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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2.02. 주일오전 - 너희는 삼가라(마가 61)


막1314to27 - 너희는 삼가라(마가61).pdf


20140202SE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13장 14-27절



아이들이 하지 말라는 일을 자꾸 하게 되면 부모들이 항상 사용하는 대사가 있습니다. 바로 “너 한 번만 더 그러면 아주 혼날 줄 알아? 회초리 열 대야.”라는 말입니다. 부모들이 이 대사를 읊을 때는 거의 정색을 하고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부모도 속으로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 저 녀석이 한 번만 더 그러면 저는 회초리를 들 수 있나이다!’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는 아이가 매를 맞지 않고서 상황이 종료되기를 바랍니다. 만약 자녀가 또 한 번 그래서 회초리를 들 때면 화도 나지만 맞는 아이보다 마음이 더 좋지 않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심판이나 징벌에 대한 예언을 읽게 될 때, 참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그렇게 하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최후통보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하나님께서 심판이나 징벌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진짜로 그렇게 하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이렇게 까지 하지 않도록 좀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그 예언이 성취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예언을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그런 예언을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마음 먹은 때에 벌을 내리시면 그만 이니까요.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심판에 대한 예언을 주실 때는 거의 언제나 ‘이러 저러하기 때문에 이런 벌을 내릴 것이다. 그렇지만 너희가 그런 죄에서 돌이키고 회개하면 나도 그 심판을 거두어 들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결국 예언된 징계가 주어지는 경우에는 항상 그 뒤에 회복에 대한 약속을 덧붙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벌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 벌을 예고하시고 또 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마음을 알기 때문에 예언을 하나님의 사랑 어린 경고로 받아들이고 회개하며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로 되돌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의미가 없는 분이듯이 하나님의 이런 말씀들 또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경고하고 또 경고해도 그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오히려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넘어가서는 안되는 선으로 다가갑니다. 그렇게 자기 인생과 이 세상에 악을 쌓아갑니다. 그리고 이 일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인내하실 수 없는 상태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심판에 대한 예언 중에서는 피할 수 없이 그대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예언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종말에 대한 예언입니다. 물론 종말이란 하나님의 구원이 가장 온전히 완성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지만, 반대편에서 보면 이 세상에 죄악이 너무 가득 차서 더 이상 이 세상을 위해서건, 사람들을 위해서건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태가 될 때 찾아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과 그 예언에 비추어서 마지막 심판의 때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 있는데요. 앞서 말씀드린 사실들 때문에 우리는 이런 말씀들을 조금은 다른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주신 것은 그러니까 두려워하고 체념하고 슬퍼하면서 지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첫째로 그러니까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마냥 풀어져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예루살렘에 닥쳐올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또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시간 속에서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미리 말씀해 주신 내용들을 기준으로 해서 분별력 있고 지혜롭게 처신하며, 또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미리 그런 이야기들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이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가시기 전에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해서 미리 모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용만 본다면 결코 좋은 내용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을 미리 해 주신 이유는 성도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서 하나님이 섭리하지 않으시는 일은 하나도 없으며, 하나님이 알지 못하는 일도 없고, 또 하나님이 통제하지 못하시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다들 알고 계시지만 제 동생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서 벌써 몇 년째 누워 있습니다. 처음에 그 일이 닥쳤을 때, 얼마나 슬펐는지 모릅니다. 며칠 밤을 잠 못이루고 통곡을 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제 동생은 젊은 시절을 굉장히 방탕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빚도 많이 져서 고생도 많이 하고 집안에도 많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조금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살아서 이제 몇 개월 후면 큰 빚 다 갚고 숨 좀 돌리려던 찰라에 그런 일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리고 동생에게 잘 해주지도 못하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 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 미안해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물론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제 마음 속에는 정말 죽으면 어쩌지? 세상을 떠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었습니다. 그 사실 때문에 침체에 빠질 정도의 절망이나 좌절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기 이전에 두 가지 믿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결국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었고,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성도들에게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 않으며, 또 그런 시험이 닥쳐오면 피할 길을 주신다는 말씀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두 진리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으니 그런 슬프고 좌절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에도 슬픔과 고통이 있으되 좌절이나 분노는 생겨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 때 저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저는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고, 제 스타일로 보아서 지금도 그 생각이 날 때면 심하게 좌절하고 낙심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 저에게는 제 동생의 일이 정말 말씀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진짜로 경험하게 해 주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미리 알고 또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당해서 한 쪽은 무너지는데, 다른 쪽은 오히려 더 굳게 설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로마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일들이 하나 하나 일어나기 시작할 때 아마도 이 말씀을 몰랐던 사람들은 그야 말로 공황상태에 빠지든지 아니면 우리에게 예루살렘이 있고 성전이 있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 리가 없다고 근거없는 확신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을 알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더  차분해지고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더 단단한 확신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일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착착 진행 중이며, 자신들에게는 이미 예수님께서 주신 행동 지침이 있었으니까요.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되는 마지막 징조, 그리고 그 징조 차체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의미하는 그런 사건에 대한 말씀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앞에서 주님은 예루살렘 멸망이 가까이 오면 믿음 때문에 남들이든 가족들이든 다 성도들을 미워하게 될 것이지만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첫 절인 14절에서는 “도망치라”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의 말씀이 바뀌는 느낌이 듭니다. 이제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멸망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예루살렘을 지키면서 믿음을 지켜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으면 안됩니다. 빨리 도망쳐야 합니다. 그렇게 목숨을 건져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쓸데없는 고집이나 분별력 없는 판단으로 생명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서는 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많은 내용이 그런 것처럼 다니엘서에 나오는 말인데요,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라는 다니엘서 11장 31절의 예언에서 나온 말입니다. 다니엘의 이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주전 168년에 로마의 안티오쿠스가 이집트에서 철군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성소에 멸망의 가증한 것을 세웠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거기 세워졌던 것은 돼지를 제물로 드리기 위한 제단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런 일이 또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질 때 다시 한 번 일어났습니다. 그 때 로마군을 이끌었던 티투스 장군과 부하들이 성소를 짓밟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로마군은 그 다음에 성전뜰에 군기를 세우고 거기다가 제사를 지낸 후, 티투스 장군에게 환호했다고 합니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이 성전멸망이 완전히 시작되었다는 신호탄이 될 것이니 그 때가 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이길 수 있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해진 심판이니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다음부터 일의 진행속도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릅니다. 지붕 위에 있다면 집으로 내려가거나 들어가서 물건을 챙기려고 해서도 안될 정도로, 밭에 있는 사람들은 옷을 가지러 가서도 안될 정도로 빨리 도망쳐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일이 얼마나 급하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느긋하게 대처할까봐 주님이 특별히 주신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느긋했다가는 피해볼 겨를도 없이 당하고 마니까요. 그래서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는 분별력이 중요합니다. 그 분별력에 따라서 상황을 대하는 태도가 정해지고, 그 태도에 따라서 마지막 결과도 정해지니까요. 주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너무 긴박하게 진행될 것이니 서둘러서 도망쳐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이렇게 일의 진행이 급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뿐만이 아닙니다. 어떤 일이 분명히 일어나기는 하는데 그 때가 언제인지를 모를 때에도 똑같이 긴장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 드렸듯이 우리 개인에게 있어서 종말은 우주의 종말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입니다. 우리 개인에게는 그 때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우리가 이 세상의 삶을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 전혀 모릅니다. 실제로 우리들 중에서 내가 내일 반드시 살아있을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영적인 긴장의 끈을 바짝 조여야 하는 때는 바로 현재라고 불리는 이 순간입니다. 우리는 그저 세상 떠나면 천국 가겠거니 하면서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전에 냉장고 선전 중에서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 합니다.”라는 선전문구가 있었는데, 우리는 지금 내가 보내는 이 순간 순간이 나의 영원한 삶을 결정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을 만날 그 날을 준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다음에 말씀해 주신 것은 예루살렘 멸망의 비참함에 대한 것인데요, 먼저 예수님은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옛날에는 출산의 복이 가장 큰 복이었고 그래서 원래 임신한 여인과 젖을 먹이는 여인이라는 말은 가장 다복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에는 이 가장 복된 여인들이 가장 복이 없는 자들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오면 복과 화가 완전히 반대로 뒤집힐만큼 모든 것이 파괴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복을 주십니다. 그렇지만 그 복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오히려 그것을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복이 우리를 붙들어서 그 복에 집착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소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이 오히려 우리의 영원한 영광에는 마이너스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런 역할을 했듯이 마지막 때가 오면, 오히려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붙들려고만 했던 것들이 오히려 우리에게 화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이 땅에서 소유하고 누리고 또 경험하고 있는 것들을 조금은 유보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쁜 것들은 물론이고 좋은 것들 또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또 상대적이고 임시적인 것으로 대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맞이하게 될 마지막 날이 우리에게 후회도 적고 또 홀가분한 그런 시간이 될 것입니다. 


19절은 그 전쟁의 참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그 날들이 환란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이것이 예수님께서 설명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참상입니다.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어서 예루살렘 전쟁의 결과라고 생각되지 않지만 전쟁 직후의 예루살렘의 모습이 이와 꼭 같았습니다. 4년 동안이나 로마군의 포위가 계속되자 너무 배가 고파서 부모가 자녀를 잡아먹는 일도 있었고, 성 안에서는 정치적인 이권과 얼마 안되는 음식물 찌꺼기를 차지하려고 서로 죽이고 죽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체 사망자중에서 로마군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칼로 죽인 숫자보다 서로 죽인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는 기록까지 있습니다. 그 후에 살아남은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나아가서 예루살렘은 완전히 초토화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마지막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의 이스라엘이 세워지는 1948년도까지 거의 1900년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전쟁보다 더 참담한 전쟁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이런 설명을 덧붙이셨습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4년 동안이나 계속되어질 전쟁은 그 어떤 전쟁에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처참함을 남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4년이라는 기간은 훨씬 단축된 기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그 정도로 끝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그 전쟁의 기간을 단축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감하셨느니라” 원래 하나님께서는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더 철저하게 징벌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하시니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고난과 고통을 함께 겪을 성도들이 생각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원래 계획을 수정하셨습니다. 원래는 몇년이었는지 모르지만 훨씬 더 길었을 것이 분명한 전쟁의 기간을 4년으로 줄여놓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이 4년이 정말 4천년 보다도 더 긴 시간이었을 테지만 실은 그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을 위해서 최대한 줄여놓은 기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 날들을 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이미 그 전쟁의 기간을 단축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에 대한 배려이고 또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는 좋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그 기간이 너무 길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도 어떤 어려움을 얼마동안이나 길게 당하든지 그 기간이 짧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오늘 말씀을 묵상해 보면,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들은 그 고통들이 우리에게 찾아오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그 기간을 단축시켜 놓으신 상태로 우리가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기간만 그럴까요? 강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느 정도나 그 어려운 일들의 기간을 단축하셨고, 또 그 정도나 그 강도를 약하게 만들어 놓으셨을까요? 우리가 충분히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또 우리가 충분히 인내할 수 있는 기간 안으로 한정하여 감하여 놓으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 너무 잘 아시고 또 너무 너무 사랑하시니까요. 어느 정도나 견디고, 어느 정도나 인내할 수 있는지 완전하게 아시니까요. “만일 주께서 그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 그 당시 유대 땅에 있는 예수님을 믿었던 성도들은 모두 이 말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확신이 되었고, 그래서 능력이 되어 주었을까요? 물론 그들 또한 그 기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간이 얼마나 되건 간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위하여 미리 줄여 놓으신 기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그렇게 해 놓으셨으니 그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자신들이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기간이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추측하건데, 이 말씀을 믿은 성도들은 그 전쟁이 끝나기까지 믿음을 지키며 끝까지 인내했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을 말씀드립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해 내지 못할 어려움은 절대로 주지 않으십니다. 그 종류나 기간, 그리고 정도까지 우리가 충분히 인내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것들만을 허락하십니다. “경험해 보니 아니던데요?”라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아직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거나 알았더라도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확실치 않을 때 당한 여러움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약속들은 그 약속을 믿는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모르고 또 믿지 못했으니 나와는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꼭 권면하고 부탁드리는 것은 이 믿음을 시험과 고난이 찾아오기 전에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미리 구하면  미리 주십니다. 이것을 정말로 믿는 믿음을 미리 달라고 간절히 구하면 분명히 주십니다. 이 믿음은 마치 고난에 대한 예방주사와 치료약 같아서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을 고난과 고통의 절망과 좌절로 부터 구해주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상처도 치료해 줍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경험한 것이니 확실히 믿으셔도 좋습니다. 


비슷한 약속이 27절에 또 한 번 나옵니다.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온 세상이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떨릴 때에도 선택받은 백성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그가 어디있든지 어떤 상황 속에 있든지 그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이라면 반드시 불러모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두 가지 약속을 합쳐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백성들이 견딜 수 있을만큼의 고난만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상황 속에 있고 어디 있든지 간에 그들을 불러 모으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이 은혜를 믿으십니까? 현실적인 고통의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지키시는 일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믿고 붙들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저는 13장의 본문을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던 일들을 근거로 해서 종말 보다는 예루살렘 멸망과 연관지어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학자들 중에는 이 본문을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건 혹은 이 세상 종말에 대한 예언이건 변함이 없는 것은 그 예언들 속에는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충격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고, 징조만으로도 기가 질리는 그런 내용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세부적인 이야기들에 관심을 빼앗겨서 그 때와 고난의 종류들을 헤아리고 예측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노력들도 전혀 가치없는 노력들은 아닙니다만, 사실 이런 노력들은 성공할 수 없는 노력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그런 문제들에 대해 정확한 대답을 들려주시기 보다는 모호한 대답을 들려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정도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미래의 일들에 대해서 알려 주시는 이유는 정보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그 때에 걸맞는 믿음을 가지고, 그 때를 준비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성도 여러분, 시험날짜와 시험과목, 그리고 시간표를 외운다고 해서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시험 준비를 철저히 해야 시험을 잘 치를 수 있고, 시험에 통과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입니다. 마지막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때의 일정이나 혹은 일어날 일들에 대한 자세한 지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때를 오게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믿음이며, 또 그 때를 준비하는 영적인 긴장과 거룩한 삶입니다. 물론 내가 사는 시대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잘 분별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느니라” 왜 미리 말씀하셨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주의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 때를 준비하면서 기다리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미혹되거나 낙심에 빠지지 않고 넉넉히 구원을 얻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게 예루살렘 멸망이든 온 우주의 종말이든 그 날을 준비하는 원리는 꼭 같습니다. 영적인 긴장을 늦추지 말고, 자신을 잘 살피며,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을 믿는 믿음 가운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면 됩니다. 경험하게 되어지는 고통과 어려움은 이미 하나님께서 감하여 놓으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에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다고 해서 게을러지고 나태해 져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믿음이 흔들리고 미혹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항상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님 만날 그 날을 기대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