 때문에 종으로,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나실 수 있으셨고, 자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었다는 뜻으로 되어 있지만 원래 의미는 그 반대입니다. 원래 의미를 살려서 번역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님은 종됨을 취하시고, 사람됨을 가지심으로써 자신을 비우셨다. 그렇게 사람이 되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써 낮아짐을 얻으셨다.” 


예수님의 비우심은 그저 포기나 내려놓음이 아닙니다. 불교의 ‘공’이나 ‘무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위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의 비우심은 스스로를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비우심은 예수님의 충만하심이 흘러넘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언제 부자의 명예가 가장 빛납니까? 언제 부자의 부자됨이 가장 빛나나요? 계속 더 가질 때입니까? 쌓아놓고 또 쌓아놓을 때입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언제입니까? 그 부자가 그 부유함을 부족한 사람들에게 흘려보낼 때, 그렇게 흘러넘치게 할 때, 그렇게 비우기 위해서 사용할 때가 아닙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하심, 예수님의 부요하심도 그것이 연약하고 부족한 우리들,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들에게로 흐르게 될 때, 그렇게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비워지게 될 때 그 영광이 가장 빛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의 영광은 그 분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인간이 되시고 종이 되실 때 가장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충만하신 영광은 하나님과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낮아질 때 가장 크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겸손과 비움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높으신 분이시지만 겸손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만천하에 증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비움과 낮아짐은 예수님에게만 더하기가 될까요? 아닙니다. 겸손은 우리에게도 더하기가 됩니다. 그것도 가장 좋은 것을 더하는 더하기가 됩니다. 우리가 겸손하면 무엇을 얻게 될까요? 우리에게 무엇이 더해질까요? 바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더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피조물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한 이후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그 액면적인 사실만으로는 부족해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껍데기는 남아있지만 그 내용물을 대부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내용물 중에는 하나님을 닮은 성품도 포함되어 있고, 실은 이것이 가장 심각하게 망가진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성품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모든 부분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성품이 바로 겸손입니다. 우리를 이렇게 망가뜨린 주범은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교만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겸손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없고, 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교만의 치료약은 낮아짐과 비움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겸손은 우리에게도 더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겸손은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가장 탁월하신 성품 중 하나입니다. 낮아지심과 비우심이야 말로 성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실 수 있으셨던 가장 큰 이유였으니까요. 그래서 겸손은 예수님과 우리를 닮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을 통해 가장 영광스러워지셨듯이 우리도 가장 영광스러워지게 합니다. 그 분의 형상을 지니게 합니다. 그러니 이것보다 더 크게 얻고 좋은 것을 얻는 방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직은 겸손하면 더해지는 가장 좋은 것 한 가지가 더 남아있습니다. 함께 9절부터 11절까지를 읽어 보겠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 부분은 6절부터 8절까지의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비우시고 낮아지신 일의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는 충만함 뿐만 아니라 겸손함에 있어서도 가장 뛰어난 분이심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수님께 가장 높은 자리,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셨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우리 주님은 자꾸만 높아지려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라” 오늘 본문의 9-11절 말씀은 바로 이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 말씀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높으신 분으로서 가장 낮아지셨고, 가장 영광스러운 분으로서 가장 온전히 섬기셨으니 그 분께 가장 높은 자리가 주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원리를 적용한다면 하늘나라는 이 땅에서 겸손했던 순서대로, 더 낮아지고 더 많이 비웠던 순서대로 높은 곳에 앉게 되는 그런 나라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비우고 낮아질 때 우리에게 더해지는 가장 좋은 것은 바로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누릴 그 분의 영광입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겸손한 그만큼만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있을 것이고, 더 많이 닮은 사람에게 더 많은 영광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니까요. 


땅에서 비우지 않고 하늘에서 채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땅에서 낮아지지 않고 하늘에서 높아질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비움과 낮아짐은, 그리고 겸손함은 가장 우리에게 가장 크고 영원한 덧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하늘 영광을 영원히 담을 그릇을 마련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이 땅에서 살면서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준비하는 것이니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 그 분을 따라 겸손하라는 것은 우리가 이미 예수님처럼 풍성하고 충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비우고 나눠줌으로써 더 영광스럽고 더 빛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꾸 여러분 자신을 세속적인 틀에 집어넣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들입니다. 현재의 상태도 다르지만, 삶을 더 풍성하게 하는 방법도, 더 기쁘게 만드는 방법도, 자신을 충만하게 채우는 방법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 다른 사람들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니 다 자기 힘으로 해야합니다. 자기 힘으로 붙들고 자기 힘으로 채워야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습니다. 곧 사라져 버릴 허망한 기쁨이라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혼의 구원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우리는 자신을 충만하게 채우고 기쁘게 하는 방법도 완전히 다릅니다. 믿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는 우리는 믿음으로 하면 됩니다. 일단은 우리가 얼마나 부요한 사람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비우고 낮아져야 더 충만해질 수 있고, 더 영광스러워질 수 있고, 더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우리 주님이 누리고 계시는 하늘의 큰 영광을 영원히 누리게 해 준다는 기대와 소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이 중요합니까? 하늘에서 누리게 될 그 영광이 정말로 중요합니까? 그렇다면 이 길을 가야합니다.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 기쁨과 영광으로 가는 길은 이 길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이런 기쁨과 영광에 대해서 전혀 모르더라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기쁘고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 그 이전과는 달라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그 달라진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 누구보다도 강하고 풍성해 졌으니 이제는 그 분처럼 비우고 낮춤으로써 더 영광스러워져야 합니다. 더 빛나고 더 기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의 기쁨과 영광도 여러분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겸손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 입니다. 가장 큰 더하기, 영원한 더하기 입니다. 모두 참된 그리스도인만이 가질 수 있는 이 겸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위해 가장 크게 더하고 영원히 더할 수 있는 비결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더 충만하고 더 빛나며, 영원히 충만하고 영원히 빛나는 인생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