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0110to17 - 너희를 권하노니(고전4).pdf
본문 : 고린도전서 1장 10절 - 17절
여러분은 아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점점 더 극단적으로 개인주의적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사회가 개인주의화 된다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는 개인이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가치를 가지게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더불어서 그 개인의 자유와 프라이버시 또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적어도 개인적인 영역에 있는 모든 일들은 전부가 내 자유고, 내 프라이버시에 속하게 된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에 결국 내 삶에는 그 누구도 참견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점점 사람을 경책하고 훈계하는 일이 힘들어 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실제로 요즘 아이들을 대해보면 훈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무리한 행동,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 옳지 않은 행동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지적하고 훈계를 하려고 하면 아예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내 자유인데 왜 당신이 참견하느냐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아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아이들 뿐만이 아닙니다. 어른들도 점점 더 자신의 잘잘못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일에 어색해져 가고 있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불쾌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문제는 누가 뭐래도 자신의 권리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것에 대해서 무어라 말할 권리도 자격도 없습니다.
문제는 이런 경향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개인의 삶에 관계된 부분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할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보면 분명히 삶의 구석 구석의 문제들을 모두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피해야 할 금기사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런 본문을 만날 때면 슬그머니 넘어가거나 물을 잔뜩 타야합니다. 만약 그런 부분을 직접 건드리려면 금방 ‘네가 뭔데 그것까지 참견이냐?”라는 따가운 눈초리를 만날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전의 경험이지만 성도들의 상담에 응해서 이야기를 할 때면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모릅니다. 대부분이 생활이나 신앙에서 부딛히는 문제들을 들고 찾아오시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목사로서 자괴감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이러 저러하게 성경을 기준으로 해서 이야기를 해 주지만 그것은 목회자의 지도가 아니라 그야 말로 조언에 불과합니다. 참고사항 말입니다. 결국 신앙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해도 그런 것을 말하기가 쉽지 않고, 말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그저 의견을 말하는 수준에서 끝내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성도 개인의 자유에 맡겨놓은 채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바울은 인사말을 끝내고 나서 곧바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교정에 들어갑니다. 앞서 살펴본대로 비록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정말 많이 사랑했고 끝까지 소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아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잡아주어야 할 문제가 있을 때, 그는 그 문제가 없는 척, 모르는 척 그냥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이것이 진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잘못되고 어긋나가는 것을 그냥 넘어가지 못합니다. 진실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참으로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관계가 깨지면 어쩌냐구요? 실제로 서로가 사랑한다는 확신만 있으면 서로 책망하거나 혹은 책망을 듣는 일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자녀를 키워보면 오히려 정당하게 혼을 내고 혼이 난 후에 부모자식 관계가 더 돈독해 질 때가 많은데, 이것은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바른 길을 가도록 도와주는 일은 관계 자체를 유지하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참된 사랑은 관계가 소원해질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런 모험을 해야할 때도 있습니다.
바울이 가장 먼저 다루었던 문제는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크고 예민한 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분쟁과 분열의 문제였습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그런 예민한 문제는 나중에 그리고 부드럽게 다루겠지만 바울은 그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그 문제를 먼저 거론합니다. 당시의 고린도 교회는 자신이 선호하는 목회자를 중심으로 여럿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바울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에 대해 대충 부드럽게 미화해서 말하지 않고 “분쟁”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조각 조각 쪼개졌느냐?”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가장 큰 문제를 “분열”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은 단지 파당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조각 조각 나누는 심각한 범죄라는 것을 지적했던 것입니다. 분쟁이라는 말이나, 그리스도께서 나뉘었다는 말이나 굉장히 강하고 자극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이었고 그래서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이라고 해서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하고 훈계하는 일이 쉬웠을리는 없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의 성도들 또한 이런 질책을 받는 일은 절대로 기분좋은 일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지적했고 그들은 그러한 바울의 이야기에 기꺼이 귀를 기울여 경청했던 것입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가 이런 바울의 지적과 훈계에 대해서 반항하거나 분노했다면 지금 고린도 전후서는 성경 속에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그들의 손에서 찟겨지고 태워져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고린도의 성도들은 그러한 바울의 강하고 직접적인 질책을 소중하게 받아들였고, 그래서 그의 편지를 소중하게 간직해 준 결과 지금도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며 교회의 앞길을 밝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는 목회자들 사이에서 교회를 치유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쟎은 교회들이 고린도 전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일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고 분열을 극복해 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문제와 잘못이 지적되고 드러나게 되는 것을 결코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직접적인 언어로 문제나 잘못을 지적받는 것은 더더욱 싫어하고 굉장히 불쾌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문제의 경우에는 분명하게 지적되고 책망되지 않으면 안되는 문제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 문제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그래서 겉으로 드러내기도 어렵고, 또 손대기 어려운 일일수록 그런 문제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 문제가 크고 심각하다는 것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문제를 밖으로 드러내려 들지 않고, 또 그 문제에 관해서 들으려 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는 없는 것처럼 감추어지지만, 속으로는 계속해서 썩어들어가고 점점 더 회복불능의 상태가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어떤 병이든 일정기간이 지나고 기회를 놓치게 되면 그 병이 고착화되고, 그래서 소위 만성질환이 됩니다. 빨리 병이 병인 것을 인정하고 치료했으면 간단히 치료될 질병인데, 그래서 평생을 안고 가면서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심한 경우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그 교회가 하나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그 교회가 찟어지게 되면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교회의 교회됨을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안의 성도들까지 영적인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분열된 교회 중에서 은혜로운 교회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가 가고 있었던 길이 바로 이런 길이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정상적인 교회의 길이 아니라는 것쯤은 깨닫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존심 때문에, 교만함 때문에, 그리고 그러한 죄가 가지는 관성 때문에 그 발걸음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누군가가 그들의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걸맞는 치료방법을 제시해 주지 않으면 결국 완전히 병들어서 회복불능상태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행히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아버지요 의사로서 그들이 앓고 있는 중병에 대해서 과감하고 정직한 진단과 처방을 내려주었으며 고린도 교회는 이 진단과 진단에 따른 힘든 처방을 기꺼이 따랐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다시 건강하고 아름다운 교회로 회복될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지난 번에 말씀드린 대로 다른 거의 모든 초대교회들이 역사속의 유물로 사라져 갔지만, 고린도 교회는 지금도 고린도에 남아있습니다. 유물로서, 유적지로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로 말입니다. 그들의 교회 앞 현판에는 대대로 그들을 가르쳤던 목회자의 이름이 세겨져 있다고 합니다. 1대는 바울이고 2대는 아볼로입니다. 고린도 전서를 읽고 거기 순종하기 전에 그 이름들은 그들을 나누고 찟는 이름이었지만 그 후 그 이름들은 더 이상 그들을 나누고 쪼개는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의 증거로 남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몸으로 비유한다면 교회에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손과 발이 아니라 입과 귀입니다. 교회에는 말할 입과 들을 귀가 반드시 필욯바니다. 말할 입은 제대로 말해야 하고 들을 귀는 경청해야 합니다. 입은 귀가 듣기에 좋은 말만 해서는 안되며, 귀는 듣기에 좋은 말만 가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때로 입은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고, 귀는 듣기 싫고 거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역할이 제대로 유지될 때, 그 교회는 많은 문제점들과 때로는 심각한 죄를 가지게 되는 경우가 생겨나더라도 여전히 몸된 교회로 남아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잃지않게 됩니다. 교회도 부족한 사람의 모임이고 보면 때로는 문제점도 생길 수 있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도 일어나며, 행해서는 안될 일들도 행할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문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일수록, 그런 일을 행한 장본인일수록 귀가 닫혀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교회든 성도 개인이든 제 자리로 되돌아 가고 회복되어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신앙생활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로 섬길 때, 주일오후예배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교역자가 되고 하는 첫번째 성인예배 설교였기에 얼마나 신경이 쓰이고 기도하면서 준비했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그 교회는 신앙적으로 너무나 침체되어 있는 교회였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회복에 대해서 설교했습니다. 사실 너무 떨려서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예배가 끝난 후, 아래 층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한 여집사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제가 웃으면서 인사를 드렸더니 그 분도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도사님 오늘 설교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이죠? 그렇죠?” 제가 뭐라고 했을까요? “네. 그렇게 들으셨다면 정말 잘 들으신 거네요.”라고 대답해 드렸습니다. 그 집사님은 안수집사님의 부인이셨는데, 그 당시 영적으로 많이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보면 설교도 제대로 듣지 않고 딴 생각을 하거나 주무시기가 일수였습니다. 그만큼 영적인 열정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죠. 그런데 놀랍게도 그 날은 그 설교를 자신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듣고 기뻐서 그 말을 전하려고 저를 찾아왔던 것입니다. 제가 그 분 들으라고 그 설교를 준비했을까요?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설교를 한 사람 들으라고 할만큼 뻔뻔한 사람도 못됩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그 설교를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 들으신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아픈 설교였고, 자신의 본질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말씀이었지만 불쾌해 하지 않고 단 마음으로 귀를 열고 들으셨던 것입니다. 그 날 예배시간에 그 집사님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 귀중한 교훈 하나는 문제는 문제로 지적되어야 하며, 또 그렇게 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돌이킴이 시작되는 지점이고 참된 회복이 시작되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과정을 겪지 않고 일어난 영적인 부흥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지적받고 반응하며 아파하면서도 단 마음으로 듣기 시작했을 때, 그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부흥은 불붙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그리고 많은 교회가 부흥을 부르짖으며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참된 부흥의 불길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어디에 문제가 있을까요? 무엇이 문제일까요? 잘못이 말해지지 않고, 말해져도 듣지 않는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혼내려 하지 않고, 혼나려고 하지 않으니 기꺼이 꾸짖고 기꺼이 회개할 때만 찾아오는 부흥은 그저 구호에만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뇨 바울이 십자가에 못 밖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뇨” 바울은 여기서 누구를 지적하여 말하고 있습니까? 다른 파에 속한 사람들, 다른 사람들에게 속해 있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바울은 스스로를 ‘바울에 속해있는 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따끔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자신과 자기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그 분열과 불화의 중심에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 편을 들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 편을 드는 사람을 편들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움직였습니다. 바울이 가장 직접적으로 가장 호되게 꾸중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속했다고 말하는, 지금 바울을 높이고 바울을 편들어 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스스로를 바울파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배신감마저 느끼게 만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바울은 굳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들은 그러한 바울의 꾸중을 달게 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삶의 자리, 특히 교회 안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제가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깨달은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만약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면 나 자신은 물론이고 그게 나의 가족이고 내 부모일지라도 잘못이 있을 때는 편을 들어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연스러운 본능을 거스르지 않는 한 하나님 앞에서는 정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갈등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해서 남아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입장만을 생각하고, 내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의 편만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갈등은 더 깊어지고 굳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나와 내 편이 잘 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나와 내 편이 옳은 것은 옳은 것이지만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이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다시 하나되는 것과 또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국회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참 여러가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어떤 사안을 표결에 붙일 때 한 쪽은 100퍼센트 찬성하고 다른 쪽은 100퍼센트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정당마다 방향이 있고, 그 정당에 소속된 의원들은 그 방향에 대해서는 일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방향마저 바꾸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각각의 작은 사안에 대해서 표결을 하는데 어떻게 같은 정당에 속했다고 해서 100퍼센트 같은 의견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도 항상 말입니다. 이래서는 정치 속에서 참된 것을 전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더 나은 발전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내 편이라고 하더라도 아닌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때, 바로 그것이 더 선한 방향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속한 편을 더 온전하게 세워가는데 도움을 주는 행동이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진정으로 나의 편이겠습니까? 누가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듣기 좋은 소리, 듣고 싶은 말을 해 주는 사람일까요? 내 잘못을 묻어주고 모른 척 해주는 사람일까요? 내가 그 사람 편이기 때문에 어쨋든 나를 두둔해 주는 사람일까요? 내 심각한 질병을 보고도 괜챦다, 상관없다는 이야기만 해 주는 의사가 가장 좋은 의사일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쉽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더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나의 편도 아니고 나를 정말로 위해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물론 칭찬과 인정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진실로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칭찬만 해주고 인정만 해 준다면 그 사람은 그 잘못된 방향으로 굳어져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누가 정말로 나의 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모보다 내 편이고 나를 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들은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 그렇지만 그 누구도 내 잘못을 지적하고 교훈하지 않을 때, 수없이 나를 혼내고 꾸짖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하기 쉽지 않으셨지만 눈물을 흘리면서도 회초리를 드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게 바로 진정으로 나를 편들어 주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들의 그런 사랑 덕분에 완전하지 않아도 오늘 우리가 한 명의 인격체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도는 진리를 찾고 진리를 믿으며 진리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정으로 가치있는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모여있는 이유도 참되고 가치있는 것들을 찾기 위해서 인줄 압니다. 우리가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따르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귀는 항상 쓴 소리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방어하고 핑계대지 말고 정직하게 내 잘못을 지적하는 소리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힘들 것입니다. 아플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래야 고린도 교회가 건재한 것처럼 우리 교회도, 나의 신앙도 계속해서 든든하게 서 있을 것입니다. 허물과 잘못이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더 높은 신앙으로, 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항상 서 있게 하는 이 출발점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우리의 수많은 허물에도 항상 돌이키고 항상 회복하는 사람들이 되려면 죄와 잘못마저 프라이버시로 여기는 현대의 얄팍하고 일그러진 개인주의를 꼭 넘어서야 합니다. 세상이 어디로 흘러가든 우리는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꾸짖는 소리에 대해서 귀를 활짝 열어놓으시기 바랍니다. 그런 귀를 달라고, 그리고 그 귀를 열고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 꼭 기도해 주십시오. 내 귀에 단 소리가 아닌 정직한 소리를 들려주는 하나님의 입술이 되게 해 달라고, 그런 용기와 그런 사랑을 가진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위해서 잊지 말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목회자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도들과 교회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진실된 것을 말할 수 있는 용기있는 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이런 기도를 드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 우리 교회, 그리고 한국 교회는 더 온전하고 풍성한 회복을 경험하며 더 견고하고 건강한 교회로 세워져 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의 성도들도 진리 안에서 양육되어지는 기쁨과 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그리고 이 한국 교회를 이렇게 말할 것을 말하는 입과 들을 것을 듣는 귀가 있는 소망있고 건강한 교회가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