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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1.20. 주일예배 - 이에 열 둘을 세우사(마가복음 15)

오늘 주일설교 음성파일은 녹음이 안되었습니다. 양해바랍니다.


막0307to19 -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3장 7-19절



이 세상에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이 믿는 종교는 바로 ‘기독교’입니다. 그런데, 이 기독교라는 말만큼 우리들의 신앙에 대해서 잘 표현하는 말도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독교가 기도를 많이 해서 기독교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기독’이라는 말은 실은 ‘그리스도’라는 말의 한자어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진 종교라는 뜻이 되는 셈인데, 이것이야 말로 우리 모두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기독교라고,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며, 우리의 신앙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며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는 일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고,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것 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좋은 것들을 받습니다. 그게 영적인 것이든 현실적인 것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좋은 것이란 좋은 것은 모두가 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좋은 것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습니다. 구원이든, 은혜든, 복이든 아무 것도 받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우리 신앙에 있어서는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해 지는 것이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께 대해 어떤 반응과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부이시기 때문에 예수님께 올바른 반응과 태도를 보이지 못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잘해도 전혀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께 대한 반응이고 또 태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을 통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며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과연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함께 배워보고 또 점검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다양한 반응과 태도를 보였습니다. 먼저 지난 주일 본문에 나왔던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을 비롯한 당시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항상 꼬투리를 잡으려고 감시했고, 결국에는 서로 모의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까지 들었습니다. 두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정말 예수님을 열렬히 좋아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아무리 먼 거리에서도 결코 멀다하지 않고 예수님을 좇아다녔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 사람들이 왔던 곳에 대해서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 모든 곳을 합하면 팔레스타인 전체가 됩니다. 그러니까 당시 지도자들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은 예수님의 소문만으로도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예수님께 열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가수 싸이가 온 세계를 마굿간과 경마장으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 다음 사람들은 병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보였던 반응은 열광적이다 못해 절박했습니다. 평생을 달고 다니던 질병들, 그 누구도 고치지 못했던 중병을 예수님은 고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지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저 따라다닌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예수님을 만지려고 난리를 쳤습니다. 오죽하면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기뻐하시고 행복해 하셨던 예수님께서 이들 때문에 배를 빌려서 바닷가에 띠우고서야 천국복음을 전할 수 있을 정도였겠습니까?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은 소위 귀신이 들렸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악한 영에 사로잡혀서 이런 저런 모양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반응은 조금 이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 나타나시면 그들은 멀리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말하는 대신에 항상 “나는 당신이 누구신 줄 압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인기가 자신들의 자리를 위태롭게 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위배되었기 때문입니다. 일반백성들은 정말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하고 따라다녔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놀라운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정말 열정적이었습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며칠씩이나 걸어서 예수님을 만나러 왔으니까요.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열광했던 것은 놀라운 일을 행하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마음과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원하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었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큰 병에 걸린 병자들이 가장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이 이들을 피해야 간신히 하시려는 일들을 하실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예수님 가까이로 가려고 했지만, 이들 또한 자기 질병의 치유라는 자기중심적인 목적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었습니다.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귀신들린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고백하였지만, 그들의 고백 또한 바른 고백이 아니었습니다. 내용은 틀림이 없지만 그런 예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과 태도를 보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을 정말 극단적으로 배척하고 어떤 사람들은 과하게 추종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을 가장 정확하게 알아보고 그것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들의 반응과 태도는 저마다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반응이었습니다. 자기 이익과 배치되면 배척했습니다. 자기 이익과 부합하면 따라다니며 열광했습니다. 자기가 위태하면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어 예수님을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모두가 다 자기 중심, 자기 이익중심으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반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예수님께 대한 바른 반응과 믿음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들 속에서 사람이 너무 자기 중심적이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도 없고, 혹시 알더라도 제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물론 우리의 신앙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에게 가장 유익합니다.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하늘의 복과 소망, 위로와 치유... 이 모든 것들이 다 믿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니까요. 그러나, 이런 유익을 주는 믿음은 모든 것을 자기 이익과 자기의 필요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에는 결코 깊은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꼭 예수님이 자기 유익과 배치된다고 예수님을 멀리하는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아무리 열광하는 것처럼 보이고, 아무리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도 항상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마음에는 예수님을 참으로 믿는 믿음은 자리 잡을 수가 없고 그래서 그런 믿음을 보시고 주시는 진짜 복들 또한 받아누릴 수가 없습니다. 


꽉 쥔 손에는 아무 것도 쥐어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고집하는 어린아이에게는 그 이아에게 진짜로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나 중심의 사고방식, 내 필요와 이익 중심의 태도를 고집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실 수가 없습니다. 참된 믿음의 주머니에만 담길 수 있는 참된 은혜와 복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꽉 쥔 손을 펴야만 거기 참된 하늘의 복이 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아직도 하나님을 향해 활짝 펴지 못한 손이 있거든 그 손을 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빼앗아가시지 않습니다. 활짝 펴진 손에 하늘의 은혜와 복을 가득 담아주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바닷가에 잔뜩 모여든 군중들을 멀리한 채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주변에 있었지만 참된 주님의 백성을 발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산 위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 중에서 열 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12, 그러니까 열 둘이라는 숫자를 발견할 때마다 생각하면 큰 도움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숫자가 하나님의 백성의 숫자라는 것입니다. 열 두 지파, 열 두 장로, 그리고 열 두 사도. 우연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것입니다. 아주 아주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시내산으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부르셨고, 그들은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처음 열 두 지파, 처음 이스라엘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애굽에서 몸은 나왔지만 마음과 정신은 여전히 애굽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성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오셨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조상들의 마음과 정신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고집하느라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물려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 열 두 사도를 부르십니다. 성부 하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성자 하나님께서도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수많은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기뻐하시는 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께로 나아왔고 열 두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진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었습니다. 진짜 하나님 백성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열 둘은 단순히 열 두 명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의 온전하고 꽉 찬 백성들을 품고 있는 하늘나라의 그루터기였습니다. 이 열 두 명으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고, 우리 교회도 그런 교회들 중의 하나임을 생각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된 것이 어떻게 해서 이루어졌는지, 어떤 은혜 가운데 시작되었는지 생각하며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을 불러모아,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습관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 열 두 명의 사도를 제자들로 부터 불러내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군중들로 부터 불러내셔서 하나님의 참 이스라엘로 삼으시고 이 땅의 교회들로, 그리고 우리 교회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 이스라엘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부르심이 없었다면 우리 개인의 신앙도, 그리고 우리 교회도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같은 부르심을 부름받았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결코 모래알처럼 모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다 가다가 우연히 모이게 된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못났으나 잘났으나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을 주고 사신 거룩한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음가운데서 불러내셨고, 우리는 그 부르심을 받고 주님께로 나아온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그리고 교회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하고 또 고백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열 두 사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부름받아 세워진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자기 스스로 세운 목적과 뜻대로 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부르심 받기  전으로, 실패한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배척했고, 열광하면서도 믿지 못했던 그 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왜 부르셨을까요? 예수님은 왜 우리를 그 분의 몸된 교회로 세우셨을까요? 


첫째로 그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함께 거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소원이 얼마나 강했으면 구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나의 신부이고 나는 너희 신랑이니 너는 나를 떠나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거듭 거듭 말씀하셨고 천국 자체를 아예 신랑과 신부의 혼인잔치로 표현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이 처음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불러낼 때부터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소망이며 또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첫 번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거의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렇지만 은혜롭고 자비하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고 다시 그 안에 거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 새로운 열 두 지파를 부르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피묻은 복음으로, 그  값진 은혜로 우리를 부르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무슨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심되고 중요한 원리를 떠나면 그 일은 진짜 가치를 잃어버리고 결국에는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첫번째 부르심의 목적,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일에 실패하면 신앙은 허전하고 만족이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교회는 결국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목자되신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에야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광현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에 속해있지만 더 크게 보면 개혁교회에 속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개혁교회는 언제나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말씀, 이 두 가지가 우리를 하나님 곁에 머물게 해 주는 가장 중요한 통로요 길안내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 그러니까 예수님과 성도들의 연합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비유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서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여기 앞에 나온 두 가지가 모두 나옵니다. “내 말” 그리고 “구하라” 무엇입니까? 바로 말씀과 기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이 우리와 주님을 계속해서 하나가 되게 하는 은혜의 방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는 것,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말씀을 우리 속에 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거하며 주님을 떠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방법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 곁에 머물기를 원하십니까? 그 분과 멀어지지 않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계속 거할 수 있습니다. 그 것밖에 없습니다. 


제가 우리 교회를 목회하면서 저에게는 비로소 회복되기 시작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에 집중하는 일이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담임목회라는 무거운 책임을 맡고보니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제가 그 두 가지를 떠나면 그 악영향이 곧바로 여러분에게 가게 될 것을 너무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에 더 집중했고, 더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마음과 삶에 풍성함이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은혜 뿐만이 아닙니다. 제 아내와 자녀들을 향한 사랑도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광현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랑도 새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제가 부쩍 잔소리가 많죠? 별로 듣기가 좋지 않으시죠? 부족하고 미숙한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게 되어서 그런 것이니 용서하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더 좋고 은혜로운 것은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느낌이 굉장히 생생해진 것입니다. 내가 주님 곁에 머물고 있다는 확신이 더 강해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목사로서 제발 설교를 통해 주시는 말씀에 집중하자고, 함께 기도하자고 권면하는 것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를 무시하고는 결코 주님 곁에 머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우리 믿음의 온전함과 풍성함도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한 번 돌이켜 보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언제 확신에 차 있었고 언제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했는지 말입니다. 분명히 열심히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집중하려고 애썼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영혼에 담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며, 그 분곁에 더 견고하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열 두 사도를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애굽과 같은 세상에서 백성인 우리를 불러내신 하나님,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 곁에 머물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것을 놓친다면 우리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님 곁에 있어야 합니다. 그 분과 함께 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소원이고 또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풍성한 삶을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가 이제 막 마음에 품기 시작한 사랑하는 광현교회 성도 여러분, 간곡히 정말 간곡히 권면합니다. 올 한 해 동안 정말 최선을 다해서 모이고, 모이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함께 기도에 온 힘을 쏟아봅시다. 그렇게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그렇게 주님 곁에 더 온전히 머물러 봅시다. 우리가 우리 주님의 부르심 대로, 하나님의 소망대로 그 분 곁에 붙어 있을 때,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가 한 번 경험해 봅시다. 저는 믿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우리 주님 곁에 머물러 있게 된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놀랍게 회복시키시고 충만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부르심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데 있습니다. 한 해 동안 주님께로 더 가까이 가시고, 주님과 더 온전히 함께 거하셔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며,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