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0304to09 - 무엇이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pdf
본문 : 빌립보서 3장 4-9절
예전에 결혼하기 전 저희 집에서 편의점을 운영했던 적이 있습니다. 청운의 꿈을 안고서 시작한 일이지만 결국에는 큰 손해만 보고서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 편의점을 시작할 때, 회사에서 해 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많이 파는 것도 중요하지만 ‘로스’ 그러니까 ‘손실’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편의점은 그 특성상 이렇게 저렇게 손실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그게 많아지면 매출이 많아도 소용이 없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저희 집은 손실 때문에 가게를 그만둔 것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나중에 재고조사를 해 보니 손실도 어마어마 했습니다. 가게문을 닫을 때는 그 손실도 저희 몫이 되었기 때문에 손해가 더 컸습니다.
제 생각에는 매사가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고 심지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장사하는 일을 무척 닮아있는 것같습니다. 아무리 많이 벌어들여도 나가는 게 더 많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그 은혜를 지켜내지 못하고 더 많이 잃어버리면 결국에는 마이너스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이 더 풍성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매말라가는 과정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의 수많은 성도들이 이런 모양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런 흐름을 끊는 방법을 잘 몰라서 고생하고 있고 또 신앙의 기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기간이 오래될수록 풍성해져야 하는데 정반대의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유익한 본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날마나 기쁨과 만족이 더해지는 남는 장사가 되게 하는 비법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이유야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의 자랑거리를 늘어놓는 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본문에서 바울은 육체에 할례를 받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진짜 할례파가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성령으로 봉사하며 예수를 자랑하는 사람들이 진짜 할례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들을 믿고 또 자랑하는 사람들을 엄청나게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 중에 자신을 오해할 사람들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채로 그런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이 있다면 “자기는 신뢰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으니까 저러지.”라고 생각하며 그 이야기를 진리가 아니라 바울 개인의 넉두리로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려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로 자신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고 말합니다. 성인이 되어서 유대교로 개종하여 할례를 받는 이방인들과는 달리 자신은 율법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타고난 유대인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그는 자신을 이스라엘인이라고,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그는 자기가 베냐민 지파에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비록 그 숫자는 작았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도 존경을 받는 지파였고, 힘과 용기, 순수성, 그리고 충성심을 대표하는 지파였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을 이스라엘 명문지파 출신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째 그는 자신을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지 않은 순수 히브리인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조상대대로 유대인 가정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네째 그는 자기가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바리새파에 속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바울당시 바리새파는 소수이기는 했지만 율법준수에 관한 한 가장 엄격한 종파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생겨난 모든 전통들을 자신들의 의무로 삼았고, 심지어는 무심코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경우까지 피하는 율법에 대한 세심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명령된 것은 물론이고 항상 그 이상을 지키려고 애썼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이었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열성적인 사람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 열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 하면 그는 자신의 율법에 대한 열정이 교회를 박해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마지막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율법의 기준으로 하면 흠없는 의를 가진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자신이 내미는 자신의 이력서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유대인으로서 바울보다 더 완벽하고 열정적인 유대인은 없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의 화려한 프로필입니다. 이제 빌립보의 성도들은 할례파가 아니라 바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할례파들은 더 이상 할례를 주장하거나 자랑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빌립보 교회에서는 말입니다.
그렇게 모두의 입을 닫아놓고 이제 바울은 자신이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았던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자신에 대해서 늘어놓았던 자랑거리들은 예수를 만나기 이전의 그에게는 정말 엄청난 유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비록 그것이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열정에서 시작되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그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젊은 랍비로서 거의 무제한의 종교적인 권력을 위임받아 기독교 이단을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고, 그것은 더 큰 명성과 힘을 그에게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그가 그런 일들에 열심을 내면서 가지게 되었던 ‘자기 의’라는 영적인 자부심은 그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이었고,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야 말로 당시의 바울에게는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 가장 크게 남는 장사였습니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다메섹으로 향하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가치평가는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가장 큰 자랑거리, 가장 큰 현실적인 힘, 그리고 자부심의 이유였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망하게 하는 이유였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장 크게 수익을 내는 상품이라고 여겼던 것이 실제로 조사를 해 보니 가장 큰 손실을 내는 상품이라는 것이 밝혀진 것과도 같았습니다. 실제로 헬라어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7절에서 장사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유익’은 있는 그대로 번역하면 ‘수익’이라는 말이고, ‘해’는 ‘손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지금 장사를 하면서 자신의 장부에 수익과 손실을 적어내려가는 상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과거에 자신에게 자랑거리가 되었고 가장 큰 수익원이었던 것을 재평가하여 가장 큰 손실원이라고 고쳐적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그가 이렇게 하는 이유, 그러니까 자신에게 가장 큰 수익원이라고 생각되어졌던 것이 가장 큰 손해를 끼치는 것으로 재평가 된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예전에 바울에게는 자기 자랑과 자기 의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그것을 안겨주는 것이 가장 중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게 아니라는 진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래서 이 세상에 예수님의 가치를 능가하는 가치를 지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달라진 것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이제까지 가장 큰 수익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실은 그리스도를 알고, 또 얻는데 가장 큰 방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붙들고 있을수록 가장 귀한 예수님을 알고 또 얻는데, 예수님이라는 수익을 남기는데 손해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된 바울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자신이 얻으려고 하는 가장 큰 수익을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게 되고 또 그런 것들을 어떻게 처리하게 되었을까요?
성도 여러분, 만약 여러분이 장사를 하시는데 제일 잘 팔려서 가장 많은 수익을 남겨주는 물건이 함께 파는 다른 물건 때문에 잘 안 팔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계속 붙들고 계시겠습니까? 그래도 함께 팔아보려고 끙끙거리시다가 잘 팔리는 것도 안 팔리게 만들어 장사 그만두시겠습니까? 너무 어리석은 질문이죠? 그런 것들을 땡처리 해 버려야 합니다. 그것도 안되면 아얘 폐기처분해야 합니다. 아깝다고 끌어안고 있으면 창고비용만 더 들어가고 손해만 커지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정말 멋지고 고상한 구절입니다. ‘우와, 어떻게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정말 바울은 바울이다.’라고 감탄하게 하는 구절입니다. 세상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심지어는 배설물로 여긴다니! 정말 우리를 기죽게 만드는 구절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원래 사용했던 단어들의 어감을 살려 다시 표현해 보면 이 위대한 구절은 이런 이야기가 됩니다. 더 느낌을 살려서 장사꾼 버전으로 해 보겠습니다. “내가 가장 많이 남는 장사를 하기 위하여, 제일 잘 팔리는 물건의 판매를 방해하는 예전에 잘 나가던 물건을 손실로 여김은 가장 큰 이익을 남겨주는 그 물건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 물건을 팔기 위하여 다른 물건이 아까워도 손해보며 땡처리해 버리고, 그래도 안 팔리면 쓰레기처럼 폐기처분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사업에 성공하기 위함이라. 가장 많이 남겨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함이라.”
느낌이 오십니까? 이상하게 들리실지 몰라도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바로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이 장사나 사업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신앙생활은 이 두 가지 모두를 붙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붙들고 자기 의와 자기 자랑거리들도 붙들고 신앙생활 합니다. 아마도 그게 가장 만족스럽게 신앙생활하는 방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에서, 그러니까 자기 의와 자기자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모두에서 동시에 이익을 남기는 그런 장사방법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둘 중의 하나가 주는 수익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에서 얻는 만족은 반드시 포기해야 합니다. 아무리 아까워도 정말 배설물처럼 여기고 던져 버려야 합니다. 그러려고 끊임없이 애써야 합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내려놓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불러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투자라고 불러야 가장 정확합니다. 가장 많은 만족과 기쁨을 주는 가장 귀한 것을 붙들고 가장 풍성하고 만족스러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투자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장사방법을 우리에게 알려주며 너희도 너희 인생을 가지고 장사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계산해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가장 많이 남기는 장사방법인지, 그래서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너희들이 말하는 기쁨과 만족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신앙생활의 방법이 무엇인지 주판을 한 번 튕겨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계산이 끝나셨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버려야 하겠습니까? 그리스도입니까? 아니면 자기 의와 자기 자랑입니까? 제일 잘 팔리는 물건을 버리고 그 물건에 정이 들었다고 해서 손해만 끼치는 물건을 선택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분이 가장 귀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우리 인생을 가장 많이 남는 장사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얻게 된다면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나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그 어떤 가치도 능가하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이것이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나서 드디어 알게된 진리였습니다. 그는 아무리 비교하고 또 비교해도 예수님보다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하고 만족하게 만드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의도, 자기 자랑도 예수님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사실 이 구절에서 그가 평상시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말을 한 가지 사용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주” 그러니까 “나의 주”라는 말입니다. 평상시에는 그냥 ‘주님’이라고 부르지만 여기서만은 ‘나의 주님’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울이 이 부분을 고백할 때,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지 구원자로가 아니라 가장 귀한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대상으로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친밀함을 표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그런 풍성하고 따뜻한 감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바울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예수님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아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과 아주 특별한 관계 안에 머물고 있었고 그만큼 친밀하게 알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인격적인 존재들은 그 존재들과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맺었을 때에야 비로소 진실로 가치있게 여겨지기 시작합니다. 그러기 전에는 마치 옆 집에 있는 금덩어리처럼 아무리 큰 가치를 지니고 있어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게 여겨지죠. 아무리 귀한 사람도 나에게 진짜로 귀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후, 그가 사역했던 모든 시간들은 그가 더욱 더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 위해서 사용된 그런 시간들이었습니다. 일 조차도 어쩌면 그 일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무의미한 것이 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는 주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주님과 더 친밀해 졌습니다. 눈을 멀게하는 영광의 빛으로 나타나신 무시무시한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라고 촉촉한 감정을 가지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경험하여 알게된 주님은 세상의 그 어떤 분보다도 아름답고 탁월하며 영광스러운 분이셨습니다. 알면 알수록 빠져들게 하고, 알면 알수록 사랑하게 만들며, 알면 알수록 경배하게 만드는 정말 영혼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온전히 알아가는 일보다 즐겁고 기쁨 일은 없었습니다. 그 일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닌 일은 없었습니다.
사람은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일에 투자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투자하며 살아가려면 우리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가치를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 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이신지, 얼마나 사랑스러운 분이신지,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얼마나 풍성한 분이신지, 얼마나 매력적인 분이신지... 그래서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렇게 만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위해서,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결코 포기나 희생이 되지 않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선택이며 나아가서 가장 큰 기쁨을 위한 투자가 됩니다.
제 생각에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가장 크게 상실한 감각이 바로 이러한 감각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움을 보며 느낄 수 있는 감각 말입니다. 예수님의 참된 가치를 알아볼 수 있는 감각, 그래서 예수님께 매료될 수 밖에 없는 영적인 감각 말입니다. 주님은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만 분별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가치를 아는 일은 영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결코 육체에 속한 능력과 감각으로는 그 가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것을 증명해 줍니다. 그가 육체의 눈으로 예수님을 보았을 때, 예수님은 이단의 우두머리에 불과했습니다. 가장 심각한 신성모독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영적인 눈으로 보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 예수님보다 귀하고, 예수님보다 영광스러우며, 예수님보다 아름답고, 예수님보다 사랑스러운 분은 없었습니다. 예수님보다 자기 영혼을 만족하게 기쁘게 하는 대상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동안 자신이 만족을 얻으려고 붙들어 왔던 가치없는 것들을 버렸습니다. 아니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오히려 그 귀한 예수, 그 사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데 방해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참된 기쁨, 가장 풍성한 기쁨, 가장 온전한 만족을 얻기 위한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며 실은 단 하나 밖에 없는 투자방법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 분만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분을 더 알기 위해서, 그 분을 더 발견하기 위해, 그리고 그 분을 더 사랑하기 위해, 그 분의 참된 가치를 더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 우리 삶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이 가장 거룩하고 달콤해지도록, 그런 마음을 지닌 영혼이 되도록 기도하며 그 일에 가장 큰 관심을 두려고 애쓰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 동안 내 기쁨의 이유가 되어왔고, 내 자랑거리가 되어왔으며 또 나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들을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투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여러분의 영혼의 참된 기쁨을 위한 최고의 장사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남지도 않는 물건에 투자하지 마시고 최고의 수익을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유익을 보장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일에 여러분의 시간과 마음과 노력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알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참된 기쁨을 주실 것이고,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장 달콤한 성도의 행복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이 최고의 보배,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또 얻는 참 기쁨을 알게 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