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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2.12.26. 수요저녁 - 나와 함께 기뻐하라 3(빌립보서 16)


빌0212to18 - 나와 함께 기뻐하라(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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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빌립보서 2장 12-18절 


제가 우리 교회에 처음 부임했을 때, 저는 우리 교회에 고생하거나 속 썩으려고 오지 않았다고, 행복하려고 왔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혹시 제가 드리는 말씀을 오해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는 그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가 목회하는 이유이고 또 소망이기도 하니까요. 저는 제 동기 목사님들과 비교하면 조금 늦게 담임목회를 시작한 편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목사님들로부터 담임목회를 하는 어려움에 대해서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물론 선배 목사님들로부터도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구요.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거의 동일했습니다. “어렵다, 힘들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처음 교회에 부임해 가면 적어도 몇 년은 눈치도 많이 보아야 하고, 정말 죽다가 산다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로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럴 각오를 하고 담임목회를 생각했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왜 꼭 그래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것이 정상적인 목회의 모습인가 하고 말입니다. 물론 전혀 다른 곳에서 어찌보면 다른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 온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익숙해져 지고 또 한 교회가 되는 일 속에는 크고 작은 오해와 갈등이 생겨날 여지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완전히 막을 수 있는 방법 또한 없겠지요. 그러나, 처음부터 담임목회는 그런 거다, 힘든 거다, 고통스러운 거다라고 생각하고 포기하고 간다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습니다. 성도들의 교회인데,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지레 포기하고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 저는 수 년동안 그런 생각과 소망을 품고 담임 목회지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다 아시니 저와 꼭 맞는 교회를 허락해 달라고, 특히 마음과 생각을 맞추어서 함께 교회를 섬길 수 있는 장로님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광현교회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교회가 그러한 저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고 믿고,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제 목회의 규모에 대한 욕심은 아주 조금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들으시면 실망할 정도로 욕심이 작습니다. 그래서 그건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아주 큰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저의 목회를 통해 제가 돌보는 성도들이 행복해지고 그 속에서 저 또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우리 교회에 왔다고 했던 그 말씀은 그러니까 나는 아무런 고생도 고민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드린 철없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분명히 힘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아픔도 있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벌써 그러니까요. 제가 이제 담임목회를 해 보니 몇 달 안되었는데도 제 내면적인 어려움과 싸움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추구하는 목회적이고 영적인 가치 안에서 우리 성도들을 행복하고 만족하며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은 하나님의 풍성하고 강력한 은혜가 계속 쏟아부어지지 않는다면 계속하기가 어렵겠구나 하는 절박함도 느끼게 됩니다. 또 저는 언젠가는 성도들과의 관계 안에서 생겨나는 어려움도 만나게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굉장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제가 처음부터 목회 자체를 그저 인내하고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만 생각하면서 지낸다면 그것은 저에게 얼마나 큰 비극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저를 바라보시는 여러분의 마음은 또 어떻겠습니까? 제가 그렇게 끙끙거리면서 겨우 버티면서 목회를 한다면 그걸 바라보시는 여러분은 행복하시겠습니까? 


그런 생각과 태도는 저와 여러분 그 누구에게도 유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종 목표 뿐 아니라 제 목회의 과정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행복한 것이 되는 그런 목회를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맡기신 일을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에게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먼저 제가 항상 하나님께서 쏟아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서 목회할 수 있도록 꼭 기도해 주십시오. 그 은혜의 능력으로 제 속에 있는 갈등과 혹은 고민들을 다 이겨내며 또 정리해 가며 목회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 성도들과 제가 참된 신앙의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일치되어서 함께 한 방향으로 그 행복을 향해 나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런 저런 어려움과 시험으로 기쁨을 잃어가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며, 그 기쁨을 되찾고 또 유지해 가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빌립보 교회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을 이해하고 기쁨을 되찾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또 교훈했습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와서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시기하고 다투는 빌립보 교회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그렇게 낮은 마음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을 회복하라고 권면합니다. 낮은 마음에 기쁨이 있고 낮은 마음에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어지는 이야기가 바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유명한 말씀으로 시작하는 12절 이하의 이야기입니다. 


이 단락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바울은 우리의 삶과 존재를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이 제물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철저한 헌신이고 두번째는 거룩함입니다.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려면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제물은 철저히 드려져야 합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짐승은 어떤 의미에서건 자기를 고집하지 못합니다. 조각 조각 나누어져셔 그 모든 부분이 전부 하나님께 태워져 드려집니다. 그러나, 그냥 드려지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그러기 전에 제물은 거룩해야 합니다. 흠이 없고 순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삶과 존재가 하나님 앞에 흠이 없고 순전하게 되는 것,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불순종이 사라져서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것이 되는 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구원의 진짜 목적이라고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항상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야만 하며,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그 기쁨 속에서 우리들도 기뻐할 수 있다고 교훈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삶을 살지 않고는 참된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과 성품에 있어서 흠이 없고 순전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삶을 살 때에만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비로소 진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기쁨은 아무데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못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진짜 기쁨을 공급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영혼의 기쁨을 위해서라도 항상 거룩함과 순결함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자신의 삶과 인격에 녹여내기 위해서 애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영혼 속에 흘러들어 우리 또한 풍성한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거룩하고 순결하게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입니다. 그 분을 기쁘게 해 드리고,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자신도 기뻐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바울은 성도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만 하는 이유가 한가지 더 있다고 말하는데, 사실 우리들로서는 선뜻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16절 후반부인데요.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순결해야 한다. 그렇게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한다. 그것은 너희가 내가 이제까지 달리기 경주하듯이 살아온 삶의 노력과 수고를 헛되지 않게 해 주어야 할 뿐 아니라, 내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예수님께 너희들을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게 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 자녀에게 “네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학교에 가야 내가 자랑스럽지 않겠니? 그러니까 너는 공부를 잘 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부모의 이기적인 요구처럼 들려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울의 삶을 묵상해 보면 바울의 이런 소원은 그런 단순한 허영심이나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은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산 사람일까요?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유일한 목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보면 사도 바울의 유일한 삶의 목적은 바로 하늘나라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16절에서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자신이 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기 위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사역의 이유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때로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해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그가 땅이 아니라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있어서 그러한 사역의 대상이요 또 유일한 열매는 사람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복음을 들었던 것도 사람들이고 그의 양육을 받았던 사람들도 사람들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하늘에서 그가 누리게 될 영광의 크기를 결정하는 유일한 기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만약 마지막 순간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만 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 그 날은 바울에게 영광스러운 날이 아니라 부끄럽고 허무한 날이 될 것이고, 그 모든 노력과 수고들이 모두 헛고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는 그런 절망적인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그들을 위한 목회자로서 자신의 그런 소망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에게 헌신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때로 몇몇의 사람들이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헌신하며 사는 일이 효율적이지 못하고 더 크고 의미있는 일을 하는 것보다 가치가 덜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이룬 업적이나 성공을 대단한 것이라고 추켜 세우지만 막상 하늘나라에 가면 그런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다 일시적인 것들이고, 일시적인 것들은 하늘나라에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존재하는 것은 영원히 가치있는 것들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천사를 제외하면 영원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사람의 영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땅 위에서의 삶이 하늘나라에서도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우리의 삶이 누구가의 영혼에 의미있고 가치있는 흔적을 남겨놓는 매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의 헌신은 ‘일’에 대한 헌신이기 이전에 ‘사람들’을 위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이 그런 일이 되도록 자리매김을 해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항상 우리 앞에 먼저 다가오는 것은 일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설교조차도 그렇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설교는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과 삶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도록 돕기 위해서 행해지는 가장 중요한 목사의 소임입니다. 그런데, 한참을 사역하다 보면 설교가 청중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이 설교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 중에 청중들은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주기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경우 청중과 청중들의 영혼은 뒤로 밀려 버립니다. 설교를 잘하고 또 그 설교가 잘 들려지는 일에만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 순간이 설교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 되어버리는 순간입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하는 일들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 일들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만 직접적으로는 교회의 다른 성도들을 섬기고, 그들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는 일들이기 때문에 그 일이 중요한 것이지 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일도 잘 해야하겠지요. 그렇지만 사람이 거기에 빠져 버리면 그 일은 그 때부터 의미없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든지, 때로는 그 일이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처럼 여겨지는 일을 할 때에라도 우리는 내가 그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을 섬기고 사람의 영혼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과 마음을 놓치지 않고 교회의 일들을 돌본다면 분명히 그 일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을 통해 배워야 할 서로를 향한 태도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서로를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랑거리로 삼아야 할 사람,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주어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한 번 옆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의 영원한 자랑거리가 될 사람이고 또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만약 내가 그의 영혼을 위해서 무슨 일을 통해서건 섬겼다면 나도 모르고 그 사람도 모르더라도 그 섬김의 흔적이 그 사람의 영혼에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는 그 흔적은 나의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삶을 살지 않는다면 결국은 그 사람 덕분에 누려야할 영원한 영광을 손해보게 될 것입니다. 


C. S. 루이스라는 영국의 문학자가 있는데요. 이 분은 불신자들의 사도라고도 불리는 아주 대단한 기독교의 스승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남긴 작품들 중에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어떤 사람의 꿈을 통해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그런 소설입니다. 소설의  중간에 천국에서 가장 큰 영광을 누리고 있는 한 부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인은 항상 수많은 짐승과 사람들에 둘러쌓여서 함께 춤을 추고 있습니다. 반면에 천국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이나 짐승들이 많지 않습니다. 천국을 방문했던 한 사람이 그런 차이가 나는 이유에 대해서 물어보니 천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 짐승들과 저 사람들은 저 부인이 땅 위에서 살아갈 때, 섬기고 돌보았던 사람들과 짐승들입니다.” C. S. 루이스는 하늘나라를 섬김과 사랑을 베푼 사람과 그 섬김과 사랑의 흔적을 지닌 영혼들의 즐거운 잔치로 그리고 있는데, 그 나라에서는 그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영광이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서로 서로에게 하늘의 영원한 영광이 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영원한 영광이 되어주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서로를 향해 이렇게 고백해 보겠습니다. “나의 자랑거리가 되어 주십시오.” “나의 영원한 영광이 되어 주십시오.” 다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그 말에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그 고백은 여러분이 그 사람을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되도록 섬기겠다는 의미이니까요. 이제 성도들을 바라보실 때, 그저 내 옆에 있는 성도로만 보지 마시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영원한 자랑거리가 될 사람, 그래서 나를 영원히 영광스럽게 해 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며 바라보시고 또 그렇게 대하려고 애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늘나라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되고 여러분의 영광의 광채가 되어줄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저 너희가 잘 해야 내가 자랑스러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서 끝내지 않습니다. 17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바울은 자신의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한 섬김을 전제물,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 때, 제물 위에 마지막으로 붓는 포도주 제물로 말하면서 만약 너희가 하나님께 믿음과 섬김의 삶을 제물로 드린다면, 나는 그 위에 부어져 그 제물을 더 향기롭게 하고 더 온전하게 하는 포도주의 역할만 하게 되더라도 기뻐하고 기뻐할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사역을 성도들의 삶과 신앙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발견하게 되는데요.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 목사요 성도로 만나서 맺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관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가 되어 교회를 살펴보니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과 어떻게 사역을 하느냐 하는 것이 교회에서 거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현실적으로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이 일이 얼마나 무겁게 여겨지는지 모릅니다. 기도를 드릴 때마다 그 무게를 덜어내지 않으면 그 무게에 짓눌릴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항상 목회자의 역할을 보조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제사에서 중심은 양이나 소같은 제물입니까? 아니면 그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 전제물입니까? 제물입니다. 전제물을 붓지 않아도 제사가 이루어 지지만, 제물이 없이는 절대로 제사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제물만으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전제물 만으로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전제물은 단지 그 제물이 더 향기로운 제물, 그래서 더 온전한 제물이 되도록 돕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뿐입니다. 양이 만원짜리이고 그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가 1000만원짜리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양이 제사의 중심이지 포도주가 중심이 아닙니다. 이것은 더 향기로운 제물이 되려면 성도는 분명히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성도들이지 목회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목회자도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사람이지만, 성도와의 관계 안에서는 성도들이 삶으로 드린 제물 위에 붓는 전제의 역할, 그 제물이 더 향기롭고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더 기뻐받으시도록 돕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본문을 통해 우리는 목회자는 성도로 인해서 더 영광스러워지고 성도는 목회자로 인해서 더 향기로워지고 온전해 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 사이에 있어야 할 가장 아름답고 바람직한 관계의 모습이어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 목회자요 또 성도로 만난 우리 모두가 가장 행복해 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어디다 우리 모두의 마음을 합하면 우리 모두가 가장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삶과 존재가 하나님 앞에 더 향기롭고 온전한 제물이 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더 향기롭게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기쁘게 받으시도록 애써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렇게 여러분의 삶과 존재 위에 부어지는 저의 목회적인 섬김을 받아들여 스스로가 더 향기로운 제물이 되도록, 더 온전한 제물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 또 여러분과 저의 마음과 노력이 한 곳에서 만날 때 우리 교회는 여러분도 행복하고 저도 행복한 곳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거룩한 목적에 한 마음을 품고 애쓴다면 저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은 저 때문에 행복한 그런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면서 받아주실 것이니 우리 모두에게 그 기쁨이 흘러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교회는 모두가 행복해야 하는 곳입니다. 모두가 다 기뻐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목사도 성도도 말입니다. 때로 현실 속에서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 때문에 힘들어 하고 고통당할 때도 있지만 원래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교회는 결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성도가 다른 성도 때문에, 또 목사가 성도들 때문에, 성도가 목사 때문에 더 기뻐하고 더 행복해 하는 교회, 그래서 서로 서로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더 영광스러워지는 성도들의 교회, 이런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는 교회이고 그래서 우리들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이런 그림을 품고 서로가 하나님 앞에서 서로를 위한 자랑거리가 되어주는 그런 기쁨이 충만한 교회로 우리들을 가꾸어 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서로 서로의 기쁨과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사이에서도 그렇고 저와 여러분 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섬김이, 서로의 헌신이 서로를 더 유익하게 하고 더 향기롭고 온전하게 할 때,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한 자랑거리요 영원한 영광의 이유가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기쁨을 위해서 헌신하시되 결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빼앗지는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애쓰시되 결코 그의 유익을 헤치지는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것이 나를, 그리고 우리 모두를 영원히 자랑스럽게 하고 영원히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가 서로에게 자랑거리요 서로의 영광의 광채가 되어줄 것을 믿으며 서로를 위해서 전제로 부어지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그런 기쁨이 넘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