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일0321to24-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요일16).pdf
본 문 : 요한일서 3장 21-24절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왜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가 진리에 속해 있는 줄 알게 되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담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과연 진리 쪽에 든든히 속해 있는지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구절들을 읽기 전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이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 왔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믿음에 걸맞는 모습이 발견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 오지 않았습니까?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껴질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하나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은 참된 사랑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랑 속에 행함과 진실함이 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볼 때, 그 속에서 스스로 책망할 거리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 속에 진실이 담겨져 있고 행함이 들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을 때, 우리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믿음에 대해서 담대함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기도와 연결시켜 보면 그럴 때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22절은 우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될 때, 그 기도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실까요? 사도 요한은 같은 절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예수님의 형상이 점점 더 진해지고 분명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공짜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고 자신을 기쁘게 해 주어도 입을 싹 씻고 모르는 척 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 대한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이 바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우리에게도 그런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흉내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사랑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사랑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두번째 이유,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는 정말 능력있는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진리 속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풍성하게 증거되어 있습니다. 명령은 의무입니다. 당연히 해야할 것입니다. 명령을 따랐다고 상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명령을 따르면, 그것도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아도 그 명령을 제대로 지키려고 마음을 쏟아서 애쓰면 상을 주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 어마 어마한 상을 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선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행함과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아주 제대로 이기적이 된다면, 정말 지혜로운 이기주의자들이 된다면, 아마도 사랑은 여전히 어렵기는 해도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기도응답의 약속이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정말 욕심내야 할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얻는 것이 조금 힘들다고 해서, 얻기는 쉽지만 큰 만족도 없는 것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대로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 덜 이기적인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욕심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짜 욕심쟁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일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꼭 치러야 할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고 정도로 크고 제대로된 욕심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응답의 약속을 얻기위해 기꺼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제대로된 진짜 복에 가장 크게 욕심을 부리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여기 나와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되게 하려면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아야 하며, 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랑 속에 담긴 진실함의 함량을 높여가야 하며, 행함의 비율을 높여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믿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굉장한 복이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것은 불순종이 되지만, 사랑하려고 애쓰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늘의 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어 줍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셔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응답을 통해 하늘의 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문 : 요한일서 3장 21-24절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왜 말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그래야 우리 스스로가 진리에 속해 있는 줄 알게 되고 우리 마음을 주님 앞에서 담대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가르침에 의하면 우리가 과연 진리 쪽에 든든히 속해 있는지 확신할 수 있도록 해 주고,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설 수 있으려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되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확신을 가지려면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구절들을 읽기 전이라도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이런 경험을 반복해서 해 왔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믿음에 걸맞는 모습이 발견되지 않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해 오지 않았습니까?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느껴질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 안에 참된 믿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그래서 구원의 확신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을 하나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일이 아닌가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은 참된 사랑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랑 속에 행함과 진실함이 들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기쁘게 받아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우리의 사랑을 볼 때, 그 속에서 스스로 책망할 거리를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 속에 진실이 담겨져 있고 행함이 들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는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사랑이 있을 때, 우리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사랑하게 될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유익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믿음에 대해서 담대함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고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기도와 연결시켜 보면 그럴 때 우리의 기도 또한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게 드리는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22절은 우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될 때, 그 기도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는” 기도가 될 수 있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구하는 대로 주실까요? 사도 요한은 같은 절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 우리가 잃어버렸던 예수님의 형상이 점점 더 진해지고 분명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공짜가 없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좋은 것을 주고 자신을 기쁘게 해 주어도 입을 싹 씻고 모르는 척 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 대한 상을 주십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이 있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이 바로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우리에게도 그런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어렵게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주님의 사랑을 흉내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것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명령이라는 것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면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고 불완전해도 사랑하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이유입니다. 이것만 가지고는 사랑하기가 굉장히 힘듭니다.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두번째 이유, 그리고 정말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의 기도는 정말 능력있는 응답받는 기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진리 속에도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풍성하게 증거되어 있습니다. 명령은 의무입니다. 당연히 해야할 것입니다. 명령을 따랐다고 상을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명령을 따르면, 그것도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아도 그 명령을 제대로 지키려고 마음을 쏟아서 애쓰면 상을 주십니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는’ 어마 어마한 상을 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사랑하라는 명령은 우리에게 부담이 아니라 복을 주시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은혜의 선물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 행함과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부족함과 이기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아주 제대로 이기적이 된다면, 정말 지혜로운 이기주의자들이 된다면, 아마도 사랑은 여전히 어렵기는 해도 우리가 정말로 하고 싶어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에 기도응답의 약속이 묶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욕심이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정말 욕심내야 할 것에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얻는 것이 조금 힘들다고 해서, 얻기는 쉽지만 큰 만족도 없는 것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며 거기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대로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아직 덜 이기적인 것입니다. 욕심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아직 욕심이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진짜 욕심쟁이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일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꼭 치러야 할 대가를 기꺼이 치르려고 정도로 크고 제대로된 욕심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기도 응답의 약속을 얻기위해 기꺼이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제대로된 진짜 복에 가장 크게 욕심을 부리는 것.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바로 그것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새벽마다 여기 나와서 이렇게 부르짖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런 기도가 되게 하려면 먼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우리의 소원으로 삼아야 하며, 또 어쩌면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 조금씩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랑 속에 담긴 진실함의 함량을 높여가야 하며, 행함의 비율을 높여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믿음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이 있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는 것은 우리 주님의 우리를 향한 명령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굉장한 복이 있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것은 불순종이 되지만, 사랑하려고 애쓰면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늘의 복을 가져오는 통로가 되어 줍니다.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셔서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기도응답을 통해 하늘의 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