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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4.28.주일오전 - 열 두 제자를 보내시며(마가복음 27)


막0606to13 - 열 두 제자를 보내시며(마가27).pdf


20130428SM (#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6장 6-13절


예수님께서는 말씀 한 마디로 폭풍을 잠재우셨습니다. 거라사의 지방에 가서는 군대귀신을 내쫓으시고 광인을 고쳐 주셨습니다. 다시 갈릴리 호수를 건너오신 예수님은 이번에는 옷깃 한 번 슬쩍 스치는 일을 통해 불치병의 여인을 고치셨고, 야이로의 죽은 딸을 잠 자는 사람 일으키듯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고향에서는 사정이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도 이미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에 대한 소문을 들었고, 또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침을 듣고 놀랐지만 단지 예수님이 자신들이 너무 잘 아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이었지만 거기서는 단 몇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치시는 것으로 만족하셔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앞에 나오는 사건들과 예수님의 고향마을에서 있었던 사건은 완전히 반대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항상 승승장구 하셨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이 세상에 계실 때는 자신이 하시려는 일에 실패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또 거절할 때, 예수님도 그들을 억지로 믿는 사람들로 만드시지는 못했습니다. 


말을 물가로 끌고 갈수는 있어도 그 말에게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구원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려고 해도 받는 사람이 거절하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주의할 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관심이 없거나 혹은 받지 않으려고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십니다. 6절은 예수님께서 고향마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셨고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주변 마을로 다니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고 가르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절하니 떠나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6장 1-2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에게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기회가 무궁무진할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답은 ‘잘 모른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기회가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수도 있지만 또 영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기회가 주어질 때 그냥 흘려보내지 말고 꼭 붙들려고 애써야 합니다. 한 번 한 번의 기회들을 다 한 번 밖에 오지 않는 기회로 여기면서 말입니다. 사실 어떤 은혜의 기회는 또 다시 오는 기회가 아닙니다. 그 때 받아야 할 은혜는 그 때 밖에는 받을 수 없으니까요. 주님의 은혜가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고 한다면, 우리가 처한 상황과 때에 정확히 들어맞는 그 은혜는 그 때 밖에 주어지지 않습니다. 평안할 때는 평안하기 때문에 받아야 할 은혜가 따로 있고,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꼭 받아야 할 은혜가 따로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흘려보내도 괜챦을만한 은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붙드는 은혜가 많을수록 우리의 삶은 은혜로 풍성하고 능력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오늘 주시는 은혜를 꼭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은혜의 창고를 더 풍성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능력을 베푸셨던 예수님의 성공적인 사역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이해할 수 없는거절로 인한 예수님의 실패... 예수님은 이 이후에, 열 두 제자들을 특별히 불러 모으셨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복음전도자로 일하며 또 살아가는 실습을 시키기 위해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예수님은 동행하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자들만 복음전도를 위해서 보내시기로 하신 것은 이제 제자들에게 그럴 수 있는 최소한의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판단하셨을까요? 이미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시는 일들을 모두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러셨지만 요근래에 일어난 일들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난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에게서 귀신을 내쫓으셨고, 여인의 불치병을 고치셨으며, 이미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권세있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말하자면 “얘들아, 잘 봐. 이건 이렇게 하는거야!”라고 시범을 보이신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미새는 아기새에게 자신이 나는 법을 보여주어서 아기새가 나는 법을 배우게 하듯이 예수님은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과 또 제자들이 나아갔을 때에 행해야하고 행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삶의 밝은 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고향마을에서는 아주 심각한 실패를 경험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그것을 지켜보게 하셨습니다. 스승으로서는 보여주기 싫은 모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도 자기 고향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일을 보고 또 경험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얘들아, 너희가 복음을 전할 때, 이적이 나타나고 귀신이 쫓겨나고 병이 고쳐지는 놀랍고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기도 하겠지만, 당연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일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당연히 너희들을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너희들을 거절 할 수도 있어!” 이것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실패를 목격하게 하심으로써 전해주려고 하셨던 메세지였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파하는 삶의 어두운 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동안 제자들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방법만을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럴 때 일어날 수 있는 긍정적인 일들과 부정적인 일들을 모두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공에 너무 흥분하지 않고 실패에 너무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가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고 있어야 할 현실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선대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우리를 박대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도, 그리고 그 좋은 복음을 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의 한 쪽으로 너무 기울어져 있어서는 안됩니다. 잘 될 것만 생각하면 낙심하기 쉽고, 안 될 것만 생각하면 기대와 의욕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기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승승장구, 탄탄대로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상상이상의 놀라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지만, 정말 말도 안되는 좋지 못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공한 케이스만 보여주시지 않고 실패한 케이스도 보여주신 것은 제자들에게 바로 이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둘씩 둘씩 짝지어 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곰곰히 헤아려 보면 그 둘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교회의 최소단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젠가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두 세 사람이 기도하는 그 곳에 나도 함께 있겠다.” 두 사람은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가장 작은 공동체 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숫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교회가 기도하는 곳에는 내가 어디나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모아놓으신 이유는 그저 모여 있는 것이 보기 좋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성도의 삶을 살며, 소명을 감당해 내려면 우리에게는 교회가, 그리고 공동체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이란 그것을 위한 최소한의 숫자입니다. 


혼자 있으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심정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혼자로 충분한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상담자가 되어주고, 격려자가 되어주고, 방패가 되어주고, 조언자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계속해서 성도로 살 수 있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제대로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여기 저기서 쿵쿵 무너지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그 분들은 혼자였습니다. 그 분들 옆에 아무도 없기도 했지만, 또 있다고 해도 그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인 성공에 빠져서 누구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누구의 조언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잘못 가도 너무 많이, 돌아오지 못할 정도로 잘못 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라이버시가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져 버린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의 비극입니다. 교회에서 조차도 프라이버시는 절대적인 가치가 되어져 버렸습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합니다. 그게 옳은 일이건 옳지 못한 일이건,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지 그 누구도 거기 끼어들지 못합니다. 신앙적인 조언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지도를 받는 일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도들이 교회 안에 있어도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교회도 성도들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실패에 대해서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일이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전도실습을 내 보내실 때, 한 명이 아니라 둘씩 짝지어 보내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방패가 되어주고 조력자가 되어주며, 조언자가 되게 해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너무 쉽게 남의 인생과 신앙에 끼어들어 간섭하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지만 내 신앙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간섭하지 말라는 식의 태도는 더더욱 바람직하지 못하고 위험한 태도입니다. 조언을 들어야 할 때는 들어야 합니다. 지도를 받아야 할 때는 지도를 받아야 하구요. 그래야 나를 지킬 수 있고 그래야 더 온전한 성도로 성장해 갈 수 있습니다. 또 주님의 일도 더 효율적이고 바르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은 교회를 만드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가서 그냥 너희들 힘으로 어떻게 해봐라”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보내실 때, 주님의 권능을 주시면서 보내셨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이런 저런 시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것은 사실이고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또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능히 이겨낼 능력을 주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이렇게 일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기시면서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넉넉하게 채워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성도로서, 그리고 전도자로서의 소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소명을 주셨다는 것은 그 소명을 감당할 능력과 힘도 함께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에 의지해서 맡겨진 일들을 감당해 내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일들을 충분히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내가 맡은 일이 힘겹다고 느껴질 때, 그 때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부르심에는 부르심의 능력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계속 의지하는 한, 그 능력도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번째로 주님은 제자들을 내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정말 해도 너무 하십니다. 살라는 것인지 죽으라는 것인지 허락된 것이라고는 달랑 옷 한 벌, 지팡이 하나, 신발 한 켤레 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저 초극빈상태로 지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가난이 미덕이니까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전도를 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생활에 있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그만큼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였고, 두번째는 그렇게 해도 충분히 살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경험시켜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렇게 살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런 일들을 요구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주님이 어떤 요구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가능하다는 약속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독교 역사 속에 이렇게 살며 일한 사람들, 정말 이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 낸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수없이 많이 계시지만 아주 유명한 두 분만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영국의 조지 뮐러 목사님입니다. 어떻게 다 헤아렸는지는 모르지만 이 분은 평생동안 5만번이나 기도응답을 받았다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십니다. 이 분은 1834년 영국 브리스톨을 휩쓴 콜레라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여 38년 동안 2000명이상의 고아들을 돌보았던 분이십니다. 이 분이 처음 고아를 돌보는 일에 부르심을 받고 고민을 하다가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빈민가 브리스톨에 고아원이 세워지기를, 주님이 원하심을 믿습니다. 제가 고아원 일을 시작하려면 우선 아무래도 1천 파운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빈 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의 뜻을 받아주신다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을 다 채워 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분은 손에 돈 한 푼 없었지만, 특별한 모금활동을 한 것도 아니지만, 그 때 기도 드렸던 천 파운드가 채워지는 것을 시작으로해서 38년 동안이나 2000명의 고아들을 단 한 번도 굶기지 않고 먹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으로 드린 기도에 대한 5만번의 하나님의 공급하심 덕분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우리가 요즘 주보에서 계속해서 만나고 있는 중국내지선교회를 설립하신 허드슨 테일러입니다. 이 분은 1854년 영국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사가 되었는데, 그 때 이 분은 그 어떤 재정적인 후원도 없는 상태에서 그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것은 그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로 50년 동안 그는 동일한 방법으로 중국을 선교했습니다. 50년 동안 주님은 그의 믿음에 응답하여 주님의 신실하심을 증명해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설립한 중국내지 선교회는 지금 OMF가 되었는데, 지금도 이 선교단체 소속 선교사들은 개인적인 모금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여전히 “믿음선교”라고 하여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만 의지해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근 160년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 셈이고 하나님께서는 160년 동안 그 믿음에 응답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혹은 내 책임을 하나님께 떠 넘겨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무책임과 믿음은 전혀 다릅니다. 허드슨 테일러도 자신의 전 인생을 헌신했고, 자신의 재산을 중국선교에 던져 넣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일, 우리가 할 수 있는 헌신은 그것이 시간이든 물질이든 아니면 노력이든 간에 최선을 다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내가 전전긍긍하며 계산기 뚜드려가며 걱정하고 근심할 것이 아니라 그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 주십니다. 나도 살게 해 주시고, 하나님의 일도 되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방법이며 동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보고 또 믿음으로 일해 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영혼 뿐만이 아니라 현실의 주인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런 경험과 확신을 주셔서 앞으로도 인간적인 조건이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의지하여 근심과 걱정을 넘어서서 살아가며 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어디를 가든 처음 너희를 영접하는 집에서 그 곳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라. 둘째 어느 곳에서 너희를 영접하지 않고 그 말을 듣지 않을 때에는 발의 먼지를 떨어 그들에게 증거를 삼아라. 첫번째 요구는 아마도 더 좋은 곳에서 오라고 해서 집을 옮겨다녀서는 안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복음 자체에 대한 오해가 생겨날 수 있으니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너무 자기 이익에 밝아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배려와 그 사람들의 유익을 우선으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일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믿는 신앙 자체를 우습게 여깁니다. 예전에 한동안 “믿는 것들이 더한다”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늘나라도 자기나라라고 말하면서 이 세상도 자기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세상도 하늘라도 하나도 내려놓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고 했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했던 말이었습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가치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그것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믿음은 세상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될 것이고,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예수 믿으라는 메세지에도 힘과 무게가 실릴 수 있습니다. 


두번째 요구는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것을 복음을 듣지 않으면 저주해도 좋다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보면 발의 먼지를 떠는 행동은 선지자들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그 일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했던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행동은 복음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거부하는 일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를 알리기 위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믿으면 구원얻지만 거부하면 본전인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 구원의 정반대편, 바로 멸망을 택하게 되는 아주 절박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이 누구이든 간에 그 영혼이 지금 구원과 멸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영혼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우리에게도 우리가 믿는 이 복음이 아주 절박한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나에게 절실하고 나에게 절박해야 비로소 남에게도 그렇게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없다면 우리 운명은 영원히 비참해 집니다. 복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능력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피뭍은 십자가가 우리 눈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화목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아닌 풍성한 은혜를 기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때로는 죄를 짓고 곁길로 어긋나가도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얻은 것입니다. 복음이 없으면 이 모든 것이 우리와 상관없어 집니다. 우리 속에 복음의 절박함에 대한 감각이 회복될 때, 그 때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절박하게 전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는 행동 속에는 한가지 의미가 더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사람들과 논쟁하려고 들거나 사람들을 억지로 설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그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하는 것은 설득이나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선포된 복음이 어떤 사람의 내면에서 그 내면을 변화시키고 믿음이라는 반응을 만들어 낼 때, 그 때에만 복음은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우리의 표현이나 전하는 방식 때문에 복음이 거부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이것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복음이고 그 복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물론 우리는 고압적인 태도가 아니라 겸손하고 낮은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가장 좋은 것을 전하려 하는 것이고 어찌되었든 듣는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겠다는 열심이 너무  강해서 복음 자체에 물을 타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복음적인 삶이 있고, 또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 자체가 능력있게 일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갈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복음에 대해서 가져야 할  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대로 짝을 지어 나갔고 나가서 회개의 메세지를 전했습니다. 진짜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질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와 능력으로 예수님처럼 귀신을 내어쫓았고 또 병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제자들에게 맡기셨던 일들을 맡기셨습니다. 우리가 가고 또 살아가는 곳마다 복음이 전파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며 악한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삶의 회복이 일어나게 하는 그런 일을 맡기셨습니다. 우리의 소명은 우리의 삶의 자리가 어디이든 간에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 그 일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아름답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거부당하고 오해받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 결과는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과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결과는 믿음으로 주님께 맡기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결과 때문에 낙심치 않고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포기하는 일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제자로 살며 일하는 방식이 따로 주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도 교회의 일도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도 모두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힘으로만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삶이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에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네.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또 가는 곳에서 복음이 전파되며 악한 영이 쫓겨나며 회복이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 또한 주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충만한 삶을 살게 되고 말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확신을 가져야 하며, 그 확신이 현실이 되는 것을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우리에게만 주어진 아주 특별한 복이니까요. 


우리 모두 이 세상이 요구하는 세상을 닮은 삶의 방식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우리 방식대로 살아서 세상에 하나님을 드러내고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