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209to19 -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요한복음 79).pdf
날짜 : 2013년 2월 15일 금요일
본문 : 요한복음 12장 09-19절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결국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왔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열광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그 현장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와서 그 사실을 여기 저기 퍼뜨리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에 모였던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께서 다시 베다니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구름떼처럼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도 만나고 싶었지만 직접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만나고 싶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을 더 심하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해서 행위자 뿐만 아니라 그 증거까지 완전히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도둑질도 한 번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어렵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이들이 나사로 한 명쯤 더 죽이기로 결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이 이렇습니다. 악에게는 틈을 주면 안됩니다. 처음에는 작은 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만 잡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악으로 채워버리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작은 악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작은 죄라고 하찮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처음에는 다 그렇게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감당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잔치 다음날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셨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유대인들은 모두들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승리자의 상징이고 왕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이미 전쟁에 승리하고 개선하는 왕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수많은 이적들도 그렇지만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예수님께서 죽음마저 정복한 능력있는 왕이라고 믿게 하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길거리에 모인 사람들은 환호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제 드디어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가 온 것입니다. 죽음도 깨뜨릴만큼 강한 왕, 그래서 로마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고 또 다윗 시대의 영광을 회복시켜줄 왕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이 우려했던 바로 그 상황이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로마에 대한 반란의 모습을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도 그리고 그렇게 환호하는 백성들도 보지 못했던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또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예수님이 그렇게 승리하신 왕이라면,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려고 오신 그런 메시야라면 예수님은 나귀새끼가 아니라 말을 타셨을 것입니다. 전쟁과 힘을 상징하는 말을 타고 입성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끼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입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나귀로 예수님께서 왕은 왕이되, 메시야는 메시야이시되 자신이 어떤 왕이고 어떤 메시야이신지를 정확하게 보여주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지를 이해하지 못한 것은 군중들이나 지도자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는 제자들 또한 그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 이후에야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신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이후, 정확하게는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후에야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스가랴 9장 9절 말씀의 성취라고 알려줍니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백성들을 건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다 인용하지 않은 스가랴 9장 9절의 나머지 부분은 이 왕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이 메시야는 전사로 오셔서 자신을 드러내며 과시하는 왕이 아니라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왕, 그래서 새끼나귀를 타시는 왕이십니다. 나귀새끼는 주님이 공의와 구원을 베푸실 방법을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표지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고 또 세상에 공의를 가져올 방법은 힘과 전쟁의 승리를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겸손과 섬김을 통해, 그리고 자신을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내어주심으로써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주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우리 주님은 결국 그 일을 통해서 그 계획을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의 위대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방법, 그리고 누구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그런 방법을 통해서 온 세상을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실패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과 교회들이 정말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전히 모든 것을 세속적인 힘의 논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그럴 듯한지 모릅니다. 인간의 욕망과도 부합합니다. 그래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아 넘어갔습니다. 심지어는 그렇게 가르쳤던 목회자들 스스로도 속아 넘어갔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높은 곳으로 가야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소위 ‘고지론’이라는 것을 주장했고 결국 스스로도 모두가 우러러 보는 높은 곳에 올랐지만 세상을 변화시키기는 커녕 그 고지에서 자신이 가장 추하게 떨어져 내려서 기독교 전체를 욕먹이고 믿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찌꺼기처럼 여겨지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 이야기에 속아 높은 곳으로 올라간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지만 그들 또한 한 번 오른 높은 곳에서 내려오기 싫어서 바둥거릴 뿐 스스로도 변화되지 못하고, 더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 오히려 세상을 닮아가고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없으셔서 겸손한 섬김과 자신을 대속물로 내어주시는 죽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지만 그 전능하심이 아니라 무력함으로, 낮아짐으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심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나귀새끼를 타신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배워야 할 성도들이 세상을 이기는 방법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해서 의미있는 삶을 살고, 또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에 충실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힘을 가져야 하고 높아져야만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힘도 주시고 높여주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그것을 도구 삼아 일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내 힘과 소유를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무지한 교만입니다.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교회와 사람들은 그런 것들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무너져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것이 없어도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고, 그런 것이 없다고 해서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순종해야 하며,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을 의지해야 합니다.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항상 악이 틈타게 되어 있습니다. 힘을 얻기 위해 악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 악에 휘둘리게 됩니다. 그러나 낮아짐의 방법, 겸손의 방법은 그럴 염려가 없습니다. 낮아짐과 겸손은 사탄이 가장 꺼리고 또 사탄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귀 그것도 새끼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 위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 내어주신 분이 죄악의 견고한 진을 완전히 깨뜨리셨습니다. 그 누구도 끊을 수 없었던 죽음의 쇠사슬을 단번에 끊으셨습니다. 그렇게 최고의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항상 겸손한 순종이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가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낮아짐과 내어줌이 하나님의 손에 들린 가장 강한 무기가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새끼나귀를 타신 왕의 뒤를 따르는 겸손한 백성이 되어 그 분이 이기신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참으로 능력있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