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0207to1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요일6).pdf
본 문 : 요한일서 2장 7-11절
아주 오랫동안 진짜로 들어야 할 이야기를 참된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실제로는 듣지 말아야 할 틀린 이야기만을 계속 들어왔다면, 그 사람에게 갑자기 진짜 이야기, 참된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 사람은 과연 그 진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요? “아, 이제 보니 저것이 진짜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온 것이 가짜다.”라고 생각하며 새롭게 들은 이야기를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반대가 되기가 훨씬 쉽습니다. 제가 대학시절에 성경공부를 인도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희 조원 중에 친하게 지내던 후배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참된 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중, 그 때 성경본문을 거의 그대로 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형, 그런데 그게 정말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맞지. 너도 지금 성경에서 읽고 있지 않니? 내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와있잖아?” 그랬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가버렸습니다. 그 아이가 왜 그랬을까요? 제가 들려준 이야기, 성경이 맞는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맞기는 맞는데, 받아들일 수가 없고, 받아들이기가 힘드니 그렇게 뛰쳐 나갔던 것입니다.
어떤 것에 익숙해지면 그 이외의 것은 일단 어색하고 생소하게 여겨지게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예전에 이미 들었던 것들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익숙해진 것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한다면 참된 것으로 나아오지 못하고 또 바른 상태로 회복될 수가 없습니다.
사도 요한의 편지를 받은 교회의 성도들은 익숙해지지 말아야 할 것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한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지 않고, 또 미워하면서도 그것에 대한 아무런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활이 너무 당연해지니 오히려 그들이 원래 가져야 할 모습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고, 거기에 어색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들이 듣기에는 생소하고 어색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은 옛 계명이라고,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는, 아니 나는 과연 어떤가 하고 말입니다. 혹시 익숙해지고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며 단 마음으로 들어야 할 옛 계명, 그러니까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나에게는 불편하고 익숙치 않으며 거북한 메세지로 들려지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별로 문제의식이 없고, 사랑하라는 말을 들려주어도 무감각하며 그 계명의 무게를 느끼지 못하는 모습이 제 속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라’는 메세지, 그리고 ‘미워하지 말아라’라는 메세지를 들으면 어떤 마음과 감정을 가지게 되십니까? 혹시 듣지 않았으면 하는 이야기, 부담스러운 메세지를 듣는다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생겨나지는 않으십니까? 진심으로 그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만 혹시라도 그런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오히려 우리는 오늘 주님의 말씀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새 계명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어색하고 처음 듣는 것같이 여겨지는 새 계명이 아니라 이미 익숙해져 있어야 할 옛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새 계명이 그 당시 요한의 편지를 받는 교회에게는 새 계명이 되어있습니다. 옛 계명이 마치 생각한지가 너무 오래되어서 완전히 망각되어버린 것같은 상태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원래는 누군나 알고 또 익숙해져 있어야 할 옛 계명이지만 너무 생각하지 않고 무관심해져 버려서 새 계명이 되어버린 그 계명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지금은 처음 듣는 것처럼 어색하고 거북해져 버린 옛 계명은 실은 예수님에게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도 참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어둠이 지나가고 벌써 참 빛으로 비추어 주심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미 참 빛으로 비추어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빛에 속한 것을 기뻐합니다. 반대로 어둠에 속한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성도들도 잠시 동안은 빛에 속한 일에 무관심해 질 수 있고, 오히려 어둠과 가까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라도 다시 빛이 비춰지면 빛으로 나옵니다. 다시 참된 것을 받아들입니다. 이것 때문에 성도들은 언제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이미 비추임을 받았기 때문에 빛을 알아볼 수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 이것이 성도들의 희망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참 빛의 비추어주심을 받은, 빛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빛에 속한 사람은 빛에 속한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불편해도 좋아해야 하고 어색해도 좋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적인 감각과 분별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바른 길을 가지 못합니다. 10절과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여 갈 곳을 알지 못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사랑이 빛이라면 미움은 어둠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빛 속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어둠 속에 있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죠. 그렇지만, 실제로 사는 것을 보면 방향을 잡지 못합니다. 미움이라는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바른 방향을 찾는 영적인 감각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 빛이라면 미움은 어둠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가까울 수록 우리의 삶과 영혼은 더 환해지고 사랑에서 멀어질수록 더 어두워집니다. 그 반대의 경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우리 자신이 빛 속에 살아가면서 정확하게 분별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은 빛이고 미움은 어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하라는 주님의 계명은 적어도 빛에 속한 우리들에게는 어색하고 거북한 새 계명이 아니라 이미 익숙해져 있고 편안해져 있어야 할 옛 계명이라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이 들려올 때마다 그렇게 느껴지도록 생각하고 묵상하며 기도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사랑에 있어서 자라가심으로써 점점 더 환한 빛 가운데서 밝히 보며 거리낌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