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년 신년특새 -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특새 7)


눅1814 -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pdf


20130122D (#1).mp3.zip




* 오늘 설교 중에 '이'와 '저'를 혼동하여 이야기한 부분이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날짜 :  2013년 1월 22일 화요일

본문 : 누가복음 18장 9-14절



오늘도 우리는 기도를 드리러 나왔습니다. 기도하는 이 시간이 기쁘시죠?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힘들어도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소망을 하나님께 두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분명히 기쁘게 여겨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영혼이 이렇게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에게 다시 전달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기도는 사실 굉장히 힘든 작업입니다. 소리를 내든 내지 않든 전심을 다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때로는 어지럽기도 하고 기운이 좍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노동입니다. 그러니 이 기도라는 노동이 우리에게 돌려주는 삯은 기쁨입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있는 한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기도드릴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는 달라고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 힘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달라고 하는 행동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마다 그 기도가 기도자인 우리에게 반드시 일어나게 해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기도드리는 내용 말고 반드시 우리에게 주어져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우리의 기도는 실패한 기도가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반드시 이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대한 비유입니다. 바리새인하면 예수님 당시에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고, 세리하면 정반대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죄악된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으로 와서 기도드릴 때 이 사람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태도가 어떠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감사하며 아주 당당하게 하나님께 감격적으로 기도드렸지만, 세리는 정반대로 큰 죄책감에 시달리며 정말 겨우 겨우 기도를 마쳤습니다. 그것도 성전에서 저만치 떨어져서 말입니다. 이런 모습은 아마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기록을 찾아보면 세리는 몰라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아앞에서 정말로 그런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세리도 그랬겠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어쩔 수 없어서 세리의 일을 하고는 있지만 양심이 있는 세리는 아마 기도를 드리러 올 때마다 그런 상한 심정과 낮은 모습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두 사람의 기도를 그 자리에서 지켜보았다면 우리는 둘 중의 누구에게 호감을 가졌을까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생각했을까요? 분명히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거룩한 삶을 칭찬하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정작 그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을 정반대로 평가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받으셨다고, 그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말씀을 하시면서 기도자로서의 우리가 반드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그냥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니라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꼭 받아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의롭다 하심입니다. 물론 이 비유는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사람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지만, 저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이것이 모든 기도를 통해 가장 먼저 받아야만 하는 첫번째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말의 뜻은 옳다고 인정받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용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기도에 있어서 이것이 가장 우선되는 응답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용납되지 못하면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께 응답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으신 상태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드릴 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보다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그 해답 또한 주님의 똑같은 말씀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원래 사람들의 언어습관대로하면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세리가...”라거나 “이 사람이 아니라 저 사람이...”라고 말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조금 다르게 “저 바리새인이 아니라 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바리새인을 찾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세리를 찾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것은 그저 ‘사람’입니다. 자신은 흠이 많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결코 자신을 높일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는 ‘사람’, 결코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는 의롭다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아는 상한 심령을 지닌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찾으시면 그 사람을 높여 주십니다. 그를 의롭다 하시고 높여주셔서 용납해 주십니다. 그렇게 그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로운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자가 받아들여지지 않고는 그 사람의 기도도 받아들여질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받아들여 주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 또한 능력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려면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사람이 되려면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높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언제나 불완전하고 부족한 피조물일 뿐임을, 그저 낮기만한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 밖에는 기대할 것이 없는 그런 사람에 불과할 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어떤 사람이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일어날 수 있는 심각한 부작용을 너무나 잘 압니다. 제가 그 부작용을 떼어내느라 1년도 넘게 치열하게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의롭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자기 의’라는 영적인 고질병 입니다. 요즘 저는 우리 교회의 기도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받습니다. 너무 너무 좋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겸손해 져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이, 아무리 뜨겁게 기도해도 여전히 우리는 부족하고 불의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긍휼 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하나님이 받아주셔야만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을 의롭다 하십니다. 저기서 자기 가슴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낮은 기도를 드리는 그 사람의 기도를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우리 모두가 낮은 자리에서 낮게 기도드리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 주시고 또 높여 받아주시는 기도자, 그래서 기도의 충만한 응답을 받는 복된 기도자로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