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현교회 설교,강의/수요일 저녁

2013.05.01.수요저녁-하나님의 뜻을 따라(고린도전서1)


고전0101to03- 하나님의 뜻을 따라(고전1).pdf


20130501WE (#1).mp3.zip




본문 : 고린도 전서 1장 1-3절


만약에 제가 어느날 선교에 대해서 알고 싶어서 공부를 하려고 한다면, 저는 그 일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학 책을 여러 권 사다가 탐독하며 공부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선교를 했던 선교사들의 전기나 기록을 찾아서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학 책을 통해서 선교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은 체계적으로 선교를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선교사를 통해 생생하게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배우거나 구체적인 상황에 필요한 지혜를 얻는데는 선교사들에 대한 실제 기록을 읽는 것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교회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말씀하는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이번 주부터 함께 공부하게 될 고린도전서이고 나머지 하나는 에베소서입니다. 이 두 권의 책 중에서 에베소서가 교회에 대한 이론서에 가까운 책이라면, 고린도전서는 실제적인 측면이 강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전서가 고린도 교회에 발생했던 여러가지 문제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질문을 했을 때, 주어진 답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고린도 전서를 함께 공부하는 일은 마치 선교학 책이 아니라 선교사의 전기나 실제 경험담을 통해 선교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고린도전서가 교회란 무엇인가? 또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란 과연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체계적이고 빈틈없는 가르침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가지 구체적인 상황에 필요한 실제적인 가르침과 교훈을 담고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는 우리에게 더 크고 실제적인 유익을 줍니다. 


고린도전서가 특히 오늘날의 한국교회에도 큰 도움이 되는 이유는 단지 이 고린도전서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당시의 고린도라는 도시와 우리나라가 너무 많이 닮아있고, 또 고린도라는 교회가 현재의 한국교회와 굉장히 많이 닮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시 고린도는 로마에서 동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던 도시로 사업, 상업, 무역 그리고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물질문명은 무척 발달하고 경제적으로는 풍부하였지만, 정신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는 매우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썩은 욕망을 따라서 정말 다양한 우상들을 섬겼으며, 수많은 철학들과 가치관들이 뒤섞여서 저마다 큰 소리를 내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취향에 맞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지킬 것을 지키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향해 “꼭 고린도인들처럼 산다”고 말했다고 하니 당시의 고린도의 타락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짐작이 가능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로 그러한 환경 속에서 예수님을 믿게 되고 또 신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성도와 교회는 둘 중의 한 쪽을 택하게 되기가 쉽습니다. 한편에서는 신실하게 살면서 자신이 사는 세상을 구속하고 바꾸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길을 택하지만  다른 편에서는 세상의 모습을 닮아가는 길을 선택합니다. 속속들이 세속화된 환경은 성도들이 중간 어디에 머무는 것을 굉장히 어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둘 중에서 뒤쪽을 택했습니다. 아마도 그게 훨씬 익숙하고 편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세속적인 문화와 사고방식들의 영향에 완전히 노출되어있었을 뿐아니라, 거듭나지 못한 세속적인 사고와 삶의 방식을 고스란히 교회로 가지고 들어오고 있었고 그래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한국교회와 고린도 교회는 닮은 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는 이렇게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신앙을 온전히 지키기에는 정말 만만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고린도에서는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머물면서 사역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떠나자 마자, 고린도 교회에 교회에서 생겨날 수 있는 문제란 문제는 거의 다 생겨났던 것을 보면 그 도시와 거기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황폐함이 얼마나 깊고 심각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문제들과 갈등을 경험하는 일은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가 그런 교회였기 때문에 오히려 오늘날 고린도 전서를 읽은 우리들에게는 그만큼 커다란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선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이 교회 안에서 겪게 되는 문제를 미리 겪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고린도전서는 바로 그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를 위한 반면선생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왜 그런 문제들이 생겨났는지를 살펴보면 그 문제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가 있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답변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 안에 그런 종류의 비슷한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줍니다. 


고린도전서도 그렇지만 신약성경에 속하는 서신서들은 대개가 그 당시의 교회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 때문에, 그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주기 위해서 쓰여진 목회편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그런 교회들이 모두 무너진다고 가정한다면, 그 중에서 어떤 교회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상식적일까요? 문제가 가장 많은 교회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였다면 고린도 교회가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입니다. 지금 신약의 서신서들을 편지로 받았던 다른 모든 교회들은 다 역사 속의 유적으로 밖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고린도 교회는 오늘날도 여전히 그 때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라는 이름으로 성도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엄청난 문제들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했고, 또 거기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완전하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계속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말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져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당시 고린도 교회보다 훨씬 더 건강했던 다른 교회들은 그 반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고린도 교회보다 훨씬 건강한 교회들이었지만, 그 교회들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실패했고 결국 그렇게 유적으로만 남는 비극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가 주는 두번째 영적인 유익과 교훈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나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중에서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항상 말씀드리지만 교회는 곧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모습은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부족함은 교회의 부족함이고 우리의 연약함은 교회의 연약함이며 우리의 죄는 곧 교회의 죄가 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한데,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만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과 성령님의 역사가 그러한 부족함을 덮어주고 상쇄시켜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교회는 결코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회는 하나도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진짜 문제는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극복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 문제가 많이 있을 수도 있다, 해결 방법은 성경을 따르는 것이다, 성경에 나와있는 교회와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더라도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고 교회 전체가 그렇게 하려고 계속해서 애쓰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다시 세워질 수 있다, 다시 회복될 수 있다, 과거는 문제삼지 말아라, 지금부터 당신부터 그렇게 하면 된다, 증거를 보여달라고? 그 증거가 바로 우리들이다.” 


그렇게 문제많던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셨던 처방전을 따랐을 때, 그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고 지금까지 그 자리에 존재할 수 있었다면, 아무리 문제가 많고 신앙적으로 어린 교회나 성도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모든 문제들을 적어도 크게 지장이 없는 수준까지는 해결하면서 아름답고 든든한 교회와 성도로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그리고 그 교회인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들 속에 고린도 교회를 닮은 모습들이 있다면, 또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이 있다면 우리들 또한 고린도전서 속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처방을 찾아내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 그리고 지금 우리 속에 있는 문제는 절대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정말 결정적인 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를 위한 최고의 의사가 되시는 하나님의 처방을 그대로 따를 것인가, 그럴 의지가 있고 그럴 각오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고린도 교회가 바울의 처방을 따르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굉장히 힘들고 아팠을 것입니다. 우선은 그런 문제와 연약함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으며 또 그런 문제들, 어쩌면 이미 익숙해진 문제들과 싸워 이겨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치료의 과정, 회복의 과정은 달콤한 물약만 마셔도 되는 과정이 아니라 그런 아픔과 어려움을 감당해 내야 하는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의 온전한 회복과 건강을 위해서 그 모든 치료과정을 기꺼이 통과한다면 우리들 또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영광스러운 교회와 성도들로 회복되어질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로 견고하게 세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는 애초에는 편지로 쓰여졌기 때문에 당시의 편지를 쓰는 습관에 따라서 맨 앞에편지를 보낸 발신인이 나오고 그 뒤에 그 편지를 받는 수신인과 그 수신인에 대한 인삿말이 나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부분은 편지의 인삿말에 속하는 부분인만큼 그저 그 당시의 편지 형식과 예의에 맞춰서 별 뜻 없이 적어내려간 것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편지라면 그렇지 않지만 성경이기 때문에 이 인삿말과 그 인삿말을 채우고 있는 단어 하나 하나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소중한 메세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 하나 하나의 단어는 가장 적절한 말을 고르기 위한 바울의 심사숙고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들을 향한 심사숙고하심도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고린도 전서가 기록되었던 때, 소스데네는 바울의 편지를 대필해 주는 바울의 조수이거나 혹은 바울이 가르치고 양육했던 바울의 영적인 자녀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소스데네를 자신의 형제라고 기록하게 하고 있습니다. 당시 바울은 사도로서 굉장한 영향력과 영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이것이 바울 자신이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면 소스데네는 자기 스스로를 자신을 바울의 형제라고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소스데네는 바울의 조수입니다. 아니면 바울이 가르치고 양육한 영적인 자녀일 것입니다. 어떻게 보아도 당시의 풍습으로 보아 바울이 ‘형제’라는 말로 동등하게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아닙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소스데네를 자신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스스럼 없이 그렇게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주 안에서 나와 동등한 나의 형제라고 이야기 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 말 성경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지만, 원래 형제라는 말 앞에는 ‘우리의’라는 말이 들어가야 정확한 번역이 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소스데네를 ‘우리의 형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말합니까? 바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 자신과 그 편지를 읽고 있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소스데네는 사도 바울의 형제인 동시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형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소스데네를 통해 누구와 누구가 다시 형제로 이어집니까?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소스데네를 형제로 말하면서 소스데네 뿐만 아니라 너희들도 나의 형제라고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정말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서 갈등과 파벌이 있었고 그들은 그것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 교회 안에 있지만 한 몸이 아니었고, 여러 개의 몸으로 찟어져 있었으며, 이미 고린도 교회 안의 파벌은 단순히 다르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내가 너보다 낫고 너는 나보다 못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우등반 크리스챤이고 너는 열등반 크리스챤이라는 의미까지도 지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사이의 형제됨이 깨어져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높낮이, 우등과 열등이 있는 한 그들 사이에는 참된 형제됨이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로 부터 그들에게 도착한 편지는 그 인삿말부터 충격적인 메세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조수를, 그리고 자신의 영적인 자녀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그렇게 깨어지고 찢어진, 서로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 그렇게 일많고 탈 많으며 말썽만 부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너희도 나의 형제’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관계로 만납니다. 역할에 따라 직분에 따라, 그리고 연령에 따라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관계로 만나게 됩니다. 이런 관계들은 특히 우리나라처럼 위계질서와 나이가 중요한 나라에서는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그런 의미들은 사라지고 없어져야 할 차이라기 보다는 적절하게 인정하며 선용해야할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이와 직분,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위계질서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이고 자매’라는 사실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우리를 하나로 묶는 가장 크고 근본적인 틀은 우리가 ‘형제와 자매’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이 차이가 인정되는 것도 형제와 자매라는 틀 안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며, 위계질서가 유지되더라도 형제와 자매라는 틀 안에서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든 것들은 교회 안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 이 모든 것들은 교회 안의 덕과 유익을 위한 적절한 권위가 아니라 교회를 아프게 하고 병들게 하는 권위주의라는 굳어져 버린 올가미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교회 안에서는 서로 간에 어떤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이 서로 간의 열등함과 우월함을 만들어 내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 어떤 입장의 차이, 그 어떤 의견의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내가 누구보다 못하거나 낫다다는 조건이 될 수는 없고, 그래서 그것이 형제됨을 깨뜨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형제라는 개념은 원래 가족개념입니다. 가족이라는 것은 그 어떤 관계나 차이보다도 원초적인 것입니다. 공부를 잘해도 가족이고 공부를 못해도 가족입니다. 못 났어도 가족이고 잘났어도 가족입니다. 신앙이 좋아도 가족이고, 신앙이 나빠도 가족입니다. 성숙해도 가족이고 미숙해도 가족입니다. 그 어떤 이유로건 형제라는 관계, 가족이라는 관계 자체를 취소시키거나 깨뜨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니까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를 쓸 당시 고린도 교회는 문제란 문제는 다 안고 있는 문제 백화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래도 이들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들을 향해서 그 모든 문제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의 형제라고 말합니다. 나는 단 한 순간도 너희가 나의 형제라는 것을 잊거나 포기한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사랑어린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을 위한 가장 좋은 처방전이기도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정말 어려운 문제들을 많이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진짜 큰 문제는 그 문제를 신앙 안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그 문제를 중심으로  갈등하며 점점 더 깨어져 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내가 너희의 형제이듯이 너희들도 서로 형제’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며, 그것은 깨뜨릴 수도 없고 깨뜨려서도 안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오게 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치료약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보면서 이렇게 교회의 형제 자매됨을 지켜나가는 방법에 대한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소스데네의 형제이며,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형제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형제와 자녀됨은 권위와 질서에서 볼 때, 위에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차이점에 있어서도 스스로 다른 이들보다 낫다고 여기고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지키고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질서상 아래 쪽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들 스스로 높이있는 권위에 대해 나는 너희와 동등한 형제와 자매라고 주장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조수나 양육받은 성도들이 상전이요 목회자가 되는 사람을 향해 나는 너의 형제다라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높다는 것은 항상 낮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에서 높은 권위에 있는 사람들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항상 자신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형제와 자매로 자리매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사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는 것을 뜻합니다. 애초에 모든 성도들은 형제와 자매로 부름받기 때문입니다. 


주어진 권위나 나이는 아래를 만들고 위를 만들지만, 의견의 차이나 혹은 다른 차이점들은 모두가 서로를 향해 내가 더 높다고 주장하고, 서로를 향해 네가 나보다 더 열등하다고 무시하는 모습을 띄게 됩니다. 이런 경우에는 바울의 알려준 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조금 달라야 합니다. 이 때는 서로가 함께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형제와 자매의 자리로 말입니다. 차이점이 형제와 자매됨을 깨뜨리려고 할 때는 빨리 알아차리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해도 상대편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편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형제의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자리이며, 그래서 거기가 하나님 앞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그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모든 권위나 의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형제요 자매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그 한 가지 사실을 붙들고 서로 어울려 살다보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갈등과 다툼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광현교회의 지체된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형제입니다. 하나님을 한 분 아버지로 모신 형제요 자매들입니다. 그 어떤 직분의 차이, 그 어떤 권위의 차이, 그 어떤 나이의 차이나 능력의 차이도 우리가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보다 중요하거나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이유가 있고, 어떤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서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깨뜨려서도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가 깨집니다. 가족이 깨집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우리 스스로 그것을 깨뜨리지 않는 한, 우리 교회는 그 어떤 이유로도 깨어지거나 갈라지지 않을 것이며, 더 단단한 하나로 묶여져 갈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항상 형제와 자매 안에 머묾으로서 모든 차이와 갈등을 넘어서서 교회의 교회됨을 지켜가고 더 온전케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