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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3.04.28.주일오후전교인기도회 -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1


계0201to07 -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1).pdf


20130428SE (#1).mp3.zip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7절



오늘은 첫번째 전교인 기도회로 모였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회로 모이는 목적은 이렇습니다. 첫번째는 될 수 있는대로 많은 성도가 함께 모여서 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위해서 입니다. 교회는 기도로 하나되지 않으면 진정으로 하나될 수 없습니다. 기도만큼 뜻과 생각을 하나로 묶어주는 힘이 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기도가 회복되지 않으면 믿음과 영성의 회복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요즘 두 날개, 두 날개 하는데, 교회의 두 날개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의 사도들도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던 것입니다. 성도들 모두 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또 한 마음으로 기도드릴 때, 그 교회는 영적인 침체를 벗어나서 살아있고 능력있는 교회, 은혜가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새벽에 교회를 생각하며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가 함께 모여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이 모여서 기도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주일 오후에 기도하라고 말입니다. 이 시간은 주로 찬양과 기도로 이어져 갈 것입니다. 마음껏 찬양하시고 마음껏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눈치 보지 말고 여러분의 영혼과 삶, 그리고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껏 찬양하고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을 여러분 자신과 우리 교회를 위한 부흥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려면 우리는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달라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열정을 가지시고 이 모임에 열심을 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이 집회를 위한 첫번 말씀으로 계시록에 있는 일곱교회에 보낸 하나님의 편지를 선택한 이유는 이 기도회를 통해 우리 교회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교회로 거듭나고 우리 모두가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과거의 경험이 어떠했든, 여러분 개인의 과거 역사가 어떠했든 이 말씀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에베소 교회는 정말 좋은 교회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에베소 교회에는 “행위와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행위와 수고와 인내’라고 짧게 요약되어 있는데 원래 이 열매 삼종세트는 이미 데살로니가 전서 1장 3절에 나옵니다. 거기서는 이 세가지에 대해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에베소 교회는 믿고서 가만히 있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마음에 있는 믿음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에는 믿음에 걸맞는 행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기 전의 모습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믿기 전의 삶을 청산하고 새롭게 살기 시작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던 사람은 우상을 버렸습니다. 비성경적인 직업도 버렸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에베소의 마술사들은 예수를 믿고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마술책을 모두 꺼내어 불태웠는데, 그것이 은 오만이나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의 수고를 했습니다. 바울이 3차 선교여행을 할 때였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성경은 바울과 장로들의 이별장면을 사도행전 20장 36절 이하에서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한 후 무릎을 꿇고 저희 모든 사람과 함께 기도하니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을 인하여 더욱 근심하고 배에까지 그를 전송하니라”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은 그렇게 거의 1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달려왔습니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부등켜 않고 엉엉 울면서 이별을 슬퍼할만큼 깊은 사랑과 사랑의 수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인내란 참된 소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소망하기에 흔들림 없이 고난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견디어 내며 믿음을 지켜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시험하여 내어쫓기도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자칭 사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분별하여 그들 스스로 가짜라는 것을 드러내고 떠나갈 수 밖에 없게 할 정도로 성숙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적인 정보들이 넘쳐나고 사람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이런 시대에도 한 교회가 통째로 이단적 성향으로 기울며, 많은 성도들, 심지어는 일부 목회자들까지도 이단의 유혹에 혹하여 그리로 몰려드는 것을 생각해 보면, 에베소 교회가 얼마나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있는 교회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이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찾아오는 고난을 참고 견디었고, 그런 와중에서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고난이 찾아오면 움츠러들고 소극적이 되기 마련인데, 에베소 교회는 그런 가운데서도 정말 인내하며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인내에 부지런함까지 겸비한 교회였습니다. 또 6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는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였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는데, 니골라 당은 믿음으로 구원받았으니 아무런 믿음의 행위도, 의무도 필요없다는 소위 율법 폐기론자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 변화되는 일에는 관심도 없고 노력도 없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믿는 것을 무슨 문화활동쯤으로 여기고, 믿는 자로서의 행위와 의무를 강조하면 불쾌해하면서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이런 자들의 행위를 미워했다는 것은 바로 에베소 교회가 믿음과 행위가 조화를 이룬 교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교회, 이런 성도들…… 여러분, 정말 부럽지 않습니까? 이런 교회에 점수를 준다면 우리는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100점을 주기는 미안해도 이 정도면 97점은 충분히 넘을 것입니다. A+짜리 교회와 A+짜리 성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장점이 많은 교회였고 주님도 그 사실을 알고 칭찬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칭찬받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을 소원하십니까? 그런 소원이 절실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그 소원부터 회복해야 합니다. 이 소원조차 없다면 우리는 좋은 성도가 될 수 없고,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런 소원부터 강하게 회복되게 해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칭찬받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것은 결코 애매한 것이 아닙니다. 아주 구체적인 것이고, 또한 아주 구체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에베소 교회,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내신 예수님은 “나무는 열매로 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열매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라는 나무입니다. 그렇지만 그 나무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그 나무의 진정성을 증명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바로 행위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 믿음에 걸맞는 행위가 따라붙게 마련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고 배 나무에는 배가 열리듯이 참된 믿음의 나무에는 참된 행위의 열매가 열립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 사람 신앙은 좋은데 인격은 영 아니야! 사는 모습은 아니야!” 성도 여러분, 과연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보면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격이나 행위가 모든 면에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부분인가는 부족하고 특별히 취약한 부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만약 믿는 사람의 삶의 태도에 전반에 대한 표현이고, 인격 전체에 대한 평가라면 그 사람은 참된 의미에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람을 변화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사는 모습을 달라지게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천천히라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그래야 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교회 전체적으로도 점점 그 모습이 나아져야 합니다. 그 교회의 믿음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행위는 무엇보다도 사랑의 수고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믿는 성도, 참으로 믿는 교회는 사랑하기 위해 헌신하고 애쓰는 모습을 취하게 됩니다. 교회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도 사도 바울도 우리가 교회 밖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 모습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사랑의 수고’라는 말을 깊게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은 과연 가슴 속에만 있을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바깥으로 표현되기 마련일까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성경은 사랑은 항상 속이 아니라 바깥을 향하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이란 항상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대상을 향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수고’.... 그래서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먼저 사랑하는 사람은 수고하게 되어 있다는 뜻이고 두번째로는 수고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의 유익과 기쁨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게 마련입니다. 사랑은 수고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도 자발적인 수고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서 수고하고, 다른 이들을 이해해 주려고 수고하고,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수고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수고하고, 또 그 사람의 상처를 치료해 주기 위해서 수고하고... 그렇게 사랑은 항상 사랑하기 위한 수고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사랑에서 나온 수고라고 해도 수고는 역시 수고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내 의지를 사용해서 움직일 때, 몸을 움직일 때, 그 때 수고할 수 있고, 그 때 그 수고는 사랑이 되고 사랑의 증거와 열매가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가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되려면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할 수 있는 사랑, 수고스러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있는데 쉽게, 저절로 사랑하게 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사랑에 대해서 이런 오해를 하는 것, 그래서 저절로 사랑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만 있고, 치열하게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는 이유는 기독교의 사랑, 참된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의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사랑을 명령하는 종교는 기독교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을 명령하셨습니다. 명령에 순종하려면 순종하기 위해서 나의 의지를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을 명령하신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을 통해서만 행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랑 자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하나님께서도 사랑하려고 수고하셨고 애쓰셨습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리셨고,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고, 우리를 위해서 그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모두가 다 사랑때문이었고, 사랑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억지로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힘들었을 것이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모든 의지와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과연 우리들 속에 주님께서 우리를 칭찬할 만한 사랑, 수고하게 하고 또 수고롭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사랑이 있는지, 우리의 믿음이라는 나무에서는 사랑이라는 열매가 맺혀지고 있고 또 주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이 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수고가 없다면, 수고스러운 사랑이 없다면 그 사랑부터 챙겨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노력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려고 애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서 그 사랑을 보시기를 원하고, 또 그 사랑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마음 속에만 머무는 믿음이 아니라 믿음에 걸맞는 행위가 있는 믿음이 되게 해 달라고, 그리고 그 믿음이 수고하는 사랑, 수고로운 사랑이 되게 해 달라고, 그래서 내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칭찬받는 성도와 교회가 되게 해 주소서. 그 동안 사랑하지도 않았고 또 사랑하려고 애쓰지도 못했다면 그런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