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 : 2012년 12월 12일 수요일
본문 : 누가복음 21장 29-38절
정말 정말 좋은 일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일이 좋은 일인만큼 그 일에 포함된 사람들은 유익을 얻게 되지만 반대로 그 일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큰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기회에 대한 정보를 알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며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들은 모두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복을 얻게 되면 정말 유익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전혀 그런 복들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같은 교회를 같은 세월동안 다녀도 어떤 사람은 믿음의 능력과 평안 속에서 정말 기쁨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는 반면에 다른 사람은 건조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주어지는 복된 기회들을 잘 붙드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 기회를 통해서 얼마나 좋은 것을 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들 모두가 아주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에서 단 하는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다른 기회들은 제대로 붙잡지 못하고 흘려보냈다고 하더라도 이 기회만큼은 절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됩니다. 그 기회는 바로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영광스럽게 설 수 있는 기회입니다. 다른 기회는 다 놓쳐도 되지만 이 기회만큼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것은 말그대로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마지막 기회, 주님 다시 오시는 날 그 분 앞에 영광스럽게 서는 기회를 붙드는 일에 대한 관심은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중요한 관심 중의 하나였습니다. 특히 한 세기가 지나가고 다음 세기로 넘어갈 때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열망과 노력들은 소위 전형적인 세기말적인현상 중의 하나라고 여겨질 정도로 정확하게 반복되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열망과 노력들 중에서 애석하게도 건강한 것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항상 방향이 어긋나고 이상한 모양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성경이 마지막 날이 다가오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신 징조를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잘못 매치시켰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때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저런 방법을 통해서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정확한 때를 계산해 내려고 했고, 그래서 얻은 결론을 정답이라고 믿었던 수많은 사람들은 미리부터 예수님을 기다린다고 집팔고 논팔고, 하던 일 다 팽개치고 산으로, 또 특정한 장소로 들어가 정해진 때까지 그저 미친 듯이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도는 다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애초부터 성공할 수 없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말씀해 주신 후에 그 시기에 대해서 덧붙여 주신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실 이것이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예수님은 그 날과 그 때는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철저히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는 예수님도 완전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아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은 마지막 날의 정확한 시기에 대한 정보는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아닌 그저 평범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이 시기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결코 허락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 대해서 시기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 논의가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주장이 이단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주님이 말씀해 주신 징조들 또한 역사 속에서 반복되고 또 반복되어져 왔습니다. 언제 한 번 전쟁이 그친 적이 있었으며, 화산폭발, 천재지변, 기아와 같은 지구적인 문제가 그친 적이 있었습니까? 그래서 사실 주님이 징조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는 했어도 어떤 징조가 이제는 정말 마지막 때가 왔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어줄 수 있을지는 그 누구도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한 때 EU가 666이라고 해서 EU에 가입한 국가가 6개국이 되었을 때, 마치 세상 종말이라도 온 듯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런 호들갑은 가입국가가 7개국이 되는 순간 정말 웃기는 해프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눈으로는 나타나는 현상들을 통해서 마지막 때를 헤아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징조를 읽으라고 말씀하셨고, 이런 저런 일들이 일어나면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된 말씀일까요?
물론 징조를 정확히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다면 그 능력을 사용해서 마지막 때를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헤아림도 정확할 것이구요. 그렇지만 인간의 판단은 주관적이라서 정확한 판단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정보라기 보다는 경고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저는 우선 개인적으로는 주님의 이 징조에 대한 말씀을 너희가 사는 세상에 그런 일들이 그치지 않으니 너희가 사는 모든 시대가 정해진 마지막 때를 향해 가고 있다는 말씀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가 언제 도래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그 시점을 향해서 계속 가까이 다가가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의 시대가 사람들이 알건 알지 못하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시점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가고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정확한 때는 모르지만 지금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향해 점점 다가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긴장해야 합니다. 언제 도래할지 모를 가장 결정적인 기회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징조에 대한 말씀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두 가지 이야기가 더 중요합니다. 첫째는 33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 세상이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주님의 재림은, 마지막 날은 반드시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먼저 이 믿음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정말 다시 오실까요? 이미 2000년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신 분인데 다시 오실까요? 우리가 주님의 다시 오신다는 그 말씀을 정말 믿어도 좋을까요? 물론이죠. 오신다고 하시고 이미 한 번 오셨습니다. 태초부터 성탄절이라는 어마 어마한 시간간격을 메꾸시고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오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 때가 언제인지, 그리고 다시 오신다는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는 때까지의 시간간격이 얼마가 될지 모르지만 예수님은 분명히 다시 오실 것이고, 온 우주를 온통 온전한 그 분의 세상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가 가장 먼저 확실히 하고 꼭 챙겨야 할 우리의 믿음입니다. 둘째는 34절과 36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 사실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것만 확실히 믿는다면 다른 것을 할 일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만 잘 챙기면 됩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소망하는 우리의 마음을 무디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것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조심하면 됩니다. 그러면서 깨어있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영적으로 무디게 하고 잠들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방탕함, 술취함, 생활의 염려입니다.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마지막 생활의 염려입니다. 사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니까요. 주님은 생활의 염려가 우리의 영혼을 무디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거기 빠져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생활로 염려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할 믿음의 적이 되는 셈입니다. 생활의 염려에 빠져 있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약해지게 합니다. 가장 심각한 경우는 믿음이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 무용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는 게 무슨 소용이 있어?’라는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이죠. 이런 회의가 들기 시작하면 그는 결국 믿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방탕하게 되고, 그러면 무언가 집착하지 말아야 할 것에 집착하게 됩니다. 그래서 긴장과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을 기다릴 수가 없어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대강절에, 주님의 초림을 기념하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이 절기에 우리의 믿음을 한 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다른 기준이 아니라 생활의 염려라는 기준으로 말입니다. 내가 생활의 염려를 나의 친구로 여기며, 거기 붙들려 사느라 믿음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달라고, 주님 다시 오심을 확신하며 소망하는 그 믿음을 준비하며 항상 깨어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진지하고 절실할수록 우리의 자유도 커져 갈 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커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인자 앞에 서는 그 날은 더욱 더 영광스러운 날이 될 것입니다. 이번 대강절에는 생활의 염려를 이기는 믿음의 등불을 꼭 마련하셔서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는 것을 피하는 준비를 하는 지혜로운 처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제목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혹시 생활의 염려에 아직도 빠져 있다면 그 염려를 떨쳐버리고 주님을 신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시고, 그 찌꺼기가 남아있다면 그 찌꺼기까지 떨쳐 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를 잠들게 하는 것들로 부터 깨어있기 위해서 기도를 멈추지 않는 기도자가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