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에베소서 6장 01-04절
우리는 지난 두 주간 하나님께서 에베소서를 통해서 성도들의 가정에 주신 말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우리가 특별한 시기에 이런 말씀들을 함께 묵상하며 그 속에서 우리의 가정을 좋은 가정, 아름다운 가정으로 만들기 위한 여러가지 교훈과 지혜를 얻을 일도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일이지만, 그 모든 일에 앞서서 우리의 마음에 새겨놓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무척 중요하게 여기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교회생활도 충실히 해야하지만, 그 만큼 가정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단순히 나의 행복이나 만족을 위해서 필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성도의 중요한 의무와 책임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기를 원하시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뜻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 가정 안에서라야 우리의 자녀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건강하게 자라나 교회와 사회를 위한 기둥과 일군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의 부모들만큼 부모노릇하기 어려운 부모들은 이 세상에 또 없을 것입니다. 자녀를 공부시켜야 합니다. 중학교 까지는 의무교육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더 큰 부담이 되는 것은 사교육입니다. 남들 다 시키는 것은 나도 시켜줘야 하고,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남부럽지 공급해 주고 싶어하는 욕심과 부담감도 있습니다. 근래에는 취직의 문이 너무 좁아져서 학교를 모두 졸업하고 취직할 때까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경우 집 사주고 살림마련해서 결혼도 시켜주어야 하고, 자녀가 손주를 낳으면 손주들을 맡아서 길러 주어야 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노후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의 노후생활을 위한 경제적인 준비도 어느 정도 해 놓아야 합니다. 정말 한 사람이 한 번 사는 인생을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을 다 감당한다는 것이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환경에 있든지 부모는 좋은 부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부모들의 소원일 뿐만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부모인 자신에게 자녀를 맡기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그냥 좋은 부모가 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도라면 신앙 안에서 참된 부모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부모역할을 해 나가야 합니다. 실은 이것이 믿는 부모들이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서 더 짊어져야 할 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른 일은 몰라도 나중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자녀를 어떻게 키웠느냐 하는 문제는 따지고 넘어가실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은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너무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일을 통해서 세상이 이어져 갈 뿐만 아니라, 그 세상의 모습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나 다음에는 바로 그 자녀들을 통해 그 분의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 자녀는 하나님께서 다 책임져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내 자녀이기에 앞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 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녀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 아이의 부모인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분명히 개성은 있지만 어찌보면 백지와도 같은 아이들, 하나님은 그 아이들 위에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그리고, 하늘나라를 그려 줄 것을 기대하시면서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그림을 그려주지 못한다면,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백지 위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른 그림을 그릴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위에 그려진 그 다른 그림을 지우시고 원래의 그림을 그리시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수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손해를 보시고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어른이 되고 나서, 나중에 사고방식이 바뀌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을 정말 절감하게 됩니다. 신앙이 있으면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미 형성되어진 가치관이나 사고방식, 특정한 일에 대한 생각을 수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번 잘못 배운 사고방식이나 잘못 형성된 가치관을 고치는 일은 인간적으로만 본다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사람은 사람들 사이에 살며 한 사람의 인격으로 형성되어 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부모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아비들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자녀는 부부가 함께 키웁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아비들아”라는 말로 부모가 해야할 일, 부모라면 감당해야 할 역할들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아버지가 가정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자녀양육의 일차적인 책임 또한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기준으로 볼 때, 아버지들은 자녀양육과 교육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들에게 떠 넘길 수가 없습니다. 자녀에게서 부정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 아내의 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녀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이 아버지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자녀양육의 책임은 부부 모두에게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협력이 아이의 모습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자녀 속에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다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쟤는 누굴 닮아서 그래?”라고 하지 마십시오. 내 자녀들인데 그 아이들이 닮으면 누구를 닮겠습니까? 나 밖에 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자녀 양육에 대해 첫번째로 요구하시는 것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의 부모들은 물론이고,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부모라면 오늘날에도 받아들이기가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특히 아버지들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부모의 모습을 전통적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분들 중에서 자녀들의 감정까지 헤아리고 존중해 주는 부모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이 주어진 시대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 요구인지를 알게 됩니다. 당시는 어린 아이들은 심하게 말하면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부모에게 속한 부속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인구를 조사할 때도 아이들은 계수에 들지 않았습니다. 로마에서는 아이가 성인식을 하기 전까지는 아들이 아닌 노예 중의 한 명 쯤으로 여겨지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문화 속에서 나고 자라난 사람들을 향해서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정말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요구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이 말씀을 더욱 더 무겁게 생각해 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래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냥 말 그대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뜻도 있고, 또 결과적으로 자녀를 쉽게 화를 내는 자녀로 키우지 말라는 뜻도 있습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일단은 자녀를 노엽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주님의 부모들을 향한 일차적인 명령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그렇다면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이 언제 부모들에게 분노하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녀는 언제 부모인 나에게 분노하게 될까요? 수없이 많겠지만 오늘은 몇 가지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함께 생각하시면서 나에게는 그런 모습이 없었는지 되돌아 보고, 예비 부모들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를 배우는 예습시간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첫째, 부모들의 교회에서의 모습과 가정에서의 모습이 다를 때 자녀들은 부모에게 분노하게 됩니다. 교회에서는 정말 그럴 듯하고 거룩하게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줄 압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그것을 다 압니다. 부모의 두 모습이 심각하게 다르다고 여겨질 때, 자녀들은 자기 부모에게 굉장히 분노하게 됩니다.
두번째로, 부모가 분명히 크리스챤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들이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자신을 양육할 때, 자녀들은 분노하게 됩니다. 자라면서 부모의 자신을 향한 요구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을 때,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게 되고 분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매일 일등만 하라고 하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하고 돌아와야 한다고 가르치면 어려서는 몰라도 나이가 들면서는 아이들은 부모의 신앙에 대해서 반항하게 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분노로 나타나게 됩니다.
세번째로 부모의 양육이 일관적이지 않을 때, 즉 부모의 양육방법이 원칙이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이루어질 때 아이들은 분노합니다. 예를 든다면 꾸중을 듣는데, 자녀가 느끼기에 그것이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부모의 감정풀이라고 느껴질 때, 또 어제는 똑같은 일을 하고도 그냥 넘어갔는데, 오늘은 엄청나게 혼났다면 아이는 그런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분노하게 됩니다. 우리는 크리스챤 부모로서 자녀들을 이렇게 대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것들을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의 두번째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를 잘 내고, 잘 싸웁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면, 사계절이 뚜렷한 환경에서 생겨난 민족적인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부모로부터 학습을 통해 대물림된 것이라는 것을 부인하기 힘듭니다. 어느 유치원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아이가 계속해서 옆에 있는 아이와 떠들며 수업분위기를 깨뜨렸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이 그 아이를 체벌하지 않고 조용히 타이르자, 가만히 보고 있던 한 아이가 아주 이상하다는 듯이 선생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선생님, 왜 쟤 맴매 안해요?”라고 말입니다. 이상해서 가만히 알아보니 이 아이는 잘못하고 실수하면 용서받고 이해받기 보다는 체벌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정의 아이였다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항상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치고 부드럽고 차분한 성품을 가진 자녀가 많지 않습니다. 보고 자란 것이, 자기가 받은 대우가 그렇기 때문에 그 자녀에게는 차분하고 조용히 말하는 것보다는 화내고 소리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일이 안 풀리고 자기 맘대로 안되면, 소리치고 화를 냅니다. 또 용서보다는 처벌을 많이 받고 자란 자녀는 다른 이들을 용서하기 보다는 처벌하는데 익숙합니다. 자기가 힘이 있는 경우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폭력을 써도 괜챦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것은 통계적으로 증명된 일입니다. 분노는 분노로 이어지고, 폭력은 폭력으로 대물림 됩니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게 함부로 화를 내서는 안되고, 그렇게 해서 자녀를 화를 잘 내는 자녀로 키워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분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내가 자녀들에게 함부로 화내고, 그래서 자녀들을 화를 잘 내는 사람으로 키울 때, 그 자녀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자녀로 성장하기가 그만큼 힘들어 집니다. 그 분노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변함없고 신실한 삶을 사는 일에 심각한 장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화 잘내는 아이로 키우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 원리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크리스챤이다”라고 소개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내가 믿는 종교를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나 자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과 세상과 인생, 그리고 그 안의 일들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크리스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양육법에 있어서도 크리스챤이 아닌 사람과는 달라야 합니다. 내가 크리스챤이라는 말 안에는 내 자녀는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맡기셔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키우도록 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고방식이 포함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없다면, 우리는 아직 적어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자신을 진짜 크리스챤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녀인데 바로 그 부분에서 아직도 크리스챤다운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아이를 키워줄 어떤 사람을 고용했는데, 그 사람이 여러분의 자녀를 여러분 집안의 가풍이 아니라 자기 집의 가풍대로 키운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감사하고 칭찬하시겠습니까? 그럴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왕이라면, 그래서 왕자를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이 왕자를 자기 집 가풍대로 키운다면 말입니다. 그 일은 나라 전체를 흔드는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녀를 키우는 일이 하나님께는 이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녀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하나님 나라 전체와 관련된 일이니까요.
내 자녀가 내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나는 단지 양육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한다면 그를 사랑해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랑하려고 노력할 것이며, 그를 양육해도 하나님의 방법대로 양육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집안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 사람 답게 만들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의 교훈과 너의 훈계가 아니라, 주님의 교훈과 주님의 훈계말입니다. 여기서 교훈은 말로 하는 옳고 그름에 대한 교육을 의미한다면, 훈계는 그런 사고방식과 일치하는 삶의 훈련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훈계는 좋은 습관,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다운 행동과 삶의 방식을 몸에 배게 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긴 자녀들을 생각도 마음도 그리고 사는 모습도 크리스챤다운 사람으로 키우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런 사람인가 하는 것은 이미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실 줄 압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크리스챤의 모습이 있을 것입니다. 생각도 삶도 정말 존경할만한 참된 성도의 모습 말입니다. 자녀를 바로 그 모습으로 키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성도로서 바른 가치관을 가지도록 가르치고 그 가치관에 따라 살아가는 구체적인 습관을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이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행하는 자녀교육과 성경이 요구하는 교육 자체가, 그리고 그 근본정신이 거의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기본적인 마음과 욕심은 다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양육하려면 그런 마음을 잘 다스리고 절제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무조건 최고가 되게 하고, 성공하게 하려는, 남들이 하는 대로 다 하게 하려는 그 마음을 누르고 다스리지 않고서 자녀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아이로 기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해 주고 싶은 것, 하게 하고 싶은 것을 다 해주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 다 요구한다면 그것은 세상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앞에 놓고 부모된 자신에게 진지하게 묻고 또 대답해야할 것입니다. 과연 나의 양육은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 양육이었는지, 아니면 ‘세상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한 훈계’였는지 말입니다. 나의 양육은 세상에 속한 사람을 만들기 위한 양육이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기 위한 양육이었는지 말입니다. 여러분의 양육은 어떤 양육이었습니까? 또 예비 부모들과 갓 부모가 되신 성도들은 자녀양육과 교육에 대한 방향을 미리 확고하게 잡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고 공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교육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이 되게 하는 교육”과 “어떻게 살게 하기 위한 교육”이 그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 교육은 “무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습니까? 만약 우리의 자녀교육이 일반 사회교육이 요구하는 것을 뒤따라가는 교육이었다면 우리의 자녀교육의 대부분은 무엇이 되게 하기 위한 교육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신앙교육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행해야 할 교육은 철저히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에 대한 교육입니다. 성경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 되어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누리며 사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언제나 어떤 존재가 되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이 되며, 또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집니다. 성경적으로 볼 때, 무엇이 되어 무엇을 가지고 또 누리고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실제로 거의 중요하게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이제까지 자녀들이 이런 저런 것을 이루게 해 달라, 저것을 소유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면, 이제라도 자녀들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자녀의 가정이 그런 가정이 되도록 진심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들이 장성했더라도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내가 추구하는 것들과 살아가는 모습 중에서 크리스챤 답지 않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정리하시고 성도답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부모된 여러분의 모습을 통해 자녀들을 성도로 살아가도록 설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부모인 여러분을 생각할 때, 주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고 그래서 가장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부모가 되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도 부모된 여러분을 참으로 칭찬해 주시며 여러분의 가정을 가장 복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그들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그 사람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들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을 연습하며, 하나님의 사람들로 다듬어져 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세 주동안 크리스챤의 가정에 대해서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 말씀들은 좋은 부모가 되는 방법도, 훌륭한 배우자가 되는 방법도,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방법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족들을 사랑하는 참된 방법에 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교훈에 순종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는 훌륭한 배우자, 좋은 부모, 좋은 자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고, 우리 가정은 가장 행복한 가정이 될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건 당연한 것입니다. 가정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져 가는 가정이 최고의 가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그 분의 하늘가정이 하나님을 닮은 자녀들로 가득찬 가정이 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에게 이 소중한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한 명의 거듭난 성도로서 가족들을 진실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닮은 사랑으로,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서로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가정의 행복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의 미래도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니까요.
하나님께서 가정의 달 5월에 우리 모두가 가정에서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사랑함으로써 하나님 앞에 더욱 거룩하고 순결하게 세워져 가게 하시며,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사랑의 공동체가 되게 하시는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