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0525to34 -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마가24).pdf
설교본문 : 마가복음 5장 25-34절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죽어가는 딸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야이로의 집으로 가시던 중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순서로 보면 야이로의 딸 이야기가 먼저 나오지만 우리는 이 여인의 이야기부터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서 야이로의 딸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이 우리가 전체 이야기를 이해하고 또 말씀의 은혜를 함께 나누는데 더 유익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함께 살펴보는 마가복음을 포함한 복음서들은 원래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인가를 제대로 알려주고 또 믿게 하기 위해서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하늘나라의 복음과 하늘나라를 가져온 분으로 소개하며, 우리에게 그런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복음서가 기록된 목적이죠. 그런데, 복음서는 이런 목적 이외에도 아주 중요한 목적을 하나 더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다면 그런 예수님을 성경이 이야기하는대로 믿을 때, 그 믿음이 우리 삶에 가져올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복음서의 놀라운 기록들은 우리에게 참된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알게 해주고 또 믿게 해주는 영적인 유익을 주지만, 그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복음서는 우리에게 아주 놀랍고 실제적인 유익을 줍니다. 물론 이런 유익을 얻으려면 한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 옛날 예수님을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큰 은혜와 구원을 경험했던 그 사람들의 믿음을 닮아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도 보겠지만, 예수님을 만났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구원을 경험했던 것이 아닙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옆에서 예수님을 밀치고 만지고 했어도 그들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예수를 믿고 똑같은 교회 안에 있어도 평생 별다른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단지 몇 년동안, 혹은 그것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 예수를 믿었는데도 삶이 변화되고 성품이 변하며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것은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다른 씨앗에서는 다른 열매가 맺일 수 밖에 없듯이 믿음이 다르니 은혜가 다르고 그래서 사는 것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일과 다음 주일에 두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을 거울 삼아 우리의 믿음의 모습을 비춰보고 또 우리의 믿음의 모양과 방향을 바로잡아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이 두 이야기로부터 정말 실제적이고 놀라운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다시 호수 건너편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귀신들려 아무도 손도 대지 못할 정도로 미쳐있던 그 사람을 거라사 지방의 선교사로 세워놓고 다시 미친듯이 날뛰며 예수님과 제자들을 삼키려고 했던 갈릴리 바다를 건너 돌아오셨습니다. 그렇게 자연이 미친 것과 사람이 미친 것을 제 자리로 돌려놓으시고 예수님도 제 자리로 되돌아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 마자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무릎을 꿇고서 거라사 지방 사람들처럼 자기 고장을 떠나달라고 간청한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집에 병들어 죽어가는,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를 따라 야이로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예수님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는 통에 걸음을 재촉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야이로의 마음은 얼마나 급하고 또 다급했을까요?
그런데, 이런 야이로의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문득 예수님께서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십니다. 또 아주 황당한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 날 예수님이 다른 날 입지 않으셨던 비싼 명품 옷을 입으셨던 것이 아닙니다. 몸에 손만 대면 신경질 내면서 싸우려고 들었던 제 친구처럼 자기 몸에 손을 대는 것을 아주 아주 싫어하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신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앞으로 나아가실 수 없을 정도로 에워싸 밀고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게다가 지금 촌음을 다투는 화급한 일을 앞에 놓고서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되묻습니다. “예수님 지금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옷을 누가 만졌는가가 왜 중요합니까? 그리고 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졌는데, 누가 만졌느냐고 물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은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계속 두리번 거리며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 때 여인 하나가 자수를 합니다. 그리고는 자초지종을 다 이야기합니다.
이 여인은 지난 12년 동안 혈루증이라는 난치병을 앓아왔습니다. 그 12년은 이 여인에게는 지옥같은 세월이었습니다. 그 동안 용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다녀 보았습니다. 그 의사들 중에는 최선들 다했던 좋은 의사들도 있었지만, 더러는 여인의 다급한 사정을 악용하는 사기꾼같은 의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결과적으로 그들로 부터 괴로움만 당했습니다. 조금 나아지는 것같은 때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차도가 생기질 않았고 병세는 계속해서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12년! 말이 12년이지 의료보험도 없는 시절에 12년 동안 이리 저리 의사를 찾아다니고 치료를 하느라고 그 여인은 꽤 많던 재산도 다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은 고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또 고쳐줄 사람이 있다고 해도 이제는 그 사람의 치료를 받을 돈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여인의 질병은 감기나 속병처럼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인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게 만드는 그런 질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여인과 접촉해서도 안됩니다. 손을 잡아서도 안되고 이 여인이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도 안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 여인과 접촉하면 자신도 똑같이 부정해 지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거나 성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인을 멀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12년동안 이 여인은 자신을 부정한 여인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 여인을 향해 똑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더러운 여인이라고,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그러면 나까지 더럽혀 진다고 말입니다. 이 여인은 그렇게 12년 동안이나 자기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또 다른 사람들로 부터 소외당하며 마치 유령과 같이 아무런 존재감 없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어떤 면에서도 이 여인을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돕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사람의 힘이 대단한 것 같고, 정말 못하는 것 없어 보입니다만, 사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도 않고 능력이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이 여인과 이 여인을 둘러싼 상황은 우리 인간들이 처한 곤경을 그대로 드러내 줍니다. 정작 꼭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혀 해결할 수 없고, 꼭 도와주어야 할 사람은 도와줄 수 없으며, 한쪽에서는 그저 당해야만 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또 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 말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귀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귀신들린 사람을 고쳤다더라, 나병환자를 고쳤다더라, 손이 마비된 사람도 고쳤다더라... 여인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예수님은 나도 고치실 수 있을까? 아무도 손도 못댄지 12년이나 된 나도 고치실 수 있으실까?” 12년 동안 계속해서 절망만 해 왔다면, 이 여인의 절망은 깊다못해 아얘 이 여인의 삶의 전제가 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왔을 때, 예수님의 소문은 그 여인의 속에서 믿음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믿음은 그 여인에게 어마 어마한 확신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이 그 믿음을 가지고 도달한 결론은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을 것이다. 고침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부정했기 때문에 함부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고, 더욱이 예수님께 손을 대는 일은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와 닿는 사람을 부정하게 만들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확신은 그 여인을 거기 주저앉아 있지않고 움직이게 만들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몸, 병으로 쇄약해진 몸을 일으키게 했고, 그로 하여금 그 빽빽한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 12년 동안 질병을 알아온 여인에게는 굉장히 힘에 부치는 일이기도 했지만 상당히 위험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누군가가 여인을 알아보면 돌을 던질 수도 있는 일이고, 또 그 쇄약한 몸으로 그 군중틈을 비집고 나가는 일은 결코 안전을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그 모든 일들을 감수했습니다. 그것은 그녀에게 간절한 소망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장애와 장벽들은 이 여인의 확신에 찬 행진을 가로 막기에는 너무나 허약한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여인은 군중들 뒤로 해서 겨우 겨우 앞으로 비집고 나갔습니다. 사람들 틈으로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이제 여인은 손을 뻗습니다. 그 손끝에 자신의 모든 소망과 믿음을 담아서 있는 힘을 다해서 손을 뻗습니다. 다행히 여인의 손에 예수님의 옷자락이 슬쩍 스쳐지나갔습니다. 여인의 손길은 예수님을 마음대로 밀고 당기고 하는 다른 사람들의 손길에는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약했고 또 순간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스침의 결과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그리고는 그 일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는지, 이 여인과 예수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는 사람은 두 사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인과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여인을 찾지 않으셨다면 이 사건은 그렇게 두 사람만 아는 채로 완전히 밀봉된 비밀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12년동안의 질병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여인의 치료는 즉각적이었습니다. 손을 대는 순간 몸이 그것을 느낄 정도로 확실하게 치료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능력을 도둑맞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 사건은 다른 치유사건과 별다른 것 없어 보이는 사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더 심한 질병도 고쳐주셨고 심지어는 죽은 자도 살려주셨으니까요. 그러나. 이 사건은 성경전체를 통해 단 한 번 밖에 기록된 적이 없는 아주 독특한 종류의 사건입니다. 이 치유의 놀라운 점은 이 치유가 예수님의 의지나 명령과는 전혀 상관없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다른 치유 사건의 경우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찾아가시든지 혹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든지 간에 둘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이 있었고, 둘 사이의 대화나 명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를 선언하시거나 명령하셨을 때 예수님의 치유하는 능력이 그 사람들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어찌보면 치유가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났습니다. 이 여인은 마치 마음 좋은 외할아버지 호주머니 속에 있는 사탕을 뒤져내가는 손자처럼 그렇게 예수님의 허락도 없이 예수님의 능력을 빼앗아 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기분이 어땠을까요? 여인이 허락도 받지 않고 몰래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자신의 능력을 가져갔을 때, 예수님은 기분이 확 상하셨을까요? 화가 나셨을까요? 저는 예수님이 그 때 그 어느 때, 그 어떤 사람을 고쳐주셨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기쁘고 즐거우셨으리라 확신합니다. 속으로 너무 기뻐서 껄껄껄 웃고 계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바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의 능력을 허락도 받지 않고 도둑질해 갈 정도로, 예수님도 모르게 예수님의 능력을 빼앗아갈 정도로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 주님은 계속 찾아 헤매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고 또 기뻤을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 사이에는 아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믿음과 은혜가 어떤 관계에 있죠? 그렇습니다. 믿음은 은혜를 받는 유일한 손입니다. 따라해 보겠습니다. ‘믿음은 / 은혜를 받는 / 유일한 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믿음에 관한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이 믿음, 그러니까 은혜를 받는 손의 힘이 강해지면 그 손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손이 될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는 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읽다가 우리 주님의 너무나 선하시고 풍성하신 성품을 발견하고는 또 다시 감사를 드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 주님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우리 주님은 슬쩍 옷자락만 만져도 병을 치료하실만큼 엄청난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우리 주님에 대한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그것보다 더 은혜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내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며, 또 빼앗기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가 주님으로 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빼앗아 가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 여인의 질병은 그 순간에 치료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미 은혜는 예수님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여인의 손은 그렇게 흘러나오는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 손에 그 은혜가 담겨지게 되었고 그 은혜가, 능력인 그 은혜가 그 여인을 치유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첫 장에서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말씀이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여기서 충만하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충만하다는 말은 단순히 꽉 채워져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꽉 차서 흘러넘치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은혜가 흘러넘치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은혜를 넘치도록 흘려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 풍성한 성품으로 항상 우리에게 무언가를 내어주기를 원하시며 또 내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주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못 받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시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은 이미 주고 계십니다. 은혜를, 능력을 흘려보내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은혜와 능력을 가져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그 은혜와 능력을 담을 그릇입니다. 우리에게 그 그릇만 있다면, 여인의 믿음을 닮은 믿음만 있다면 우리 인생에도 주님의 그 놀라운 능력이 담길 수가 있습니다. 손끝만 스쳐도 12년된 불치병을 고치는, 아무리 오래된 우리 인생의 문제들이라도 넉넉히 고치는 그 능력이 담길 수 있습니다. 여인은 이전에 그 어떤 소망도, 도움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12년 동안이나 계속되는 실패와 실망, 그리고 소외를 경험해 왔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지속되면 그 문제 자체보다도 그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만들어 내는 무기력함과 무관심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시큰둥합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관심이 없습니다. 얼굴은 무표정하고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이 여인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습니다. 이미 충분히 실망했고, 충분히 힘들었으니까요. 절망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면 이 여인이야 말로 그 자격을 완전히 갖춘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의 귀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들려옵니다. 또 시큰둥 할 수 있습니다.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켰습니다. 그 소문을 자기의 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 여인은 그 모든 이유들을 무시했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할 한 가지 이유만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그는 이 ‘생각’을 붙들었고, 이 생각이 말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이 생각은 여인의 경험이나 상황이 주는 생각이 아니라 믿음이 주는 생각이었습니다.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과 이 여인을 연결시켜 주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가 흘러들어오는 통로와 그 은혜와 능력을 담는 그릇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날 예수님의 옷을 만진 사람이 그 여인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 날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가장 세게 만졌던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강하게 만졌습니다. 모두가 다 예수님을 만졌고 만진 것으로만 친다면 그 여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센 힘으로, 그것도 훨씬 더 여러 번 만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밀쳐대고 난리를 쳤지만 그들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에게는 자신이 가장 절실하게 바라던 구원이 주어졌습니다. 즉시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단 한 번, 그것도 슬쩍 스친 것만으로 그런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손을 한 번 자세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손은 여인의 손을 닮아있습니까 아니면 그 때 주님을 밀쳐댔던 군중들의 의미없는 손을 닮아있습니까? 지금 나의 손은 누구의 손을 닮아 있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을 능력있게 하며, 은혜로 가득한 그런 신앙생활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여러분이 바라는 그 구원을 여러분에게 가져다 주는 통로가 되기를 소원하십니까? 진실로 여러분에게 그런 바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손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을 그 여인의 손으로 만들기 위해서 여러분의 시간을 투자하시고, 여러분의 노력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흘러들어오기에 충분한 그런 손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말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은혜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은 절대로 그냥 입벌리고 있어도 떠넣어주는 이유식이 아닙니다. 찾고 구하고 두드릴 때, 그렇게 하지 못하게 우리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와 방해를 넘어서려고 발버둥을 칠 때, 비로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런 참된 믿음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은혜와 변화를 경험하며 믿음의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인은 12년 동안 단 한 순간도 평안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질병이 그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지 않으십니까? 겉으로 보이는 문제이건, 속으로 감춰진 문제이건 이렇게 여러분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문제, 그래서 여러분에게서 평안을 빼앗아가는 그런 문제는 없으십니까? 그런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예수님이 계신데, 여러분에게 은혜와 능력을 흘려보내주시려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리고 계신 우리 주님이 계시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가만히 계시지 마십시오. 절대로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어쩔 수 없어도, 나는 어쩔 수 없어도 하나님은 절대로 어쩔 수 없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평안이 없는 것은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고 그 문제들을 그냥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손을 뻗어 주님을 만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주님은 둘 중의 하나는 꼭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손을 뻗어 주님을 만지면 상황을 바꿔 주시든지 아니면 우리 마음을 바꿔 주시든지 둘 중의 하나는 꼭 해 주십니다. 저는 실제로 앞쪽의 은혜도 좋아하지만 뒤쪽의 은혜를 더 좋아합니다. 그게 나에게 진짜 능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좋지만, 문제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인에게 주셨던 똑같은 은혜를 주시려고 우리 곁을 지나가고 계십니다. 우리가 믿음의 손을 뻗어 주님을 만지기를 바라시면서, 은혜를 흘려보내시고 능력을 흘려 보내실 만반의 준비를 갖추시고 일부러 우리 곁을 스쳐지나가십니다. 구원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려고,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해 주시려고 말입니다. 그 분은 다른 손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향해 손을 내미는 그 손에만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 주님이 보이십니까? 예수님을 그냥 지나가시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이미 허락하신 믿음의 손을 강하게 하여 주님을 향해 힘껏 내뻗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 분을 만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빼앗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 때처럼 기쁘게 빼앗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영양가 없이 예수님을 밀어대기만 했던 군중들의 손이 아닌 여인의 손을 소유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 손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시는 주님의 복된 음성을 듣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