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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3.20. 수요저녁 -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빌립보서 26)

     

빌0408to09 -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3).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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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 빌립보서 4장 8-9절

      우리 안에 하나님의 평강이 있을 때, 그 때에만 우리는 꽉차고 흔들림 없는 참된 기쁨,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기쁨과 평강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굳건한 평강이 없이 든든한 기쁨이 있을 수 없고, 기쁨이 없는 사람 속에 평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참된 기쁨이란 항상 참된 평강이 그 사람 속에 있다는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복된 신앙생활이란 평강이라는 터 위에 서 있는 기쁨이라는 집에 거하는 삶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이라고 부르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마음에 흔들리지 않는 평강을 품고 끊임없는 기쁨 가운데 거하는 삶.... 이것이 성도만 누릴 수 있고 또 놓치지 말고 누려야 하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최고의 복들 중의 하나임에 분명합니다. 다른 복 모두 없어도 이 복만 있으면 복되게 살 수 있지만 다른 복이 모두 있어도 이 복이 없으면 복되게 살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모두가 이 복을 알고 또 자기 것으로 삼아서 누리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수요일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흔들리지 않는 평강 가운데서 기쁨을 빼앗기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지 하는 것을 4절부터 7절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관용과 기도가 바로 그 방법이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게 되는,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그래서 기쁨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란 따지고 보면 “사람”과 “일” 밖에 없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 이 두 가지를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배우면 우리는 항상 기뻐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 방법이 바로 관용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와주심 속에서 최선을 다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용납하려고 노력하며 실제로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근심과 염려 를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나오는 감사의 기도로 바꿀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없는 평강 가운데 거하게 하셔서 다시 기쁨을 되찾게 하시고 다시 기쁨을 누리게 해 주십니다. 아무리 기뻐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말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용납하시는 일에 나를 넉넉하게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상 줄 사람에게 상 주시고 벌 줄 사람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믿음, 또 하나님이 모든 근심보다 더 크신 분이심을 실제로 믿는 믿음이 있을 때, 거기서 관용이 나오고 감사의 기도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조각 퍼즐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시죠?  하나의 그림을 수백, 수천 조각으로 나누어 놓고 다시 처음 그림으로 맞추어 가는 놀이도구가 바로 조각퍼즐입니다. 이 퍼즐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시키려면 두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바로 조각들을 제 자리에 찾아 넣을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지만, 퍼즐이 그렇게 조각나기 전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게 해 주는 원본 그림이 꼭 필요합니다. 원래 어떤 그림이었는지를 모르면 아무리 천재라도 전체 퍼즐을 복원시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함께 살펴보고 있는 내용들을 이 퍼즐 맞추는 일에 비유해 본다면, 지난 수요일에 함께 묵상했던 관용과 기도는 우리가 살면서 만나게 되는 어떤 개인이나 하나 하나의 사건이라는 조각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틀이 되는 원래의 큰 그림인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 틀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큰 그림을 항상 기억하면서 인생 속에서 맞닥뜨리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관용과 기도로 제자리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우리는 성도로서의 온전한 삶이라는 아름다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은 것들은 버리면서 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삶은 이런 취사선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욕망과 생각입니다. 처음에 무엇을 원하게 만드는 것은 욕망입니다. 우리가 “하고 싶다”, “가지고 싶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욕망이 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취사선택하게 하는 역할은 생각이 합니다. 그러니까 욕망이 원하는 것에 대해서 “된다.”, “안된다.”라고 말해 줌으로써 어떤 행동을 하고 하지 않고를 결정하고, 어떤 물건을 취하거나 버리는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하는 것은 생각이 하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 욕망과 생각의 질서가 바로 잡혀 있을 때, 사람들은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선택하면서 건전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둘의 관계와 질서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어떤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생각이 최종 권위자가 되어야 하는데, 욕망이 최종 권위자 노릇을 하게 되면 하지 말아야 할 선택, 해가 되고 죄가 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하지 않고 욕망이 지시하는 대로만 선택하거나, 생각을 하더라도 욕망을 합리화시키고 그 욕망을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쪽에서만 생각을 사용하게 되면, 인간은 욕망에 끌려다니며 살게 되고, 그것이 바로 사람다움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하고 행동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생각이 본능적인 욕망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있고, 또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때문에 아주 아주 중요해 지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욕망을 다스리는 권위자가 되게 한다고 해도 생각의 내용이나 주된 관심사가 잘못되어 있다면 오히려 그 생각이 더 잘못된 길로 사람을 인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려는 순간, 내 본성 속의 양심이 그 일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합니다. 그래서 단념하고 돌아서려는데, 이번에는 생각이 나를 꼬득입니다. 괜챦다고, 뭐가 어떠냐고, 소심하게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러냐고, 남들 다 하는 일인데 뭐 너만 그렇게 까다롭냐고 말입니다. 그래서 자꾸 생각하다가 결국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그 일을 행하게 됩니다.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오히려 그 생각 때문에 더 잘못된 길로 가게되는 케이스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생각이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내용으로 삼고 있고, 마땅히 생각하고 따라야 할 것에 대해서는 희미하고 불확실한 태도를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택하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그럴 때 그 생각이 진짜 도움이 되는 생각이 되려면 그 생각이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이 선하고 올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주로 생각하는 것을 “관심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사고방식”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갑자기 맞닥뜨리는 순간에 어떤 것을 선택하게 하는 것은 평소의 그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느냐,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 왔느냐 하는 입니다. 사람들은 급한 순간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동적으로 마음과 생각 속에 나 있는 길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른 것을 선택하고 참으로 유익한 것을 선택하려면 생각을 하되, 꼭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할 가치가 있는 것,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 따를만한 가치가 있는 기준..... 그런 것들 말입니다. 우리는 평상시에 그런 것들이 관심사가 되고, 사고방식의 원리들이 되도록 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면서 선택의 순간에 처하게 될 때 진정으로 유익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지금부터 이야기하는 것이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으로 그것을 당부하는데, 이것만큼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바울이 8절에서 길게 적고 있는 것들은 누가보아도 좋다고,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선하고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바울의 결론적인 당부는 바로 그런 것들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에 주된 관심을 두고,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그런 것들에 생각을 고정시키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이런 것들이 선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도라면 그렇게 선하고 가치있는 것에 관심과 생각을 고정하고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흔들리지 않는 평강 속에서 참된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기쁨은 참된 묵직한 기쁨, 우리 삶의 무게중심이 되어 줄 수 있는 기쁨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벼운 기쁨, 그래서 쉽게 흔들리고 날아가 버리는 기쁨, 모양만 비슷한 모조품 기쁨이라면 굳이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법을 통하지 않더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아주 죄악되고 욕심을 따라가는 방법을 통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 그런 기쁨입니다. 사람들이 죄를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족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기 싫은데, 아무런 만족도 없는데, 그저 자기를 괴롭히기 위해서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억지로 죄를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죄 자체가, 아니면 적어도 그 죄가 가져다 주는 다른 만족 때문에라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은 그렇지 않습니다. 참된 기쁨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참된 것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을 통하지 않고는, 진리가 아닌 것을 통해서는 절대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송아지는 암소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습니다. 강아지는 어미 개만 낳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것은 참된 것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습니다. 가치있는 것은 가치있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것을 원한다면 참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기쁨을 원한다면, 참된 평강 가운데서 흔들리지 않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참된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장 눈에 보기에는 참된 것 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좋아보이고, 가치있는 것보다는 그렇지 않은 것이 훨씬 더 큰 만족을 줄 수 있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참되고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려면 그러한 보이는 것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참된 가치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따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참된 가치들 보다는 눈에 보이는 참되지 않은 것들의 유혹이 훨씬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선한 것과 참된 것은 우리를 유혹하는 법이 없습니다. 억지로 꼬득이고 속이는 법이 없습니다. 참된 가치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면서 자신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중고책방 책더미 속에 섞여있는 희귀한 고문서처럼, 고물들 속에 뭍혀있는 고미술품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손쉽게 속된 것들을 따라가고, 정말 가치있는 것들에는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것들을 생각하라”, “계속해서 선하고 참된 것들만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고 참된 것들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그런 것들만 생각하며, 추구할 때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선택해야할 순간은 대개는 예고없이 찾아옵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저 본능적으로 택할 시간 밖에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참된 것을 선택하고, 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 나를 실망시키고 힘들게 하는 행동들은 눈 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집니다. 관용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를 근심하고 걱정하게 하는 일들은 갑자기 우리들을 습격합니다. 그래서 감사함으로 기도하려는 생각, 그렇게 그런 일들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려는 생각보다는 갑작스런 실망과 근심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대개는 한참을 거기 빠져 허우적 거리며 이리저리 휘둘린 후에야 기쁨에 있어 파산해 버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상시에 무엇을 생각하며 사느냐,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평상시에 가치 없는 것들, 당장 나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것들, 나를 기분좋게 하는 것들만 생각한 사람이 갑자기 닥친 가장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참으로 자신을 유익하게 할 것을 의지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평상시에 그것이 당장 이익이 되지 않고, 유쾌하게 해 주지 못하지만 참된 가치가 있는 것들을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삼고 생각을 채우는 연습을 해 온 사람들은 그런 위급한 순간, 본능적인 반응을 보이고 스스로 속기 쉬운 순간에도 자신을 참되고 영원한 평강과 기쁨 가운데로 인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들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각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래도 생각만으로는 안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각은 그저 생각에서 그치기 쉽고 생각과 존재, 그리고 생각과 삶은 전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생각하면서 이 사실을 너무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대학시절 내내 신앙 안에서 바르게 생각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말도 바른 말만 했겠죠. 그런데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나서 직장을 찾다가 문득 발견했던 것은 제가 찾는 직장이 그저 돈 많이 주고 일은 적은 편안한 직장이었지 하나님의 뜻이나 다른 가치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아픔은 정말 깊고 컸지만 그 일로 인해서 저는 항상 제 생각이 저 자신과 다를 수 있다는 것과, 진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삶과 존재라는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좋은 것들을 생각하는 일은 분명히 선한 삶과 아름다운 존재를 위한 씨앗입니다. 그렇지만 그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나가게 하려는 애씀, 우리 식으로 말해서 순종이 없으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것들, 선한 것들을 생각하는 우리의 생각은 그런 것들을 삶으로 옮겨내려는 순종이 있을 때에만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 든든히 세워주는 역할을 하며, 우리에게 참된 기쁨을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생각에서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계속해서 예수님을 흉내내며 살았습니다. 생각과 마음 뿐만 아니라 선택과 행동 또한 최대한 예수님을 흉내내려고 애썼습니다. 실제로 관용과 감사의 기도는 예수님의 생활방식이었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항상 선하고 가치있는 것들만 들어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4장에서 우리에게 추천하는 기쁨의 비결은 모두 바울이 예수님께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으며, 또한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복음,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에 대해서 말해 주었으며 그 복음에 합당한 삶,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내는 삶을 살았고 빌립보의 성도들은 바로 그 일의 생생한 증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대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위한 새로운 방법이나 특별한 비결을 찾으려고 애쓸 것 없이, 자신이 예수님께 배운 대로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아서 항상 기뻐할 수 있었듯이, 너희들도 나에게 배운 대로 나를 흉내내면서 살아서 내가 누린 예수님의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관용과 믿음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처럼 용서하고 감사로 기도드리는 삶을 살아서 항상 평강의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가운데 살아가라고 추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퍼즐을 평강과 기쁨 위에 세우진 완성된 작품이 되게 해 줄 수 있는 큰 그림은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모든 선한 것들, 모든 가치있는 것들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참된 가치를 두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참된 평강으로 인도해주는 큰 그림입니다. 우리는 이 그림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 속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기억하고 또 기억하며, 생각하며 또 생각해야 합니다. 성도라면 성도로서 자신의 생각을 채울 참된 가치, 그래서 참된 기쁨과 평강의 근원이 될 만큼 그렇게 참되고 그렇게 선한 것만 생각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아무리 급한 순간에라도 그런 가치들의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평상시에 생각을 그런 것들에 고정시키는 연습을 부지런히 해야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참되고 선한 가치들로 생각의 큰 틀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들이, 가치없는 것들이, 모조품들이 우리 생각 속을 비집고 들어올 것이고 우리가 그런 것들에 휘둘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짜 기쁨과 진짜 평강은 흔들리고 빼앗겨 버리게 됩니다. 그러나 생각은 반드시 행함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그 생각과 마음,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따라서 살아가는 순종의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쁨, 사도 바울의 기쁨은 선한 생각과 마음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쁨은 두 분이 그런 생각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비로서 얻어진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가 두 분이 누렸던 평강과 기쁨을 누리려면 두 분의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항상 선한 것들, 참된 가치만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에 마음과 생각을 고정시키는 연습을 게을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과 생각으로 예수님을 흉내내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런 성도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해 주시는 아주 특별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그러셨고, 바울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한 것들, 참된 가치 위에 든든히 삶을 세워가며, 참된 평강과 기쁨을 누리는 지혜로운 삶의 건축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