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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1.13. 주일오전 -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마가복음 14)


막0218to0306 -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pdf


20130113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2장 13-3장 6절


오늘 우리는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오늘 그렇게 합니까? 그것은 오늘이 주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이 주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에 왔고 또 주일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두가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주일은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게 해 주는 날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참 고맙고 좋은 날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은 몰라도 적어도 주일만큼은 우리가 열심히 몰두해 있던 일들을 멈추고 하나님을 더 많이 생각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으니 더더욱 좋은 날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 중에는 주일이라고 해서 항상 쉴 수가 없고, 또 항상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있는 분들도 계시지만 주일날 힘들게 교회에 나오시는 날이면 더 기뻐하고 더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믿는 사람들에게 주일이란 아주 특별하고 각별한 날입니다. 


주일은 엄밀히 말하면 성경이 꼭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 날은 아닙니다. 성경이 지키라고 하는 날은 주일이 아니라 우리가 토요일이라고 부르는 안식일입니다. 기독교회도 처음에는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처음 성도들은 다 유대인들이었이니까요. 그러다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안식일이 일요일, 그러니까 교회가 ‘주의 날’이라고 이름붙인 날과 합쳐져서 주일만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일은 성경이 지킬 것을 명령하는 날은 아니지만, 오히려 안식일보다도 훨씬 더 의미있고 은혜로운 날이 되었습니다. 주일에는 안식일의 의미 뿐만 아니라 주님이 부활하신 것을 기념하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어떤 안식일 하루 동안에 일어난 두 개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사건은 사실 다른 날 일어났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배가 고픈 사람들이 밭을 지나다가 낫을 대지 않고 손으로 이삭을 잘라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은 율법이 규정하는 일종의 권리와도 같은 것이었고, 병자를 고치는 일 자체는 오히려 권장할만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이 두 가지 일이 안식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당시로써는 정말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그런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할례와 더불어서 자신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율법 또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돌로 쳐서 죽이라고 할 정도로 안식일을 중요하고 무겁게 다루고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 안식일을 지키는 일은 굉장히 예민한 일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규정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 되는 것은 안식일에는 일하면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서부터는 일이 아니냐를 결정하는 일이 꼭 필요해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이것을 연구하게 되었고, 그래서 39가지의 해서는 안되는 일을 정했습니다. 그것만 하지 않으면 안식일을 지킬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은 일, 그리고 예수님께서 한 손이 병든 사람을 고쳐주신 일은 그들의 기준에 의하면 해서는 안되는 39가지의 일들 중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39가지 중에는 추수가 포함되어 있었고, 또 목숨이 위태하지 않은 병자를 고쳐주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들은 제자들의 행동을 추수로 보았고, 손이 아픈 것은 전혀 목숨과 상관없는 질병이기 때문에 그것을 고쳐준 것을 안식일을 어기고 ‘일’을 한 것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까? 그러지 않아도 됩니까? 당연히 지켜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고 또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요? 주일날 어떤 일은 해도 되고, 어떤 일은 하면 안되는 것일까요? 예배만 드리면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문제에 대한 세세한 답을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이 그렇듯이 안식일법, 우리 식으로 하면 주일을 지키는 것 또한 단순히 형식적으로 규정 자체를 지키는 일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규정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고 기본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본적인 것이 의미있는 것이 되려면 그 틀 속에 꼭 담겨져 있어야 할 내용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아주 유명한 서양의 수수께끼가 하나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릴테니 한 번 맞춰 보십시오. “여러분, 돼지껍데기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답은 “안주”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신 분들은 좀 수상합니다. 정답은 “돼지를 돼지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습고 허무한 것 같지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돼지의 내용물이 소껍데기 속에 들어있으면 그게 돼지일까요? 소 일까요? 그러면 돼지 껍데기만 있다면 그게 돼지일까요? 아닐까요? 애매한 문제입니다. 누가 보아도 명실상부한 돼지가 되려면 돼지 껍데기와 돼지 알맹이 모두가 필요합니다. 돼지 껍데기 속에 돼지가 들어있을 때 비로소 온전한 돼지가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도 출발은 참 좋았습니다. 내용물을 잘 담을 수 있는 그릇을 준비하려고 했던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릇을 만들어 놓고 나서는 내용물을 신경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릇을 깨뜨리지 않을까 하는 일에만 온통 정신을 빼앗겨 버렸고, 그릇만 그대로 놓아두면 내용이야 문제삼지 않는, 그러면서도 그릇에 조금이라도 손을 대면 서슬 퍼렇게 달려드는 그런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일하던 교회에서 제가 그 교회에 가기 몇년 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전도사님과 교사들이 성탄절 행사를 위해서 2박 3일 동안 거의 밤을 세워가며 본당에 연극무대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대설치가 거의 끝날 즈음에 그 교회 어른 한 분이 교회에 들렀다가 그 무대를 보시고는 어디 예배당에 이런 것을 설치하냐고 호통을 치셔서 그 날 밤 그 전도사님과 교사들이 울면서 그 무대를 다 뜯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아마 ‘도대체 이 본당은 누구를 위한 본당이란 말입니까?’하고 외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아이러니한 일은 제가 그 교회에서 일했을 때에는 바로 그 본당에서 전자기타를 치고 드럼을 쳐도 아무 소리 하시는 분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조항이나 규정을 주장할 때는 굉장히 조심스러워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내세우기에 앞서 과연 이 규정은, 그리고 나의 이런 생각은 어떤 원칙과 원리를 담는 그릇인가, 그리고 그 원리는 과연 성경의 어떤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한 것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기존의 틀이 깨진다고 해서,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일단 주장부터 내세우고 소리부터 지르고 보는 것은 결코 성숙한 태도도, 그리고 진리를 지키려는 노력도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안식일, 그러니까 주일을 지키는 원리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먼저 주님은 첫번째 이야기 속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니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굉장히 멋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그 당시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굉장히 낯설게 들리는 말씀입니다. 우리 생각에 주일은 누구를 위한 날입니까? 주일은 뭐니 뭐니해도 하나님을 위한 날이고 예수님을 위한 날입니다. 주일날 가장 중요한 예배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일을 의무적으로 지켜야만 합니다. 우리가 안식일에 유익을 얻은 얻지 못하든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다른 날은 몰라도 적어도 안식일만큼은 우리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해 “안식일은 너희를 위해 있는 날이다. 너희가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과 그 안식일을 지켜야 할 사람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 말이 맞나요? 이것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 지십니까? 주일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한 날로 주어졌다는 이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십니까?


저는 목사인데도 주일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개혁주의의 정통신학에 대해서 설명해 놓은 어떤 책을 읽다가 너무나 충격적인, 그렇지만 너무나 은혜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주일이 정말 얼마나 믿는 우리를 위한 날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주일마다 설교하기 전에 자주 드리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도 우리가 하늘의 식탁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진수성찬을 마음껏 먹고 마시며 만족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기도인데, 기억나시죠? 이 기도는 그 책에서 발견한 예배에 대한 은혜로운 진리 때문에 드리게 된 그런 기도입니다. 그 책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많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의 풍성한 은혜의 식탁을 차려놓으시고 우리가 마음껏 먹도록 우리 곁에 서서 우리를 섬기는 것이 바로 예배라고 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상하게 들리실지도 모르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이게 맞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받는 것이 많습니까? 드리는 것이 많습니까? 받는 것이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죄 용서의 은혜를 받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받습니다. 위로를 받고 치유를 받습니다. 소망을 얻고 힘을 얻습니다. 영혼의 깊고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드리지만, 그 기도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한 기도입니다. 헌금을 드리지만, 사실 그 헌금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중의 일부입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예배를 통해 무언가를 받으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면서, 그 은혜 가운데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자녀들의 모습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부어주시면서 가장 큰 영광을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우리의 날입니다. 우리를 위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섬겨 주시는 날이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주일날 예배를 드리러 와서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은혜라는 가장 좋은 선물을 얻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뒤에 이렇게 덧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 주님은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을까요? 이런 이유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밀밭에 밀이 없어지게 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햇빛과 비를 내리시고, 밀 이삭이 줄기에 붙어있게 내어버려 두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배가 고픈 사람은 손으로 밀 이삭을 비벼 먹는 것은 괜챦다고, 그것은 도둑질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밭 한 모퉁이는 추수하지 말고 남겨놓아야 한다고 까지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 예수님께서는 그 안식일에 제자들이 그렇게 그 밀로 허기진 배를 채우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미명하에 다른 날은 괜챦지만 안식일에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삭을 비벼 먹으면 안된다는 규정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안식일의 주인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안식일에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들판에 차려놓은 식탁에서 제자들이 마음껏 먹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두번째 이야기 속에서 주님은 안식일에 덫을 놓고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이 불편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려면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규정을 어기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돌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은 과연 무엇을 위한 날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물론 안식일에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생업에 몰두하는 일은 피해야 합니다.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안식일이니까요. 그러나, 안식일에는 과연 아무 일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주일은 하던 일을 멈추고 예배만 드리면 되는 것일까요? 주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질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성도 여러분, 양쪽 중에서 어떤 것이 옳습니까? 선을 행하는 것이 옳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물으나 마나죠. 그 대답은 바리새인들도 다 알고 있는 대답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선을 행하셨고, 생명을 살리셨습니다. 한 손이 불편한 사람을 고쳐주심으로써 더 옳은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셨지만 안식일을 안식일 답게 만드셨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목숨처럼 여기는 그 안식일에 전혀 안식하지 못했고, 선을 행하기 보다는 악을 행하려고 했고, 사람을 살리려고 하기 보다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안식일을 가장 심각하게 범한 당사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말라버린 종교, 굳어져 버린 종교는 항상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안식일은 안식을 해야하는 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큰 질병이 있는 사람들, 많이 가난한 사람들, 가족이 환란 중에 있는 사람들, 죄를 짓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 마음의 큰 상처를 입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안식일에도 안식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런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조금의 안식이라도 누릴 수 있도록 섬겨 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누군가는 자기 안식을 내려놓고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안식일을 가장 안식일 답게 지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완성시키는 가장 거룩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의무로 부터 자유롭게 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우리가 참된 본질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우리를 풀어놓아 다니게 해 줍니다. 죽은 안식일을 풀어놓아 살아있는 주님의 날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부활이신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또 복음이 하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일을 지키는 것은 의무인가요? 그렇습니다. 의무입니다. 의무도 아주 절실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주일을 지키는 것이 의무에서 끝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키는데서 끝나면 일만 안하면 된다고, 그저 예배에만 참석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죽은 주일, 딱딱하게 굳어버린 주일에 갇히게 됩니다. 그 귀한 주일 때문에 오히려 우리가 생명과 자유를 빼앗기게 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안식일의 주인, 주일의 주인이신 우리 예수님으로부터 우리의 주일을 진짜 주일이 되게 할 수 있는 귀한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먼저 우리는 주일이 죽은 날이 아니라 살아있는 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주일은 내가 살아나야 하는 날인 동시에 내가 누군가를 살려야 하는 그런 날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무엇보다도 내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주일을 주셨습니다. 이 주일, 하나님이 복주신 이 날에 우리는 그 어느 날 보다도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하늘의 풍성한 식탁에서 하나님께서 차려주시는 은혜의 진수성찬으로 우리의 주린 영혼을 배불려야 합니다. 그것이 이 날의 주인되신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날의 목적입니다. 이 날은 우리를 위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에는 무엇보다도 나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일날 드려지는 두 번의 예배는 무엇보다도 그것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예배 드리면서 자꾸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받는 일을 미안해 하지 마십시오. 입을 크게 벌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의 입에 떠넣어 주시는 은혜의 양식을 받아 먹으십시오. 오늘 먹는 것으로 일주일을 승리하겠다는 각오로 이 은혜의 식탁에 식탐을 부리십시오. 이걸 놓지면 주일의 가장 중요한 것, 주일을 주일답게 지킬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진리로 배부르고 은혜로 만족하기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렇게 영적인 식욕을 준비하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은혜로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은 그렇게 내가 살듯이 또 누군가를 살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를 누군가에 나눠주십시오. 교사를 하든, 찬양대를 하든,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든, 또 한 명의 교우에게 말 한 마디를 건네든, 헌금을 수납하고 또 정리하든 그 모든 일을 내가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 여기시고 또 그렇게 되도록 애쓰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맡기신 것이니까요. 결코 그 반대의 일은 하지 마십시오. 본문의 바리새인들처럼 무슨 일이건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일은 결코 하지 마십시오. 내가 살고 남을 살리는 일이 이 주일에 일어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주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안식일을 이런 안식일로 지키는 일에 성공해야 우리는 또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또 다른 안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는 우리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일을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종교에 빼앗겨 버리고, 형식에 짓눌린 주일을 되살려 내십시오. 은혜를 누리시고 은혜를 나누심으로써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함께 보내는 매 주일 주일이 우리가 살고 또 서로를 더 풍성히 살게하는 그런 날, 내가 쉼을 얻고 누군가를 쉬게 하는 날이 되어서 우리의 삶에 생명의 안식이 넘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