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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2.12.16. 주일오전 -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대강절 셋째주일)

사5213to5309 -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2012 대강절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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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 : 이사야 52장 13-53장 9절


오늘은 대강절 촛불 세개가 켜졌습니다. 대강절도 이제 한 주간하고 조금 더 남아있을 뿐입니다. 두 주간은 지났지만 아직 한 주간이 더 남아있으니 혹시 지난 두 주간 우리 주님에 대해서, 그리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신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고 또 묵상하지 못하신 성도들은 남은 기간동안이라도 주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또 자신을 돌아보시면서 마음을 정결케 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의 주일을 우리의 왕되신 주님과 주님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영혼 속에 우리 주님을 다시 모시고, 또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는 이유는 그 분만이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맡겨도 좋은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 분이 만드실 나라만이 우리가 소망하고 기대하며, 또 거기 들어가 영원히 살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완전히 정의로우십니다. 그 분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들 중에서 정의롭지 않은 일들이 없고, 예수님이 이루시는 일들 중에서 불의한 일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선하시고 자비로우십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의 놀라우신 성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분의 그 정의로운 다스림 속에 거하면서도 여전히 평안하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해도 벌을 받거나 결코 버림받지 않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온전히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에 거한다는 것, 그 분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결코 답답하거나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분의 손 안에 온전히 있을 때에만, 그렇게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때에만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안할 수 있습니다. 우선 주님의 전능하시고 정의로운 다스리심이 우리에게서 불의에 대한 모든 고민과 불안함을 가져갑니다. 그 누구도 그 분의 정의로운 다스리심을 방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우리를 편히 안식하게 합니다. 전능하신 주님이 항상 나의 유익을 위해서, 은혜로 다스리시며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의 부요함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우리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나라, 저와 여러분이 가게 될 그 나라는 무한히 기쁘고 무한히 평화로운,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있었던 제 자리에 놓여있는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짐승, 짐승과 짐승,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그 어떤 문제나 거리낌도 없을 것이고, 유쾌하고 따뜻한 질서와 완전한 어우러짐이 있을 것입니다. 자연은 사람에게, 사람은 하나님에게 완전히 복종하고 온전히 순종하는 그런 나라가 되고, 죄가 만들어 낸 모든 상처와 불완전함이 남긴 모든 아픔들이 없는 그런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비록 불완전하고 부족한 이 땅위에서 살아가지만 여기서만 살고 말 사람들처럼 살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느끼는 열등감과 교만함도 그 좋은 나라에 영원히 거하게 될 그 때를 생각하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나라 말고 우리가 돌아갈 진짜 우리나라, 영원하고 완전한 ‘마이홈’이 있으니까요. 


사람들은 여기가 살기 편하고 여기가 좋으면 하늘나라를 많이 바라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겠죠. 부족하고 연약해야 풍성함과 완전함이 절실해 지니까요.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를 덜 소망하게 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하늘나라를 단 한 번도 진실로 맛본 적이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그 나라를 소망할까요? 누가 진실로 그 나라를 바라며 살아갈까요? 바로 그 나라를 맛본 사람입니다. 


시청 옆에 가면 한옥집이라는 김치찜 집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구에 살다가 외국에 가거나 아니면 외지로 간 사람들이 다시 대구에 오면 꼭 그거 먹으러 가자합니다. 뭐 사줄까 하고 물으면 다른 비싼 거 다 재쳐놓고 김치찜 사달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한 번 먹어봤기 때문에 얼마나 맛있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정말 맛있는 음식은 그 맛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래서 어디서건 그 음식을 떠올리면 그 음식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이 어느 정도는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 먹고싶어지기도 하죠. 하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한 번 이라도 맛을 본 사람은 결코 그 나라의 맛 잊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또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의 맛은 하늘나라의 맛에 비교할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땅에 있는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충분하지 못합니다. 완전하고 충분하지 못한 것은 아무리 많고 좋아도 여전히 완전하지 않고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은 이런 것들로는 도무지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이니까요. 그런데, 하늘나라는 완전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를 맛본 영혼은 이제는 완전히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그렇게 원하고 또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애타는 영혼의 미각이 완전히 만족스럽게 되기를 원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이 워낙 좋은 것, 정말 완전히 좋은 것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이 소망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이 세상을 능력있고 영광스럽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소망은 완전히 좋은 것에 대한 소망일 뿐만이 아니라 이미 약속된 것, 확실히 보장받은 것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소망은 이 땅의 이런 저런 어려움도 견디어 내게 만들고, 죄악의 유혹도 이기게 만들며,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복음이 복음인 이유, 그리고 우리가 이 계절에 더 많이 생각하고 또 기다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다시 오심이 복음인 진짜 이유는 그 분이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허락하시고 또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좋은 나라를 말입니다.  저는 우리 광현교회 모든 식구들이 이 좋은 나라를 맛보는 은혜를 누리고, 그래서 그 소망만으로도 기쁘고 흥분된 인생,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그런 인생을 살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목회를 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튼 이 좋은 나라의 왕되신 예수님께서는 이 좋은 나라를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를 받아들여 주셔서 그 나라의 영원한 백성이 되게 해 주셨고, 지금 여기서는 그 나라를 소망하며 살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하죠? 너무 좋죠?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은 것은 아무런 과정과 절차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을 믿었더니 그냥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우리의 참된 왕이 되시고, 또 그 영원히 복된 나라를 우리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셨던 과정이 있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바로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반드시 깊이 묵상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은혜의 은혜됨을 더 온전히 알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그 은혜만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분께 우리의 마음을 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번째 구절은 “보라 내 종이 형통하리니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리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분명히 이 구절은 우리의 왕, 그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의 왕이 되어 다스리실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왕에 대해서 ‘내가 세우는 왕’이나 ‘내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왕들은 전부가 다 하나님의 종들이라는 그런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다시 오실 메시야, 하늘과 땅의 영원한 왕이 되실 분이 놀랍게도 진짜 ‘종’이 되실 것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저 높여지신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왕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스스로 종이 되심으로써, 빌립보서의 표현대로 왕이나 고관대작이나 부자나 심지어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종의 형체’ 그러니까 노예가 가지는 모든 낮고 천함을 지니고 이 세상에 오시고 또 그렇게 살아가심으로써 저와 여러분을 위한 그 나라의 왕이 되셨으며, 그 나라를 우리의 나라가 될 수 있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사야서 53장 앞부분은 그렇게 낮아지신 우리 주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전에는 그렇게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을 혐오감을 가지고 바라보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새로워진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하는 고백과 증언의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어 우리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 구절씩 따라가며 우리 주님, 우리의 왕이 되시기 위해서 종이 되셨고, 가장 비천해지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주실 수 있었던 우리 주님에 대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의 진지함과 차분함을 저에게 빌려주십시오. 앞에 성경구절이 한 절씩 비춰질텐데 오늘은 여기 여러분의 시선을 고정하시고 마음으로는 주님을 생각하시며 경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풍성한 은혜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이것이 “우리”를 대신하는 이사야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입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이 이야기를 도대체 그 누가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으며 또 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누가 그 이야기를 믿었느냐고, 누가 그렇게 비천한 종이 되신 분안에서 구원의 능력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주님이 아무리 자신을 통한 구원의 소식을 전해도 그 이야기를 믿는 사람이 없었고, 아무리 놀라운 일을 행하셔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람들은 왜 그 놀라운 구원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왜 그 놀라운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지 못했을까요? 그것은 우리 주님이 이 땅에 계셨을 때에 입고 계셨던 그 분의 겉사람이라는 누추한 옷 때문이었습니다. 그 옷은 자신들에게 구원을 주고 하늘나라를 주기 위해서 입으신 것이었지만 그 옷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이것이 지금 이사야의 눈 앞에, 그리고 이제는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한 사람들의 눈 앞에 서 있는 종되신 분의 어릴적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예쁩니다. 귀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태어나 낮게 자라며 가장 낮은 삶을 사셨던 주님은 정말 볼품이 없으셨습니다. 그 누가 보기에도 아름답거나 끌릴만한 모습은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유복하게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가난이 그 분의 가장 익숙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께서 외모의 복을 받으셨었나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에게는 그 어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끌만한 모습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시지 못해서 다른 사람이 대신 져주어야만 했고, 다른 사람들은 길게는 삼일씩 버티는 십자가 위에서 단지 여섯 시간만을 견디신 후에 숨을 거두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너무 심한 매질을 당한 후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은 그만큼 이미 병약해 계시기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그렇게 간고를 많이 겪으셨고, 질고를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게다가 그 분은 사람들의 멸시와 무시에 둘러쌓여서 살아가셨습니다. 그 분의 매맞음과 병약함이 사람들에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징벌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던 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마치 나병환자처럼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런 모양으로 태어나고 이런 모양으로 자라나고 또 이런 어려움과 질병, 그리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우리 눈 앞에 있다면 우리는 과연 그런 사람이 우리의 구세주라고 알아볼 수 있을까요? 이 분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을까요? 특히 우리가 아직 우리 주님을 믿기 이전이라면 과연 우리는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도 생길 수 있을까요? 우리도 그 때 그들처럼 우리 주님을 향하여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고 멸시하며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쫓아 버리지 않을까요? 이사야는 자신도 그랬고, 지금은 자신처럼 주님을 알고 또 믿는 사람들도 똑같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실 종이 앓았던 질병, 종이 안고 살았던 슬픔은 그 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하늘에만 계셨다면, 사람들이야 어떻게 되든 하늘의 영광만 누리셨다면 결코 겪을 필요가 없었던 것들이었습니다. 그 병고와 슬픔은 그 분이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래서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순전히 사람들을 대신해서 짊어지신, 원래는 사람들의 것이었던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몰랐습니다.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때리는 것으로, 그의 잘못 때문에 자식 혼내듯이 징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지도 이런 무지가 어디있습니까? 나대신 병고를 겪고 나 대신 슬픔을 겪고 있는데 그저 옆에서 무덤덤하게 구경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연히 받을만하니 받는 것이라고 재판관 노릇만 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라고 달랐을까요? 우리가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었고 그 분이 당하는 그 병고와 슬픔을 보았다면 우리라고 다르게 생각했을까요? 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그 분의 아픔과 슬픔을 자신의 것을 대신 가져다가 짊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종의 아픔 앞에 무심한 재판관 노릇만 했을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종이 되신 왕께서는 곤욕을 당하고 괴로움을 당해도, 털을 깎이는 것같은 수치를 당해도 입조차 열지 않으셨습니다. 그 모든 곤욕과 고통은 자신을 때리고 못 박는 바로 그 사람들을 대신하여 당하는 것들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했지만 억울하다고 부당하다고 왜 내가 이런 모욕과 고통을 당해야 하느냐고 소리치거나 신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철저한 불순종은 우리 주님의 그런 온전한 순종이 아니고는 대신 갚을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결국 종은, 아니 종이 되신 왕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졌습니다. 그렇게 영원하신 생명, 결코 죽음을 당할 수 없는 생명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들을 산 자들의 나라에 영원히 맞아들이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무한하고 영원한 생명을 내 주지 않고는 사람들이 그들의 죄 때문에 맞이해야할 영원한 죽음을 대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그는 죄가 없었습니다. 욕심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한 적도 없었고, 자기 입장이나 이익때문에 거짓말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어려움을 돌봐주었고,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했습니다. 최악의 죄인들만 당하는 십자가 형을 당하셨습니다. 게다가 무덤도 영광스럽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한 부자가 자기 무덤을 내주어서 들판의 독수리 밥으로 던져지는 것은 면하셨지만 그 무덤은 어느 악한 사람들의 무덤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병사들이 그 분의 무덤까지 지켜대는 바람에 무덤에 눞혀진 후에도 큰 죄인취급을 면치 못하셨습니다. 


낮게 태어나 연한 순처럼, 그리고 마른 땅에서 자라나는 바짝 마른 뿌리처럼 자라나셨던 주님은 죽음이라고 해서 다른 모양으로 맞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의 일생은 궁핍과 고난, 가난과 오해, 매질과 멸시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낮음과 누추함은 심지어는 그 분의 죽음까지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누추함과 낮아짐, 고통과 고난을 짊어지신 하나님의 종이 되셨고, 철저히 종다운 누추하고 낮은 삶을 살아가시며, 또 가장 낮은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게다가 그 누구도 이런 종이 되신 왕의 삶과 죽음을 통해 그 분의 왕되심을 알아차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저 더 멸시하고 더 무시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것을 통해 받들어 높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되셨습니다. 더 영광스러운 왕이 되셨고, 나아가서 온 우주에서 가장 형통한 분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백성이 된 것,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천국의 시민이 된 것은 우주의 왕이신 주님이 종이 되셨기 때문에, 종의 낮아짐과 누추함을 태어남과 살아감, 그리고 죽음으로 감당해 내셨기 때문에 가능해진 일입니다. 그 분의 순종으로 우리의 무지함과 불순종을 대신 하셨고, 그 분의 고통과 멸시로 우리의 고통과 멸시를 대신 하셨으며, 그 분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첫번째 오심을 기념하며, 다시 오심을 고대하는 이 절기에 우리 왕의 첫번째 오심, 종의 형상으로 낮고 누추하게 오신 일과 또 그 일로 인해 우리에게 허락된 하늘나라의 이 이해할 수 없는 은혜에 대해 묵상해 보는 일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우리들에게는 크게 유익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우리 왕되신 주님의 낮아지심과 그 은혜를 묵상하면서 놓치면 안되는 것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낮아지신 태어남과 삶, 그리고 죽으심은 온통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됨, 그리고 그로 인한 우리의 영원한 죽음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모든 낮아지심 전체가 우리 주님께는 스스로가 왕이심을 온전히 증명하는 과정이었고, 또 왕으로 다스리신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 모든 낮아짐이야 말로 죄로 타락한 이 세상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고 또 요구하고 있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 높아지려고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기꺼이 가장 낮아지셨습니다. 세상은 남을 이용해서라도 자신만큼은 고통과 아픔에서 면제되길 원합니다. 힘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은 인간의 모든 고통과 아픔 속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또 우리를 대신하여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짊어지셨습니다. 죄악이 남긴 쓰라린 상처들을 그렇게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세상은 모두 영광스럽고 영웅적인 죽음을 원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이름이 높여지고 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를 원하니까요. 그러나, 주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가장 부끄럽고 비천한 마지막을 맞이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부끄러운 죽음을 치워주셨습니다. 세상은 모두 억울하다, 부당하다 소리를 지릅니다. 잘못이 있으면 더 크게 소리를 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런 잘못 없이 모함과 누명을 쓰고 형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소리를 내거나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의 악함을 짊어지고 가장 저주스런 죽음을 묵묵히 감내하셨습니다. 또 세상은  모두 자신이 다른 이들 위에 올라서서 왕노릇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 종이 되심으로써 왕노릇 하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이 이 땅의 나라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의 이 땅의 왕들과는 전혀 다른 왕이심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가시관을 그 분의 왕관 삼으시고, 십자가를 그 분의 왕좌로 삼으시며 섬김과 대속을 왕의 지팡이로 삼으시고 온 우주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늘나라가 왜 좋은 나라입니까? 바로 이런 우리 주님이 왕이신 나라, 종이신 분이 왕이신 나라, 우리의 모든 아픔과 슬픔, 질병과 심지어는 죽음까지도 모두 대신 짊어지신 우리 하나님이 왕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정말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왕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 그리고 앞으로 그 분의 영원한 다스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자, 그러니까 가장 많이 섬기는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습니까? 누가 그 나라의 영원한 왕입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제일 많이 섬기겠습니까?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왕이신 하나님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겸손하고 가장 많이 섬기시는 분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곧 가장 겸손한 하나님의 섬김이 될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헤아릴 도리가 없지만, 분명 하나님께서는 가장 많이 섬기심으로써 언제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왕의 그 섬김을 통해서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 왕의 흉내를 내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조금 더 낮아지고,  이 땅에서 조금 더 섬긴다고 한들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것이야 말로 그 나라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살아갈 연습을 미리 하는 것이고, 그 나라의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유일한 지름길이니까요. 낮은 자리가 불편해 지실 때마다, 섬기는 일이 성가셔 질때마다 우리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낮아지심으로써 왕이 되시고, 섬기심으로써 왕노릇 하셨던 분, 그리고 그 나라에서도 영원히 그렇게 하실 우리 주님을 묵상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결코 왕궁의 상아침대로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마굿간 짐승의 밥그릇으로 오셨고, 그 위에서도 평안하게 계셨습니다. 오늘날도 그 분은 낮은 마음에 오십니다. 낮은 마음에 오셔서 섬겨주시고, 복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그 곳이 그 분이 다스리시는 그 분의 나라가 되게 하십니다. 높아져만 가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에 더 쓸쓸해진 이 계절에 여러분의 마음에 누추한 구유 하나 꼭 마련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낮은 곳에 주님 오실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 하나 꼭 마련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자리를 즐겨찾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겸손한 왕으로 좌정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낮은 자리의 복, 낮기 때문에 영광스러운 삶의 복을 놓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

우리가 주님의 낮음과 누추함을 묵상하면서 이 세상의 삶의 낮음과 누추함에 불평하지 않도록

우리가 주님의 섬기심과 영광을 생각하면서 그 분이 가셨던 낮고 영광스러운 길을 마다하지 않도록

주님 오신 이 계절에 우리 마음의 모든 높아진 것들이 낮아질 수 있게 해 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