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빌립보서 4장 14-19절
교회에서 목회자가 성도들에게 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의 종류는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상하게도 신앙은 그저 영적인 것하고만 관계된 일로만 축소되고 있고 공적인 일은 공적인 영역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사적인 일은 사적인 일이라는 이유로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다루기는 부적절한 분야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전혀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된다는 것은 교회가 성도들의 삶을 다룰 수 없는 곳, 그래서 성도들의 삶을 바로잡아주거나 치유해 줄 수 없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그렇게 조각 조각 나눠놓고 이것은 교회에서 신앙적으로 이야기 해도 좋지만 여기부터는 안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인간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굉장히 통합적입니다. 거기에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이 따로 있지 않으며, 육체적인 삶과 영적인 삶이 나눠져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영역과 개인적인 영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영역이 나눠지지 않은 채로 한 사람의 삶과 존재를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정말로 건강하고 바른 신앙을 가지게 되고, 또 그 신앙이 성도들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하고 건강하게 하려면 신앙과 삶의 나눠질 수 없는 원래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교회에서는 성도들의 삶의 구석구석을 다룰 수 있어야 하고, 성도들은 그것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 때 우리의 신앙은 진실로 능력있고 실제적인 신앙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결국 꼭 회복되고 새로워져야 할 삶의 어떤 부분은 항상 일그러진 채로 그대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고, 그러면 프라이버시는 지켜질지 몰라도 그 사람은 바로 그 부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요즘 교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기를 굉장히 꺼리는 주제에 대한 본문입니다. 바로 헌금에 대한 본문입니다. 한쪽에서는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만 또 다른 쪽에서는 그것 때문에 이야기할 수 없게 되어버린 주제가 바로 헌금에 대한 이야기죠. 사람들은 헌금 이야기는 무조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헌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고, 그것도 신앙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고 정당하게만 다룬다면 정확하게 가르쳐져야만 하는 부분이고 그래서 바르게 이해하고 신앙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지난 본문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굉장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은 어떤 형편에서든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어떤 환경이든지 잘 소화하고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 직접적인 이유는 빌립보의 성도들이 바울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서 보내준 헌금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을 표시할 때,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오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돈 받았다고 기뻐하고, 더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바울의 성품을 잘 아는 빌립보 성도들이 그런 오해를 할 가능성은 많지 않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로 안되기 때문에, 자칫 구차한 자기변명처럼 여겨질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예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서의 헌금문제, 돈 문제는 아주 민감한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민감하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꼭 제대로 이해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많이 유익한 본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헌금’이라고 부르는 어찌보면 껄끄러운 문제에 대한 성경적인 대답이므로 이 본문을 잘 이해하고 신앙의 내용으로 삼아서 앞으로는 이런 일 때문에 시험을 당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바울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바울은 사실 빌립보 성도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자족의 비결, 어떤 환경에서도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자신의 사정을 알고 재정적인 지원을 한 일은 아주 잘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아주 좋은 전통이 있습니다. ‘품앗이’라는 전통인데요. 힘든 때 힘든 것을 함께 나누는 전통입니다. 큰 병을 얻어서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 특히 그렇게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을 때, 문병오는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서 조금씩 쥐어주고 돌아가는 돈에는 돈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그 돈은 실질적인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보아도 참 좋은 것이지만, 그러한 돈들이 진짜로 가치가 있는 이유는 거기에는 액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값진 그 사람들의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합니다. 금전적인 도움을 주지 않으면 그만큼 고맙고 애틋하지 않은데, 조금이라도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가면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꼭 사람들이 물질적이고 계산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돈이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에 돈이 그렇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돈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 사람의 인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돈이란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일부인 시간을 내어주고서 그대신 얻은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입니다. 하나님이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돈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아보시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보내 준 헌금 속에서 그러한 자신과 하나님을 향한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을 보았고 그래서 그것을 칭찬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노라”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 주었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마게도냐 지방을 떠날 때 빌립보 교회는 다른 교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데 스스로 자원하여 헌금을 모금해서 바울에게 주었습니다. 또 빌립보를 떠나 데살로니가로 갔을 때에도 두 번이나 바울이 쓸 것을 보냈습니다. 그러니까 변함없는 모습으로 바울의 필요를 공급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굉장히 기쁘게 생각했고 또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이런 이야기들을 다시 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분명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신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 준 것에 대해서 칭찬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도 그런 태도를 유지하라는 권면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을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17절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유익이며 그것은 ‘풍성한 열매’라고 말합니다.
씨앗 없는 열매는 없습니다. 열매는 씨앗이 뿌려져야 맺혀집니다. 그리고 씨앗이 뿌려지면 열매는 항상 훨씬 더 많이 풍성하게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마음이 담긴 헌금이 씨앗이라고 말하면서 그들에게 그 열매가 더욱 풍성해 지도록 계속 좋은 씨앗을 뿌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헌금 많이 하고서 복 받으시라고 말씀드릴 생각은 없지만, 오늘 본문은 분명히 그런 비슷한 사상을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담아, 진정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헌금은 씨앗입니다. 그래서 그 씨앗은 열매로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뿌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로 맺혀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열매의 혜택은 누구의 것일까요? 누가 이 열매가 주는 가장 큰 유익을 누리게 될까요? 바로 빌립보 성도들,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린 당사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15절에서 ‘주고 받는 일’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이 말은 사실 굉장히 딱딱한 상업용어입니다. 요즘 말로는 “투자와 수익”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말들을 사용한 이유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투자이며, 하나님의 밭에 씨를 뿌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헌금이 다 씨앗이 되고 투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헌금을 그런 헌금이 되게 하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그래서 헌금에는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을 향한 마음이 담겨져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될 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투자이며 하나님의 밭에 뿌리는 씨앗입니다. 그것은 훨씬 많은 수익과 열매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꼭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엄청난 물질적 축복’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분명히 그런 의미도 들어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진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투자하고 씨앗으로 뿌린다면 그것은 값지고 아름답게 쓰일 뿐 아니라, 분명히 우리를 위한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엄청난 유익으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그런 방식으로 사셨던 한 집사님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에 저를 비롯한 많은 신학생들을 재정적으로 섬겼고 또 가난한 이웃들을 많이 돕고 살았던 분이었는데, 그 분은 꽤 잘 사시는 분이셨지만 그 분이 그런 일을 위해서 지출하시는 것을 보면 그 분의 생활수준에 비교해 볼 때도 굉장한 규모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면서도 항상 기쁨이 넘쳐 있었습니다. 그 분이 언젠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이 베푸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은 그렇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것을 느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다 보니 정말 잘못하면 망하거나 크게 어려워질 뻔한 위기도 여러 번 있었는데, 그 때마다 이상하게도 아주 우연한 일, 어찌보면 사소한 일을 통해서 그런 위기들을 몇 번이고 넘기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래서 자신은 그렇게 기쁘게 베푸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을 굉장히 즐거워 하셨습니다. 저는 그 분의 미속를 가득 채우고 있었던 그 기쁨이야 말로 그 분이 뿌린 씨앗의 가장 풍성한 열매이며 하나님께서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신 것은 오히려 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이 담긴 물질을 드린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몇 배의 물질로 되돌아 오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물질로 돌려 주시지 않으면 그것보다 더 귀한 것, 결코 물질로 살 수 없는 열매를 풍성하게 거두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사용하려고 애쓰는 성도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은 어떤 모양으로건 가장 좋은 것과 가장 좋은 방법으로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신을 돕기 위해서 보내준 헌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바울은 여기서 빌립보 성도들의 헌금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바울만큼 구약에 정통했던 사람이 별로 없었던 만큼 바울만큼 구약의 제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바울이 헌금을 제물이라고 이야기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물은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닙니다. 제물은 원래 ‘대용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 자신을 바쳐야 하는데, 자기 자신을 죽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자기 대신으로 드리는 대용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물은 그냥 드린다고 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준에 맞는 짐승이나 제물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기준에 맞는 방법으로 드려야 하나님께서 그 제물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기에게 보내준 헌금이 바로 그런 제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헌금을 돈이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 받으셨고, 두번째로는 그것도 하나님께 합당한 것으로 아주 기쁘게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하나님께서는 빌립보 성도들이 드린 헌금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을 그것도 아주 기쁘게 받아들이셨다는 뜻이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빌립보의 성도들은 그저 바울을 생각하고 또 선교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헌금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그들의 존재와 삶 전체를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더 많은 열매를 위한 씨앗, 하나님께서 기뻐받으셔야 할 나 자신 대신에 바치는 제물.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헌금의 참된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헌금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진심이 담겨져 있을 때, 그 헌금이 하나님께 가지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헌금에 마음을 담아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삶의 한 조각이며 우리의 신앙이니까요. 마음을 담아 드려야 한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헌금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진심, 몸된 교회를 향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정으로 하는 것이 바로 헌금입니다. 우리의 헌금이 이렇게 드리는 헌금이 될 때, 그런 헌금은 어떤 헌금이 될까요? 아마 최선을 다해서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이 될 것입니다.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면서 거기 마음이 담겨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기쁘게 드리지 않으면서 거기 마음을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헌금은 최선을 다해 기쁨으로 드리는 헌금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헌금은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써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사람들로써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할 의무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헌금을 의무적으로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헌금은 억지가 되고 자기 의가 되며,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색한 마음을 드러내는 일이 되고 맙니다. 헌금에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항상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드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기쁘게 드릴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꼭 많은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저 기쁨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최대한 넓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드리는 물질은 물질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사랑이 되어서, 더 많은 열매를 위한 씨앗이 되며,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기쁘게 받으시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렇게 마음을 담아 드리는 일의 가장 큰 장애물은 ‘현실’이 아닐까 합니다. 그 현실이 우리를 마음이 아니라 머리를 쓰게 만들고 그래서 물질을 통한 참된 헌신을 방해하는 것이죠. 충분히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이런 고민과 시험은 누구라도 당하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현실 때문에 우리가 자꾸 마음을 넓히지 못하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좁게 만드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좁혀진 마음을 다시 넓힐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채우심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빌립보의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이것은 단순한 바울의 소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의 경험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바울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바울이 믿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내가 경험해온 하나님이시니 너희도 이 하나님께 기대와 믿음을 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것을 챙기지 않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족하기도 했고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세월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살아왔습니다. 또 살고 있습니다. 그런 과정 중에 그는 자족의 비결과 모든 상황을 선용할 수 있는 비결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때보다도 만족하고 기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제까지 바울을 위한 모든 필요를 공급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 덕분이었습니다. 바울은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서 살아간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챙기며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일을 챙길 때, 하나님이 나를 챙겨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려고 힘썼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분이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음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진짜로 바울을 위한 모든 것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셨습니다.
바울은 너무나 자신있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그는 “모든 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쓸 것”, “하나 하나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도 이런 하나님이십니까? 모든 쓸 것, 그러니까 하나 하나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는 분이십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은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지금도 무언가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살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약 나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한 무언가가 정말로 부족했다면, 그런 적이 있었다면 지금 나의 삶이 가능할까, 과연 내가 지금 생존해 있기나 할까 하고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부족을 느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정말 많은 필요들이 채워지지 않아서 끙끙대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냉정하게 판단해 볼 때, 정말 우리가 느꼈던 그 부족함들은 내 삶에 필수적인 것들에 대한 부족이었을까요? 없으면 생존자체가 불가능하고 삶 자체가 이어지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그렇게 중요한 것들의 부족이었고, 또 그렇더라도 그런 정도로 큰 부족이었을까요?
물론 그런 부족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견디기 힘든 것은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가운데, 꼭 필요한 것들, 정말 필요한 것들을 챙겨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해 주심 속에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엄청나게 잘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대들기까지 했어도 하나님은 나의 삶을 여기까지 이끌어 오셨고, 또 지금까지 정말 꼭 필요한 것은 꼬박 꼬박 챙겨주셨습니다. 그런 것들 중에서는 정말 넉넉하게 넘치도록 주신 것도 정말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마음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특별한 경우, 하나님의 더 큰 목적이 있어서 그렇게 하시는 경우가 아니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이전보다 더 온전히 챙겨주시기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쁘고 넉넉하게 드릴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기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기쁘게 받으시고 더 많은 열매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신앙은 삶 전체의 문제입니다. 삶에 속한 모든 부분의 문제입니다. 신앙 안에는 우리의 영혼에 관한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돈의 문제,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의 문제도 분명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제가 민감하고 중요한 만큼 이 문제를 바로하지 않으면 우리 삶 전체도 기쁘고 충만한 삶이 되기가 그만큼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일단 헌금의 액수를 떠나서 내가 하나님 앞에 무언가를 드릴 때, 정말 마음을 다해서 최선을 다해서 기쁘게 드리고 있는지를 되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담긴 헌금은, 마음을 담아 하늘나라를 위해 누군가를 돕는 물질은 풍성한 열매를 위해서 심는 씨앗입니다. 또 하나님은 그것을 받으실 때, 우리의 삶까지도 향기로운 제사로 받으십니다. 기쁘고 넓은 마음으로 드리는 재물을 통해 우리 자신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이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시든 내 기쁨이 사라지지 않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해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인색한 마음으로 마음없이 드리지 마시고, 마음을 담아서 기쁘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것을 여러분의 인생의 풍성한 열매를 위한 은혜의 씨앗으로 삼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여러분의 삶을 대신하는 향기로운 제물로 받아주시고, 여러분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사셔서 하나님의 풍성함 가운데 참으로 풍성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