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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2.06. 주일예배 -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가복음 13)


막0218to22 -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pdf


20130106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2장 18-22절



인터넷을 잠깐 보니 2013년에 반드시 하게 될 실수라는 제목으로 그림 하나가 올라왔습니다. 그 그림은 날짜를 적으면서 2012년 이라고 적어놓고는 아차 싶어서 마지막 2자를 획을 하나 더 그어 3자로 고쳐놓은 그림이었습니다. 보는 순간 ‘아! 맞다. 나도 저런 실수를 많이 하지?’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설교문에 설교날짜를 적곤 하는데 해가 바뀔 때마다 그런 실수를 자주 합니다. 올해도 벌써 두어번 그런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실수를 한다고 해도 2012년은 이제 2013년이 되었습니다. 어김없이 신년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2013년 새해의 첫번째 주일입니다. 그리고 새해 첫 주일로는 제가 어려분과 함께 맞이하는 첫번째 주일이 바로 오늘입니다. 제가 여러분과 함께 한 지가 이미 넉 달이 지나갔지만, 2013년은 제가 여러분과 온전히 함께 하는 첫번째 해가 된다는 점에서 감회가 아주 새롭습니다. 어떠세요?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저와 함께 걸어가실 2013년이 아주 쬐끔이라도 기대가 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새해에 대한 같은 기대와 소망을 품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맞이하는 것, 그리고 새로 맞이하는 것을 처음답게, 그리고 새로 맞이하는 것답게 맞이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주 좋은 마음인 것 같습니다. 그 마음에 걸맞는 각오와 노력만 더해진다면 또다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사계절이 지나면 다시 새로운 봄을 맞게 하시고, 한 해가 지나면 또 다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하시는 이유도 어찌보면 굳어져 버리고 식상해지기 쉬운 우리의 삶, 그리고 특히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자극과 기회를 주시는 것이라는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저와 여러분이 함께 맞이하는 첫번째 새해인 2013년의 첫 주일에 올 한해에 대해 이런 소망과 기대를 가져 봅니다. 저는 이 한 해가 저도 여러분도 특별히 신앙적인 면에서 마음도 생각도 새로워지기 시작하는 첫 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2013년이라는 선물을 주시면서 그 포장지 않에 넣어놓은 은혜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무언가에 익숙해 진다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처음 만나는 환경에 적응하고, 처음 입어 뻣뻣했던 옷이 몸에 부드럽게 맞기 시작하고, 서먹서먹하던 사이가 친밀해 지고, 또 힘들던 일이 쉬워지고... 이렇게 무언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은어색함과 서툴음으로 가득찬 것이 될테니까요. 그렇지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반대로 굉장히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미 새로움이 없어졌다는 의미이고 그래서 그만큼 무감각해 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본다면 예배가 그런 것 같습니다. 처음에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을 때는 그 기쁨과 새로움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눈은 반짝 반짝 빛납니다. 기도하는 모습은 진지함과 열정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번 두 번 예배가 반복되어지면 그래서 그 예배에 익숙해지면 그런 모습은 점점 사라지고 맙니다. 여전히 예배의 순서는 동일하고 여전히 그 순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예전의 내 모습이 없습니다. 한 시간 넘게 예배를 드리고 나도 내가 그 시간 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만 이것 또한 반복되면 나중에는 그것이 오히려 일상적인 것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왜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예배를 통해 무엇을 기대하고 또 무엇을 해야하는지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그저 예배에 참석했다는 사실만 남게 되고 그것이 전부가 됩니다. 성도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예배에 익숙해지면 그저 예배는 목사가 담당하는 일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일, 설교하는 일,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대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본문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은 어딜 가나 잔치를 벌이고 먹고 마시며 즐거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당시의 경건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교에서는 금식이 경건의 기준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도 금식을 명하고 있었습니다. 일년에 한 차례 찾아오는 대속죄일에는 꼭 금식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여기에다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 두 차례의 금식을 덧붙였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금식들도 정말 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원래는 이 금식들이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와 같은 슬픈 날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행해진 것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금식이라는 형식만 남았고, 금식을 하면서 짓는 슬픈 표정만 남게 되었습니다. 금식 속에 꼭 들어있어야 할 회개나 통회는 사라져 버린 것이죠. 더 문제는 이것이 경건을 재는 기준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은 누구나 일주일에 두차례 금식해야 합니다. 덜 경건하려면 일주일에 한 번, 조금 덜 금식하려면 가끔... 이런 식으로 금식이 경건의 점수를 매기는 채점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익숙해지는 일의 아주 심각한 부작용이 금식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행동들이 익숙한 것이 되고, 굳어져 버리게 되면 그 때부터는 그 안에 담겨져야 할 내용과 진심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그 행동 자체가 신앙의 재판관 노릇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도구가 되기 시작합니다. 익숙해지고 굳어져 버려 내용을 잃어버린 금식이 바로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금식을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득달같이 달려와서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습니까?”하고 기세등등하게 따져 물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그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어떤 사람이 검은 옷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식장을 들어섭니다. 얼굴은 근엄하고 슬픈 표정을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갑자기 화를 냅니다. “아니, 당신들 이래도 되는 겁니까? 함께 울어주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말입니다.” 당당히 소리쳤지만 뭔가 분위기가 싸합니다. 한 사람이 황당한 표정으로 나오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그러시죠? 우리는 지금 우리는 제 결혼 피로연 중인데요.” 이 사람은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 자리가 장례식장인 줄 알았던 거죠.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저질렀던 잘못이고 또 실수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장례식이 치러지는 시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근엄한 표정을 짓고 금식하는 것이 잘 어울리는 시대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대는 바뀌어 있었습니다. 이제 시대는 장례식의 시대가 아니라 결혼식의 시대, 슬픔의 시대가 아니라 기쁨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그렇게 기다리던 신랑이 와서 잔치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도 금식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신랑, 그러니까 예수님이 붙잡히실 때부터 다시 부활하실 때까지의 짧은 기간은 신랑의 손님들도 슬퍼하며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이 사는 지금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일까요? 장례식의 시대일까요? 아니면 결혼식의 시대일까요? 슬픔의 시대일까요? 아니면 기쁨의 시대일까요?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결혼식의 시대이고 기쁨의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빼앗겼던 신랑이 부활하셔서 영광을 얻으셨으며, 우리는 우리 신랑이 다시 오실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보증으로 우리는 성령을 허락받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신랑의 손님이었지만, 우리들은 그 신랑의 신부입니다. 우리 신랑되신 예수님께서는 잠시 자리를 비우셨지만 분명히 다시 오셔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가장 영광스럽고 행복한 신부가 될 것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은 바로 그것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이 슬픔의 때입니까? 기쁨의 때입니까? 기쁨의 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떤 모양이 되어야 할까요? 소망과 기대, 그리고 확신으로 가득찬 기쁨 넘치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교회 대표 닭살 부부가 누구죠? 네. 김 모집사님 부부입니다. 자타공인입니다. 김 모 집사님,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집사님 결혼식 전날 잠 잘 잤습니까? 잘 못 잤습니까? 잘 못잤죠? 그렇다면 왜 못 잤습니까? 기뻐서 못 잤습니까? 슬퍼서 못잤습니까? 기뻐서 못잤죠? 설레서 못잤죠? 웃음 때문에 얼굴은 자꾸 히죽 히죽 제 멋대로 움직이고, 가슴은 쿵쿵 거려서 말입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 기쁨입니다. 내일이면 결혼할 신랑과 신부의 기쁨, 그 설레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일은 기약없는 기다림처럼 여겨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마치 오지 않을 새벽을 기다리는 것같은 심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되어서는 안됩니다. 소망도 없이, 그 분의 신부가 된다는 그 기쁜 기대감도 없이 자다가 졸다가 등불을 꺼뜨려서는 안됩니다. 화장도 안한 부시시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신랑을 맞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 얼굴에는 내일이면 가장 사랑하는 신랑과 결혼할 신부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잠못이루는 설렘임과 벅찬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우리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시게 되는데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올해는 우리의 영혼 속에 이러한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적으로,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마음이 회복되는 그런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기쁨은 옛 은혜가 아니라 새 시대의 새로운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만이 이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과 요한의 제자들이 여전히 기뻐하지 못하고 금식에만 매여 어둡고 칙칙한 경건에만 빠져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은 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두 개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새로 지은 베옷은 빨면 처음에는 줄어들지만 그 다음부터는 늘어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그 탄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됩니다. 당겨도 늘어나지 않고 다시 줄어들지도 않는 그런 상태가 되어 버립니다. 오래 입은 메리야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옷을 수선한답시고 새로 짠 베를 가져다가 기우면 빨래를 하자 마자 옷이 다 망가지고 맙니다. 구멍이 더 크게 나고 맙니다. 그래서 헌 베옷을 깁는다고 새로 짠 베를 가져다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포도주를 담는 일도 비슷합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포도주를 담가서 가죽 부대에 넣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할 때 모두가 알고 있는 금지사항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로 담근 포도주는 절대로 오래된 가죽 부대에 담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죽은 새 가죽 일때는 굉장히 부드럽고 신축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죽 부대도 오래되면 그 가죽에서 수분이 다 빠져 나가 버립니다. 빳빳하게 말라버리고 또 가죽도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신축성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쉽게 터져버립니다. 그런데, 새 포도주는 아직 발효되기 전이라서 계속 더 팽창하게 될 것이고, 가스도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새 포도주를 절대로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결국에는 둘 다 망가져 버리니까요. 


이 두 비유의 요점은 동일합니다. 첫째는 헌 것과 새 것은 결코 함께 할 수가 없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새 것은 항상 새 것하고만 짝지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둘 다 온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연말에 저는 올해를 생각하면서 우리 교회의 2013년은 어떠해야할까? 하나님께서 2013년에 우리 교회에 일어나게 하시기를 가장 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많이 기도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떠 오른 것이 고린도 후서 5장 1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고, 이 말씀과 함께 “새로움”이라는 단어가 제 마음에 큰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우리는 이미 새로워진 새로운 피조물들입니다. 옛 것이 아니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그렇듯이 새 것은 반드시 낡은 것이 되고, 옛 것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다시 헌 것이 되는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참 다행인 것은 저와 여러분이 베로된 옷이나 가죽부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번 낡아지면 다시는 새로워질 수 없는, 그냥 버려야 하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언제든지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이미 거듭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너무도 다행스러운 점입니다. 


우리는 원래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로 새로워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습관을 바꾸고 마음을 바꿔먹는 정도의 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속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한 번 완전히 새롭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속 사람을 거듭나게 해 주시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는 그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시 새로워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속사람이 새로워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새 부대가 아니면 절대로 새 포도두를 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우리는 자신을 새 부대로 유지시켜야 가야만 합니다. 비록 항상 낡아질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왜 바리새인과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낡은 옷이 되었는지, 낡은 가죽부대가 되었는지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익숙해진 것들에 만족했고 그것 때문에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것이 왔을 때, 복음이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전혀 새로운 은혜가 왔을 때 그 새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만, 예수님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절대로 식상하지 않습니다. 뻔하지 않고 이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같은 은혜를 받아도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10년전과 올해가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수 십년을 믿어도 전혀 질리거나 식상해 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새롭고 항상 우리를 깜짝 깜짝 놀라게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우리 하나님이 항상 새로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낡은 부대에 새로운 포도주를 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와 부대를 모두 버리게 될 것을 하나님이 너무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항상 새로운 하나님께서는 항상 새로운 은혜를 담아두실 새 부대를 찾으십니다. 다시 새로워지려고 애쓰기 때문에, 낡아진 것들과 굳어진 것들을 떼어내기 위해서 몸부림 치기 때문에 아무리 오래 믿었어도 여전히 새 부대로 남아있는 그런 새 부대같은 성도들을 찾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그 은혜로 채워지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를 고인 물처럼 만드는 익숙해진 것들과 굳어져 버린 것들을 제거해 버리고 다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담기에 적절한 새로운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함께 우리들 자신의 마음속을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여러분, 지금 내 속에는 뜨거움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정열이 있습니까? 은혜를 향한 간절함과 새로운 기대가 있습니까? 새로운 은혜를 담을만한 신축성과 변할 수 있는 생명령이 있습니까? 더 큰 은혜, 더 온전한 기쁨에 대한 거룩한 욕심이 있습니까? 


항상 새로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것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새 것이 되기를 소망하고, 새 것이 되기 위해서 애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깜짝 놀랄만한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겠으니 새 부대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새해를 맞이하는 첫 주에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은혜의 말씀이고 또 약속이라고 믿습니다. 저는 사실 왠만해서 어떤 특별한 결단을 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며칠간 광현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서 저는 두 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아니, 결단해야만 했습니다. 첫째는 나 자신을 새롭게 대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저에게는 익숙한 사역의 방식이 있고, 또 익숙한 영성의 모양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동안 익숙해져 왔던 방식을 벗어던지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새롭게 광현교회를 목회해야할 저에게, 그리고 제가 섬겨야할 광현교회의 성도들인 여러분을 위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여러분을 새롭게 바라보고 또 새롭게 대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냥 제가 지금까지 해 오던대로 하려고 했습니다. 나쁜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저에게 익숙한 방식이고, 또 다른 곳에서는 그렇게 해도 열매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새해가 되면서 저는 여기서는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정말 가슴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아직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지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이 저 자신이 새 부대가 되게 하고, 또 여러분을 새 부대로 준비시키기 위한 결단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저는 분명히 저 자신에게도 요구할 것입니다. 내가 굳어지고 낡아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개인이기 이전에 여러분의 목회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도 요구할 것입니다. 새로워질 것을, 그리고 새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절대로 무리한 것들은 아닐 것이고, 어떤 새로운 큰 일을 벌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익숙해져 온 것들을 떼어내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에 쉽지 않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목회자로서의 올해에 대한 저의 판단은 올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부대가 되라고 주신 한 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해는 우리 교회가 계속해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시작점이 되는 그런 한 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나는 오직 새 술은 새 부대에만 담을 것이니 너는 새로워지라는, 나의 새 은혜를 담으려면 너희 광현교회는 반드시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십시다. 순종하기로 결단하십시다. 이것을 위한 첫 발자국이 1월 14일부터 시작될 새해 특별새벽기도회입니다. 꼭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오시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신 분들이 아니면 꼭 나오시기 바랍니다. 매일 나오는 것이 힘드시면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꼭 나오십시오. 차편이 힘드시면 서로 카풀을 해서라도 꼭 나오시기 바랍니다. 작정하시고, 나와서 함께 기도하십시다. 이 기도회는 처음에 장로님이 제안하신 것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개인적으로 이 기도회에 많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서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시는, 기도를 통해 너 자신이 먼저 새로워지라는 강한 요청을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니 저는 이 기도회에 하나님께서 크고 새로운 은혜를 부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길지도 않습니다. 딱 4주간입니다. 우리 억지로라도 일단 4주간만 고생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지 하지 않으시는지, 새 은혜를 부어 주시는지 안 그러시는지 한 번 보십시다. 저는 분명히 그렇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새 은혜로 우리를 놀라게 해 주실 것입니다. 


2013년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항상 자신에게 붙어있는 묵은 것과 익숙해져 단단해진 것들을 떼어내어 하나님의 새롭고 놀라운 은혜를 담는 귀하고 복된 새 부대가 되는 일이 시작되는 첫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