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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2.27. 수요저녁 -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립보서 23)

빌0317to21 - 함께 나를 본받으라(빌립보서 2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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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2013년 2월 27일 수요일

본문 : 빌립보서 3장 17-21절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저같은 목사들을 가장 심각하게 기죽이는 사람이 누누일까요? 그 사람은 로버트 슐러도 아니고, 조용기 목사도 아니고,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기록한 성경 속에서 보게되는 목회자로서의 바울의 마음과 생각, 태도, 기도, 수고, 고난, 기쁨, 소망, 믿음, 헌신,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 등을 볼 때, 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저와 같은 목회자들은 정말 기가 죽다 못해서 절망적이 되고 때로는 설교를 할 용기마저 잃게 될 때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첫 구절부터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 기를 죽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나를 함께 본받으라, 너희는 나를 함께 본받으라” 세상에 어느 누가 거리낌 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삶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있고 거리낌이 없으면 주저없이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정말 한 사람의 성도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목회자요 전도자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열심, 희생, 헌신이나 고난과 같은 신앙의 무거운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기쁨이나 감격, 감사나 자유같은 가볍고 즐거운 부분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모든 면에서 그 누구보다도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너희는 나를 함께 본받으라.” 이 말은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을 주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는 감히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너무나 당당하게만 들리고 심지어는 교만하게 들리기까지 하는 그런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바울이 이 말을 할 때 그는 굉장이 아프고 절실한 심정이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내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칫 하면 복음이 주는 특권과 유익, 그리고 기쁨을 모두 놓쳐버릴 지경에 처해있었기 때문에 그것 막기 위해서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결코 지금 자신의 모든 면을 본받으라고, 단순히 숭고한 삶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 자신의 딱 한 가지 면만을 흉내내고 닮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울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이었고, 기뻐하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평생을 두고 추구하는 목표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힌 바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도 바울에게는 예수님이 모든 것이었고, 예수님 안에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이 있었고 그래서 바울은 온통 예수님에게 사로잡혀 있었고 더 사로잡혀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항상 이 목표를 향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추격하듯이,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앞에 있는 결승점을 향해 손을 뻗고 전력질주하듯이 달려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할 때, 본 받으라고 한 내용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과 성품의 모든 면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든 것으로 삼고 최고의 보배로 여기며, 최고의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고 그리스도를 더 온전히 알고 더 온전히 소유하며 예수님께 온통 사로잡히기 위해서 살아가는 그 부분을 흉내내고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여 우리들에게도 바울의 이런 부분을 본받고 싶어하는 열정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 너무 좋고 너무 너무 만족스러우며 너무 너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정말 정말 사랑하고 아꼈습니다. 그런 바울이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않은 것, 좋은 것, 만족스럽지 않은 것을 추천할리가 없습니다. 그런 것을 하라고 요구할리가 없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것만 주고 싶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리고 두번째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그리스도를 놓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은 모든 것을 놓치게 됩니다. 구원도 놓치게 되고, 기쁨도 놓치게 되고, 소망도 놓치게 되며, 하늘나라와 영광도 놓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그 분 안에 담겨있는 그 분과 한 덩어리인 복들이기 때문입니다. 복만 취하고 예수님은 취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서 살고, 예수님을 더 온전히 가지기 위해서 살고, 온전히 예수님께 사로잡히기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명령. 사도 바울을 흉내내며 살아야 한다는 명령은 그 때 빌립보의 성도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중요한 명령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바울처럼 기뻐하지 못하고, 바울처럼 힘있게 살지 못하며, 또 바울처럼 복되고 능력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정작 예수님은 붙잡고 소유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주시는 것들만을 붙들려고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성공할 수 없는 시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바울같이 만족하며 행복하며 소망넘치는 힘있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을 모두 받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절대로 예수님을 놓치면 안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분을 꼭 가져야 합니다. 그 분 안에 내가 받기를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을 놓치면 모든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목표지점을 향해 가는 방법이 단 한 가지 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면 그리로 갈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그저 “그리로 그냥 죽 가면 돼!”라고 말해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사람이 나타나서 “그 길 보다는 이 길이 더 좋아. 이 길이 더 빨라.”라고 주장한다면, 그런데 그 길은 절대로 가면 안되는 길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얼른 길을 물었던 사람을 찾아가서 “아니야, 내가 가르쳐 준 길이 맞아. 길은 하나 밖에 없어. 내가 가르쳐 준대로 가야해. 내 말이 맞으니 나만 믿어.”라고 말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빌립보의 성도들이 하나 밖에 없는 좋은 길을 걸어가고 있고, 그 길에 대해서 다른 주장, 그러니까 틀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았습니다. 3장 2절에 나오는 것처럼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나왔고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슬슬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 안에서 얻은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는 심각한 일로 이어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정확한 틀림없는 길을 다시 가르쳐 주어야만 했고 결국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다수’에 대해서 매력을 느낍니다. 많은 수가 가면 옳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수가 선택하면 무언가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여기고 자기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 또한 신앙적인 일들이나 혹은 교회들의 모습을 볼 때도 그런 기준을 가지고 평가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수가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그리로 가고, 또 많은 사람이 따르면, 겉으로 보기에 잘 되어가면 그냥 그것을 옳은 것이라고 믿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많다는 것과 옳다는 것, 잘 되는 것과 바르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은 서로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갔던 길이 맞습니까, 아니면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라고 표현된 사람들이 갔던 길이 맞습니까? 사도 바울이 맞습니다. 그러면 그 당시 사도 바울과 같은 길을 가는 사람들이 다수였을까요?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을까요? 뒤쪽에 속하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그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성도들도 다수가 가는 길이고, 다수가 주장하는 길이니 그 길이 맞다고 생각하고 자꾸 그리로 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의 길로 행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느니라” 바울은 근거없이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명확한 판단기준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 속에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주신 은혜와는 정반대가 되는 모습들을 보고 있었으며 그래서 그들을 십자가의 원수라고, 반대자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얼핏 보면 바울이 비난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타락한 사람들 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바울이 비난하는 사람들은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며 자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고를 구원의 조건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음식이 들어가는 그들의 배가 그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또 할례를 받고 안받고를 하나님의 자녀와 백성이 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헬라인들이 가장 부끄럽게 생각하는 할례를 자신의 자랑거리요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만 구원 얻는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마지막은 멸망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사람들을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생각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얼마나 거룩한지 모릅니다. 얼마나 경건한지 모릅니다. 남들이 먹는 거 안 먹고, 남들이 안 하는 거 철저하게 지키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을 구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런 것들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 하늘나라의 일등시민이 되기 위한 자신들의 자랑거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보시에게 자랑거리를 찾고 또 자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은 하늘에 속한 것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땅에 속한 것을 구하는 삶입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은혜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땅에 묶여서 땅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늘이 아니라 땅에 속한 사람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사람들의 마지막을 구원이 아니라 멸망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이니까요. 


사실 타락한 인간에게 자랑하고 싶어하는 욕망만큼 크고 강렬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 어찌보면 인간의 삶의 가장 큰 동기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욕망,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는 욕망으로부터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자랑과 싸우는 것보다 힘들고 지루한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반드시 자기 자랑과 싸워야 합니다. 적어도 십자가를 붙드는데는 지장이 없을 정도로는 처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좋은 것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자기 자랑과 싸우려면 자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싸울 의지가 생기니까요. 사람들은 자랑거리가 있고 자랑을 하면 행복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랑거리를 만들고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입니다. 자랑을 할 때는 얼마나 짜릿한지요. 우쭐해진 느낌이 얼마나 기분 좋은지요. 그러나 그 때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족은 착각에서 오는 만족에 불과합니다. 왜 자랑합니까? 남에게 인정받기 위해서죠? 그런데, 내가 자랑할 때, 사람들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나를 진짜로 존중해 줄까요?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줄까요?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내 앞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때, 내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금새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 앞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때, 그 사람이 존경스러우셨나요? 높이 우러러 보이셨나요? 아니죠.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별로 였죠? 그 사람이 별로 가치없는 사람으로 여겨지셨죠? 그런데 왜 내가 자랑할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나를 칭찬하고 나를 높여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마 그 자랑을 듣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차린다면 절대로 우리는 그 사람 앞에서 자랑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러움이 만들어 내는 질투나 살 뿐이지 자랑거리를 만드는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별로 나를 존중받게 하는데 효과가 없습니다. 자랑거리를 만드는 일로는 진짜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진짜로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자랑은 사람들의 저울에서 점점 더 나를 가볍게만 만들어갈 뿐입니다. 


둘째로 자랑은 우리를 땅에 있는 것들에 얽매이게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 모릅니다. 땅에 얽매여 있는 한 그는 하늘에 속한 것들을 진실로 소망할 수도 없고 맛보아 알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랑하면서 살려면 계속해서 자랑거리를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돈의 팔촌을 동원해서라도 자랑거리를 쥐어 짜내야 하죠. 그런데, 이런 자랑거리는 땅에 속한 것들이고, 이런 자랑이 그나마 통하는 곳도 땅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랑거리를 늘어놓고 그것을 통해 인정을 받으려면 땅에 속한 사람들 틈에 섞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랑은 성도로 하여금 계속 땅에 묶여서 땅만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성도에게는 이것만큼 큰 손해가 없습니다. 신앙이 주는 진짜 복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늘에 속한 것들인데 그것을 알지도 누리지도 못하게 원천봉쇄 당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자랑은 땅의 행복도 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랑은 하늘의 복도 가려버립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렇게 버리기 힘들어 하는 자랑의 실체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자랑하면 행복해지고, 자랑거리가 많으면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입니다. 잠깐의 부풀려진 풍선같은 짜릿함을 미끼로 우리를 속이는 속임수 입니다. 우리가 이 속임수에서 깨어날 때, 그리고 자기 자랑과 기꺼이 싸움을 벌이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땅의 행복도, 그리고 하늘의 복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 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땅에 대한 집착, 자랑거리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려면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과 가치를 두고, 거기 무게를 실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자꾸 우리에게 달라붙으려는 땅에 속한 자랑거리들과 싸우는 첫번째 방법입니다. 바울은 먼저 우리에게 이것을 절대로 잊지말라고 당부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땅에 살지만 우리들은 하늘나라의 시민이라고 말입니다. 마치 그 당시 식민지에 살았던 로마시민들이 어떻게 하면 로마의 명예를 높이고 로마의 명예로운 시민답게 살까를 고민하며 그렇게 하는 것을 자신들의 삶의 가치로 삼고 살았듯이 우리들도 땅에 살지만 어떻게 하면 하늘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늘나라 시민답게 영광스럽게 살아갈까를 고민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땅의 시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게 뭐죠? 주민등록증이죠. 그런데, 이게 우리의 진짜 주민등록증일까요? 아닙니다. 이건 진짜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시 거주 허가증이고 우리의 영원한 주민등록, 우리의 영원한 호적은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단지 여기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 하나님을 보여주며, 하늘나라를 모르는 자에게 그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주며 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백성의 긍지를 잃어버리지 않고 명예롭게 사는 것, 천국 시민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여기 사는 진짜 목적입니다. 그런 우리가 땅의 것들을 구하며, 그런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는 삶을 살아간다면 하늘나라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영영 닫힌 나라가 될 것이며, 우리들 또한 우리의 영광스러운 신분을 잊고서 그들 틈에 끼어서 땅에 매여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20절 후반과 21절입니다. “거기로 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바울이 두번째로 추천하는 자랑과 싸우는 방법은 우리 자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자존심을 회복하라는 주문과도 같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치만큼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도둑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가치를 도둑질이나 해도 될만큼 밖에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돈만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자신의 가치를 돈보다도 못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전에 제가 아프리카의 한 흑인 의사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렵사리 의학을 공부하고 대도시에서 개업을 해서 잘 나가던 흑인 의사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지로 들어가서 고생고생을 하면서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을 알게 되어 당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물론 큰 도시에서 호의호식하며 깨끗한 환경에서 화려하게 살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제 인생이 그러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왜 선교사가 됩니까? 왜 다 내려놓고 목숨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험한 곳으로 갑니까?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이 가장 중요한 이유이겠지만 그 분들은 사실 자신의 가치를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그렇게 고상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들입니까? 그것을 아십니까?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여러분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것을 기준으로 여러분의 삶의 모양을 결정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 몸은 그 날이 되면 예수님의 몸처럼 빛나고 영광스러운 몸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주님처럼 변화될, 예수님의 영광으로 덧입혀질 그런 지극히 영광스러운 존재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진짜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영원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이 땅에서 자랑거리나 찾아다니고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또 그런 것들이 없으면 기가 죽고 시무룩해진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정말 우리 주님처럼 영광스러워질 우리들에게 얼마나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까? 


우리가 미래의 우리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마음에 그릴 수 있다면 땅에 속한 것들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자존심이 상해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자신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땅의 허무한 영광의 유혹을 이기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방법은 하늘의 영원하고 무한한 영광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도 우리의 마지막 모습, 주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될 그 모습을 마음에 그리며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임을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자랑은 예수님을 놓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서 오는 온갖 좋은 것들, 가장 복된 것들을 죄다 놓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자랑을 이겨내고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 분을 소유하고 온통 그 분께 붙들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어디 소속인지 분명해야 합니다. 어느나라 사람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살지만 그 나라 사람으로 그 나라 사람답게 살아가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왕되신 하나님과 그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또 그러려면 내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결코 이 땅의 허무한 영광이나 탐내면서 살만큼 가치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자존심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주님을 붙으십시오. 땅의 자랑거리들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권을 내밀며 사십시오. 그리고 영광스러운 성도의 자존심을 회복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해 하늘에 속한 온갖 좋은 복들을 다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기쁘고 충만한 복을 챙겨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