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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4.21.주일오전 -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복음 26)


막0601to06 -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마가26).pdf


20130421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1-6절


요즘 교계에 목회자 세습 문제가 시끄럽지만 저희가 신학교 다닐 때, 친구들 사이에는 다른 데는 몰라도 자기가 자란 교회에는 교역자로 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오고 가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라난 모교회는 너무 어려서 부터 모든 것을 다 보여주며 지낸 곳이기 때문에 그 교회에서 교역자로 인정받는 것이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노권사님들은 귀엽다고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기도 하고 또 자신을 가르쳤던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여전히 주일학교를 섬기고 있기도 해서 교역자로 인정받고 사역을 하기가 어려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목사가 되어 보니 그런 일을 경험하기 위해서 멀리 갈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가정이 바로 그런 자리이니까요. 그래도 밖에 나가면 잘 났으니 못 났으나 목회자로 인정해 주고 겉으로라도 존중해 주는데, 집에서는 그게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특히 아내 앞에서는 목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에 목사입네 할 수도 없고, 그런다고 해서 인정해 주지도 않습니다. 뭐 꼭 저희 집안이 그렇다거나 무슨 불만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이야기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익숙하다는 것, 잘 알고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익숙해져 있고 또 서로 잘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걸림돌과 장애물이 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들 중에서는 성도들과 너무 가까워지지 말아라, 거리를 조금 두어라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신데 아마도 경험상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와 모르는 구석이 있는 것이 목회에 더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친해지고 익숙해지면 그 관계 때문에 해 주어야 할 이야기를 하기가 어려워지니까요. 그렇지만 저는 그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거리를 두고 친해지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익숙하고 친하기 때문에 더 정직할 수 있을 때, 그 관계가 목회자와 성도의 바람직한 관계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아직은 그렇게 해 보고 싶습니다. 


12년 동안이나 아무도 고치지 못하는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슬쩍 만지고서 그 병을 치유받았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죽은 딸을 다시 살려주시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두 사건은 정말 적극적인 믿음, 믿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지켜냈던 믿음이 일으킨 정말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믿음이 그 여인을 구원했으며, 또 딸이 죽은 이후에도 예수님을 신뢰했던 그 믿음이 죽은 딸을 다시 살리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고향마을로 돌아왔습니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예수님께서 이전에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에 대한 소문이 이미 고향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여인을 고치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을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은 당연히 제자들과 함께 회당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인이 되면 자신이 속한 회당에서 차례에 따라 말씀을 읽고 전해야 했던 유대인의 관례에 따라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자연스럽게 동네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 설교가 어땠을까요?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말씀, 요즘 말로 저자직강으로 들려주시는 말씀이니 그 말씀이 다른 랍비들의 가르침과 같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해석과 선포는 정말 듣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설교자로서 저는 이런 예수님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가는 곳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금새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경의 저자는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만약 제가 성령충만하여 설교하고 여러분이 성령충만하여 설교를 듣는 일이 일어난다면 우리 교회 안에도 그 날 회당에 가득했던 그 놀라움이 가득 찰 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전에 항상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주님의 성령이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셔서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예배당 안이 그 날 회당을 채웠던 놀라움으로 가득차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놀라움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사람들은 서로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사람들의 놀라움은 이중의 놀라움이었습니다. 지금 들은 예수님의 설교 속에 들어있는 지혜 때문에 놀랐고 그들이 이미 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일들 때문에 또 놀랐습니다. 좋은 놀라움이죠.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신 영광스러운 놀라움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더욱 놀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들이 이미 예수님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이전에 예수님은 그 사람들과 함께 살고 계셨습니다. 그 둘 중의 한 사람으로 아버지 요셉을 도와 목수일을 하면서, 그리고 그 요셉이 죽고나서는 오랫동안 아버지가 하던 일을 하면서 가난하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던 갈릴리의 가난한 백성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형제와 자매들은 여전히 그 동네에서 그 동네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놀랐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항상 평생을 함께 알고 지냈던 이웃집 영수같은 존재였으니까요.


요즘 휴대폰 같은 모바일기기가 발달하면서 페이스북이라는 프로그램이 아주 인기를 끌고 있는데요, 아시겠지만 이 프로그램은 친구의 친구 목록 속에서 내가 잊고 지냈던 내 친구들이나 지인들을 찾게 해 주고 또 연결시켜주어서 수십년 동안 헤어져 있던 사람들도 다시 만나게 해 주기도 합니다. 실제로 저는 대학 시절에 거의 친동생처럼 지내다가 헤어졌던 후배를 근 20년 만이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저도 이 페이스북을 이런 저런 이유로 자주 들여다 보는 편인데요. 가끔씩은 아주 깜짝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알던 제 후배들이 세상 여기 저기서 맹활약을 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정말 평범하거나 제 생각에 그 이하였는데, 공부도 못하고 또 안하기까지 했는데, 맨날 이상한 생각만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 미국 유수대학의 교수도 되어 있고, 세계적인 휴대폰 케이스 회사 사장도 되어 있고, 이미 고인이 되기는 했어도 아주 유명한 사진작가도 되어있고, 아주 훌륭하고 존경스럽기까지한 좋은 외과의사가 되어 있기도 하고... 정말 그럴 것 같지 않던 아이들이 전혀 상상 밖의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날 때 정말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놀라움이 더 컸던 이유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너무 친밀하고 익숙한 사람, 함께 살고 또 자나랐던 사람이 그렇게 훌륭하고 위대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정상적이었을까요? 아마 “경축. 인물탄생. 금의환향. 환영 우리 마을 예수”라고 현수막이라도 내걸고 환영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들의 반응을 정반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예수가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또 너무나 익숙한 예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더 놀랐죠. 그런데, 성경은 그 다음의 이 사람들의 행동에 대해서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아주 짧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마치 막 부풀어 오르던 풍선이 갑자기 피식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것 같은 그런 분위기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지가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제가 제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다가 제 아내에게 점잖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더 심한 핀잔 밖에 얻을 것이 없겠지만 예수님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 자격이 충분히 있으셨습니다. 그 분은 놀라운 말씀을 전하시고 권능을 행하신 메시야셨기 때문입니다. 이 오래된 속담은 비극적이게도 예수님의 고향에서도 자신이 틀림이 없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바람에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너무도 쉽게 거절한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들은 이렇게 메시야를 거절하고 말았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익숙하다는 것의 시험, 잘 알고 있다는 자만의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어려서부터 너무나 익숙해 있다는 것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너무 놀라운 특권이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메시야를, 자신의 구원자를 그렇게 친밀하게 보고 또 안다는 것은 그 어느 시대, 어떤 지역의 사람들도 누리지 못했던 복 중의 복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만 너무 좋은 특권들은 그 뒤에 굉장히 큰 위험을 숨기고 있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위험을 피하지 못하면 결국 그 좋은 특권들은 오히려 치명적인 독이 되고 맙니다. 3절을 보면 마지막에 “예수를 배척한지라”라고 되어 있고, 그 앞에 1)이라는 작은 숫자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 1)을 각주에서 찾아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또는 예수로 말미암아 실족한지라.’ 그러니까 이 부분은 달리 번역하면 그렇게도 번역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 실족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걸려 넘어진다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큰 죄를 짓게 되었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는 셈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동네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믿고 또 환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이었기 때문에 더 많이 놀라기도 했지만 반대로 예수님을 완전히 거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걸려 넘어진 것입니다. 큰 죄, 세상에서 가장 큰 죄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연애인들이나 정치인들같은 공인들을 제일 힘들게 하는 것 중의 하나가 스캔들입니다. 연애인이나 공인들이 이 스캔들을 극복하지 못하면 결국 굉장히 큰 타격을 입거나 중도하차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스캔들이라는 말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실족하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의 헬라어에서 나온 것입니다. 공인들에게 스캔들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처럼 예수님 또한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던 것입니다. 걸림돌은 그것을 넘을 수 있다면 더 큰 도약의 발판이 되지만 거꾸로 거기 걸려 넘어져 버리면 아주 위험합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는 것, 예수님과 너무 익숙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에게는 정말 큰 특권이었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믿는데에는 가장 큰 걸림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걸림돌을 넘지 못하고 거기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복이 너무 크고 특별했던 만큼 그것이 걸림돌이 되었을 때는 그들을 그대로 주저앉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그래도 잘 지켜온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이니까요. 그러나,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왔다는 것이 오히려 영적으로는 독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어디일까요? 그 사람이 그 오랜 세월 때문에 신앙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익숙해 지고 그래서 예수 믿는 일에 대해서 식상해 질 때입니다. 오래 믿은 것은 정말 큰 장점입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신앙의 기복이 거의 없습니다. 크게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만큼 신앙의 성장이나 속사람의 변화가 더뎌지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를 누리며 사는 일에 있어서도 무뎌지기 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피할 수 없는 약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믿는 일에 익숙해져 있으면 있을수록 신앙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기 위해서 더 애를 써야 합니다. 그대로 굳어져 버리지 않도록 식상해 지고 시큰둥해지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익숙함의 함정에 빠져 버립니다.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맙니다. 


예수믿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가고 또 믿는 일에는 정말 말 그대로 한도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저희 어머니가 아버지와 수십년을 함께 사시고서 내리신 결론이 “난 너희 아버지 아직도 모르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제가 보기에 정말 단순하신 분이셨습니다. 거짓말을 하려고 하면 얼굴부터 벌개지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런데도, 그렇게 무궁무진하신 분이셨습니다. 평생을 함께 사신 어머니가 평생을 이해해도 다 이해할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땅콩 한 알, 고구마 한 개도 그렇습니다. 조지 와싱턴 카버라는 아주 유명한 미국의 농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노예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땅콩과 고구마를 연구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룬 분입니다. 고구마에서는 150가지의 유용하고 상품가치가 있는 물질을 발견해 냈고, 땅콩 속에서는 300가지가 넘는 물질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단순하신 우리 아버지도 그런데, 아니 고구마 하나 땅콩 한 알도 이렇게 무궁무진한데, 어찌 예수님을 알아가는 일이,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일이 끝이 있겠고 그래서 그 분을 믿고 알아가는 일에 익숙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가다가 말고 어딘가에서 멈춰섰기 때문입니다. 다 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걸려넘어져 거기 주저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으면서 거듭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정말 사람을 잘 놀래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저를 놀래키시는 것이 아니라 제가 예수님에게 계속해서 놀라는 것일 것입니다. 변하는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알고 믿는 저의 지식과 믿음이니까요. 예수님은 끝을 알 수 없는 심연같은 분이시고, 아무리 헤엄쳐도 다 알 수 없는 대양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깊이 알수록 더 좋습니다. 그래서 더 알고 싶어지고 더 알고 싶어집니다. 아무리 헤엄쳐도 여전히 새로울 뿐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바다 속에는 아직도 제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 숨겨진 세계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고 믿고 또 믿어도 알고 알고 또 알아도 여전히 깜짝 깜짝 놀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놀라움, 예수님께 놀라는 즐거움이야 말로 예수를 믿는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그 믿음이 일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예수님을 발견하고 만나고 그래서 또 알게 되고 또 알아갈 때마다 얼마나 흥분되고 좋은지 모릅니다. 믿고 믿고 또 믿어도 여전히 더 믿을 것이 남아있는 풍성한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믿음의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좋아지고 더 좋아지는지는 그런 분이십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런 기쁨이 없다면, 이런 즐거움이 없다면 우리는 오래 믿은 복 때문에 오히려 익숙해짐, 충분해짐의 걸림돌에 걸려서 멈춰서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잘 안다는 것, 익숙해져 있다는 것의 걸림돌을 넘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고 진전도 없는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오래 믿었다는 것도, 신앙의 연조가 오래되었다는 것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오래 믿었기 때문에 그만큼 예수님을 많이 알아야 하고 깊이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기 때문에 믿음의 깊이가 깊어야 하고 또 더 깊어져 가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오래된 신앙, 익숙해진 신앙의 진짜 유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리고 나는 어떻습니까? 혹시 예수님에게 선지자의 고향과 자기 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날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들처럼 오늘 주일에 예배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도 그들과 비슷한 마음은 없습니까?


성경은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걸려 넘어진 일의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하신 일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 놀라움은 믿게 하시려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었지만 그 놀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익숙함의 저주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반대로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불신앙 때문에 비록 그곳이 예수님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 예수님도 가장 사랑하셨던 고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는 아무런 권능도 행하지 못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우리 믿음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놀라운 일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 삶에 놀라운 일을 일으키고 싶어 하십니다. 12년된 불치병 환자를 옷깃 스치는 일만으로 고치시고, 죽은 딸을 살리시는 것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십니다. 평생 예수믿지 않던 가족이 갑자기 예수를 믿게 되고, 오랫동안 시들어 있던 영혼이 펄펄 살아나게 하는 그런 일을 행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런 놀라운 일을 행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그 분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으셔도 그렇게 하실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한 가지 제한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 일하시기로 한 것입니다. 믿음을 보실 때 움직이시기로 한 것입니다. 15장 21절 이하에 나왔던 여인과 야이로가 그 증거입니다. 이들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정말 불가능을 뚫고서 철철 흘러넘치는 주님의 권능을 경험했습니다. 그 권능이 가져다 주는 은혜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 몇 절 차이인데, 16장에 와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너무 불쌍하셔서 그래도 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몇 사람의 병을 고쳐주셨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향마을 사람들에게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믿는 우리의 삶과 우리 삶의 주변에 우리를 놀라게 하는 일들이 전혀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가 아니라는 문제를 제외하면, 거의 모두가 다 우리 믿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믿음을 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하다못해 그 믿음은 우리 마음과 생각의 변화라도 만들어 내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고향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일이 너무나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는데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절하는 일이 예수님께서는 신기할 정도로 이상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많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복입니까? 그렇습니다. 정말 엄청난 복입니다. 그렇지만 이 복이 진짜 복이 되려면, 그리고 계속 복으로 남아있게 하려면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끝내고 주저앉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걸림돌이 됩니다. 우리를 신앙이 아니라 불신앙으로 인도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가 없으며, 우리의 삶은 믿음이 일으키는 역사들이 현저히 부족한 빈궁하고 무미건조한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시면서 이상하게 여기실 것입니다. 


이미 믿고 있으니, 이미 알고 있으니 우리는 더 온전히 믿고 더 깊게 알아가는데 아주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 유리한 위치를 마음껏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더 많이 알아가시고 더 온전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예수님께 놀라시기 바랍니다. 그 분의 깜짝 깜짝 놀래키는 은혜를 누리시며 그 놀라움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채워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불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으로 우리 주님을 놀라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그 믿음의 능력 안에서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의 고향마을처럼 되어서는 결코 안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일 예배 시간이 그 안식일의 회당 안처럼 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예수님을 아는 복, 예수님께 익숙해져 있는 이 복을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삼아서 더 크고 온전한 믿음으로 뛰어 오르는 살아있고 성장하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