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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금요기도회

2013.02.08. 금요기도회 - 욥의 기도(기도 12)


욥4201to06 - 욥의 기도(기도 1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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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욥기 42장 1-6절

대개 욥기를 생각하면 ‘고난’을 생각하고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은 욥기를 읽고 묵상하면서 큰 위로를 받고 힘을 얻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욥기는 실제적인 면에서도 굉장히 능력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는 우리에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 그러니까 하나님의 온 우주의 왕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것은 욥기의 처음부터 그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왜 욥이 그런 극심한 고난을 당한 줄 아십니까? 하루 아침에 자식들과 재산을 모두 잃고 몸에는 극심한 피부병을 얻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내에게도 모욕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욥을 너무 신뢰했고, 그래서 욥의 인생을 전쟁터로 삼아서 사탄과 전쟁을 벌이셨기 때문입니다. 욥의 고난은 그만큼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유로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신실함을 자랑하셨고, 사탄은 하나님께 딴지를 겁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셨으니 욥이 하나님을 저렇게 잘 섬기지 욥도 가진 것을 다 빼앗기면 하나님을 배신할 거라고 깐죽거리자 하나님께서 “그래, 그럼 한 판 해 볼까?”하고 욥을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터로 삼아서 사탄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던 이야기가 바로 욥기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남고 결국에는 그 이전보다 더 온전한 신앙을 가지게 되지만 그 이야기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큰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작은 이야기 입니다. 실제로 욥은 그가 하나님을 너무 잘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를 믿을만했기 때문에 극심한 고난을 당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사필귀정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선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는 생각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선하고 의로운 분이시니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주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벌을 내리신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무지 이런 틀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정직한 사람이 잘 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는데 현실을 보면 그렇지 않아서 자기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불신자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이런 문제는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그래도 남의 일일 때에는 그래도 무슨 하나님의 뜻이 있을거라고 위로도 하고 여유도 부려보지만 막상 그게 내 일이 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집니다. 물론 이 세상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성도들은 그것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징계라고 받아들이며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잘못에 비해서 고난과 고통의 크기가 너무 클 때, 내가 그만한 잘못을 한 적이 없다는 확신이 들 때는 마음의 굉장한 어려움을 겪고 굉장한 영혼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워낙에 신앙이 좋았던 욥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고난과 고통이 끝날 줄을 모르고 더 심해지기만 하자 욥의 마음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렇게 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자신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친구들은 그저 당연한 이야기만 늘어놓다가 오히려 욥을 비난할 뿐 그 누구도 도움이 되질 못합니다. 욥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보여주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9장 20절인데요, 거기서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령 내가 의로울지라도 내 입이 나를 정죄하리니 가령 내가 온전할 지라도 나를 정죄하시리라”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 죄 없는 자신을 정죄했으니 이제는 나도 정의고 정직이고 간에 다 던져 버리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 밖에는 혼란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의로운 분이시라는 진리, 악인을 벌주시고 의인에게 상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진리를 거부하지 않으면 욥은 도무지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기는 다행히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기록하고 있어서 ‘아, 그래서 욥이 저런 고통을 당했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실제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뒤에 숨겨진 하나님의 생각을 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다 알수도 없고, 혹시 알 수 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작은 머리 속에는 절대로 다 들어올 수 없는 광대한 분이십니다. 욥이 그런 고통을 그렇게 오랫동안 당하고 또 주변사람들과 친구들로 부터 괴롭힘을 당할 때에도, 욥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현실이 너무나 달라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한 번도 나타나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나타타셔서 그에 대한 대답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나타나시는 곳이 바로 38장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느지막히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을 해결해 주시거나 위로해 주시지 않습니다. 폭풍우 가운데, 욥의 고난과 혼란을 닮은 듯한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대뜸 엄청난 질문을 퍼부으셨습니다. 38장 2절부터 시작된 질문은 내용상 41장 끝절까지 계속됩니다. 장수로 하면 4장 절수로 하면 128절이나 됩니다. 그런데, 그 질문들 중에는 욥이 긍정적인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애초에 이 질문들은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욥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질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들은 그 하나 하나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질문들은 단 하나도 욥 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두 개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펴서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정말 이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질문들이 원래 뜻하는 바는 이렇게 됩니다. “그러면서 너는 그 모든 것을 만들고 먹이고 움직여가는 나를 다 알려고 하느냐? 너는 나를 다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긴 질문을 통해서 욥은 드디어 깨닫습니다. 자신이 하려던 일이 얼마나 주제넘는 일이었는지 말입니다. 욥은 그 동안 자신의 경험과 고정관념 속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 있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 평안할 때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행하는 일입니다. 자신의 경험과 그 속에서 알게된 하나님, 또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워온 하나님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렇게 자기 머리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하나님의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이해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일을 당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 때부터는 혼란을 겪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실은 그 혼란 자체가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네가 나를 네 머리 속에 가두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네가 아는 하나님이 나의 전부인 줄 아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실은 하나님은 결코 내가 다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크신 분이심을, 나와는 전혀 수준이 다른 분이심을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은 우리 머리 속에 다 받아들일 수 없을만큼 크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는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보면 배운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고 또 반복되는 경험도 쌓여가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하나님은 이런 저런 분이시라는 고정관념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런 고정관념들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 우리의 경험이 그렇게 증명해 주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그게 하나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알려주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에게는 그만큼만 알아도 충분한 것이지만, 실제로 하나님께 대한 지극히 작은 일부분입니다. 고린도 전서 12장 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늘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말하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기서 어떤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알아들었을까요? 알아듣지 못했을까요? 알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말을 다시 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무지 말로 옮길 수 없는 그런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자로서 항상 너무 너무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너무 제한적이라는 것입니다. 말하고 싶은 것, 알려주고 싶은 것은 잔뜩 있는데, 꼭 전하고 싶은 감동은 엄청난데 표현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그럴 때는 정말 “아휴!”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이런 부족한 말 속에 하나님이 다 담길 수 있을까요? 이런 빈약한 말 속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다 담을 수 있을까요? 성경도 말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으로도 다 담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성경도 다 이해하지 못 합니다. 2000년이 넘는 세월을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머리좋은 학자들이 들러 붙어서 평생을 연구하고 또 연구해 오고 있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을 쏟아낼만큼 대단한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저는 앞으로 주님 오실 때까지가 들이 파도 다 알 수 없는 책이 성경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제한적이고 부분적인 지식만을 담아놓은 이 책도 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인데, 하나님의 전부를 다 알고 이해하며 하나님에 대해서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불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모르는 구석이 더 많은 분을 어떻게 믿고 신뢰하며 사느냐구요. 그런데 말입니다. 실은 하나님은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다 알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은 누구보다 작은 분일까요? 우리들보다 작은 분이십니다. 만약 그 분이 우리 머리 속에 다 들어오실 수 있다면 그 분은 무엇보다 작은 분일까요? 우리 머리보다 작은 분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런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나를 믿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적어도 나는 내 머리보다는 크니까요. 만약 하나님을 다 알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규정할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 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실제로 욥의 고난은 욥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을 배우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욥을 보내신 학교였습니다. 욥의 신앙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완전히 FM이었죠. 그런데, 그랬기 때문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FM들이 그렇듯이 그 틀 속에 하나님을 가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틀을 완전히 깨뜨리는 심각한 고난, 그리고 그 이후에 주어진 하나님의 질문을 통해 그는 자신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일을 말했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엄청난 크기와 절대적인 주권을 몸으로 경험하여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욥의 신앙은 용광로를 통과해서 자기 의와 하나님께 대한 고정된 생각이 제거된 제거된 정금과 같은 신앙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도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다 이해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온전한 주권과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인정하고 그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그 겸손함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겸손함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리에 머물면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보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그 크신 손 안에서 든든한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