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8028to32 -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요한112).pdf
본 문 : 요한복음 18장 28-38절
안나스에게 심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가야바에게로 보내지셨습니다. 그런데, 가야바 앞에서 일어난 일에서 요한복음은 거의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가야바의 경우도 안나스의 경우와 거의 같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또한 예수님을 책 잡을 꺼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마 오히려 챙피만 당했겠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합니까? 예수님을 놓아주어야 마땅합니다. 혐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악이란 자신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서 선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극악해 집니다. 악인들은 고상하게 시작했다가도 자기 앞이 막혀버리면 그 때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제 예수님은 적법한 재판절차가 무시된 채로 악인들의 손에 직접 죽음을 향해 던져지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야바에서 이제는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을 끌고 갔던 사람들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율법적으로 정결을 유지해야 유월절 식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끌고 갔던 유대인들은 로마 공관의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참 아이러니한 모습입니다. 지금 그들은 무슨 일을 하고 있습니까? 제대로 재판절차도 거치지 않은 예수님을, 그것도 변변한 죄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빌라도에게로 데리고 왔습니다. 빌라도는 바리새인이나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정말 상종도 하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스로 거기까지 찾아 갔습니다. 그 이유는 재판을 해 달라고 하기 위해서 아니었습니다. 그저 예수님을 죽여달라고 요구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이것은 두 사람이상의 증인이 없는 재판을 통해서는 그 어떤 판결도 내리지 못하도록 한 자기들의 율법을 스스로 완전히 부정하는 일이며, 평상시라면 자존심이 상해서 절대로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은 가장 큰 불법을 행하면서 동시에 그 일에 손을 대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그 일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피하려고 엄청난 죄와 위선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자신의 정결함과 거룩을 걱정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 로마의 관정으로 들어가는 일까지 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을 가장 심각하게 더럽힌 사람들, 가장 큰 불순종을 저지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부정해지는 것을 피해보려고 빌라도의 관정으로 들어가지 않고서 밖에서 서성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미 온 몸을 진흙탕에 빠뜨린 사람이 손 더러워질까 걱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이미 영적인 분별력을 잃어버린 그들 자신은 모르고 있지만 말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부정한 것들과 접촉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주신 이유는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거룩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이란 실제로 죄와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그저 몸을 더럽히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그 법을 오해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편의대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정결예법이나 율법에 대한 해석은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엄격했지만 실제로는 걸러내기 쉬운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도 삼키고 싶은 낙타는 삼킬 수 있게 해 주는 그런 법을 만들어 내었고, 겉으로 그 법들만 지키면 깨끗할 수 있다고, 또 금지된 것들과 접촉하지만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더러운 것과의 접촉을 피하라고 하였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의 진짜 의미였습니다. 겉사람의 거룩함을 위해서 그렇게 조심해야 한다면, 속사람의 깨끗함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힘쓰고 애써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위해서 주신 것이 바로 그런 법이었던 것입니다.
거룩은 우리의 겉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무엇을 하고 안하는 것보다는 그런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게하는 마음의 생각과 동기가 더욱 중요하고, 그 생각과 동기를 정결하게 하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내 속에서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나를 그리고 내 주변을 어떻게 더럽히고 있는지를 잘 체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거룩할 수 있습니다. 나를 거룩하게 할 수 있고, 또 세상을 거룩하게 할 수 있습니다. 거룩이 힘든 것이 행동 뿐만 아니라 이렇게 그 행동의 동기까지 체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거룩해지지 않은 속사람 속에서는 계속해서 더러운 것만 흘러나올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속사람의 거룩함에 신경쓰지 않고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빌라도의 관정으로 끌고 갔던 유대인들처럼 이상한 모양으로 살아가게 될 수 있습니다. 정작 속사람은 다 망가져 가고 스스로 더럽게 만들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보이는 형식적인 행동만으로 자신의 거룩함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제 경험으로는 그렇게 되기가 굉장히 쉽습니다. 이미 한국 교회가 그런 이유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런 모양이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이미 한국 기독교 안에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속사람의 순결함에 대해 진실로 걱정하는 사람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그저 형식적으로 몇가지 정해놓고 그것만 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교회안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도 변화시키셔서 하나님의 참된 백성을 만들 것을 알고 또 기대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사람들이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늘어만간다는 것은 한국교회의 심각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자기 속사람을 살피고 동기와 생각을 체크하는 일이 굉장히 힘들고 괴롭습니다. 그러나, 그 일만큼 복된 일은 없습니다. 내 속 사람이 바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보는 일, 그리고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더 아름다워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정말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오랫동안 해도 그 일이 완전히 편하고 익숙해지지는 않지만,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노력들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조금씩 조금씩 바로 서게 해 주며, 또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씩 더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영혼이 그것을 느낄 때, 우리 영혼은 다른 일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알게 됩니다.
새벽기도에 오셔서 기도드리실 때, 많은 시간을 자신의 속사람을 살피는데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을 여러분의 속사람을 거룩하게 하며 아름답게 가꾸는 영혼을 위한 단장시간으로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살피시며, 겉으로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바로 그 마음과 생각이 거룩해지고 정결해 지도록 조목 조목 살피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기도와 애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를 정결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도 모르게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집어삼키는 그런 사람이 되는 가는 것을 방지해 줄 것이며, 더불어 내 주변도 거룩해지게 할 것입니다.
속사람이 거룩해지는 복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혼이 정결해지는 기쁨을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항상 자신의 영혼을 잘 챙기셔서 점점 더 빛나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빚어져 가며 주님 앞에 날마다 더 거룩하게 서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