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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6.11.새벽예배 -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요한삼서1)


요삼0101to02 - 참으로 사랑하는 가이오에게(요삼1).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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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 : 요한삼서 1장 1-2절


성도들은 아마도 어떤 모습이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이냐 하는 것에 대한 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신지 모르지만 많은 성도들이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슬픔이나 기쁨이나 감정적인 동요도 크지 않으며 마음에서 나오는 감정표현도 별로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인간다운 모습에 대해서 배우고 또 알기 전에 영적으로 앞서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모습을 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그것이 훨씬 더 권위있고 멋있어 보이기 때문에 그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를 믿고 신앙 안에서 성숙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 이전의 일그러져 있었거나 억눌려 있었거나 혹은 망가져 버린 인격과 감정, 그리고 이성적인 분별력에 이르기까지 제 자리와 제 기능을 되찾고 또 모든 부분들이 균형을 되찾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온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분이 포함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구요. 그런데, 이 중에서 감정이 온전하게 회복되면 감정은 대가 굉장히 풍성해지고 깊어지며 그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굉장히 진솔해지고 자유로워 집니다. 물론 부정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태도를 가지게 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거듭나게 되고 또 성령충만하게 되면 어떤 점에서 보면 우리 식으로 표현해서 굉장히 여성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냉정하고 무뚝뚝했던 사람이 다정다감해 지고, 선한 감정을 표현하는데 있어서도 어떻게 보면 간지럽다고 여겨질 정도로 적극적이고 자유로워 집니다. 그런 대표적인 변화를 겪은 사람이 사도 바울이고 또 사도 요한입니다. 어제 요한이서의 마지막 부분을 통해서도 살펴보았지만 사도 요한은 성도들을 향한 자신의 깊은 애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데 결코 주저하지 않습니다. 


요한삼서는 요한일서와 요한이서와는 달리 교회가 아니라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요한 자신이 전도를 하고 양육을 해서 자신이 목회자로 섬기던 교회의 목회자로 세웠던, 그러니까 동역자인 동시에 영적인 자녀인 가이오라는 장로에게 보낸 개인서신입니다. 전체적인 내용은 당시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는 복음 전도자와 교회 사역자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이야기 하면서 그런 사람들을 영접하고 선하게 대우하는데 힘쓰라는 것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맨 앞 부분에는 요한 개인의 가이오 개인에 대한 깊은 애정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드러나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구절들이 저마다 이유가 있어서 거기 있고 또 하나님께서 거기 두신 것이 분명하다면 요한삼서의 인삿말 맨 앞의 두 구절은 아마도 성도들간의 관계가 감정적으로도 얼마나 풍성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한은 편지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장로인 나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여지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1절에서 두 번, 그리고 2절을 시작하면서 또 한 번 사도 요한은 편지의 내용은 커녕, 인사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랑’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주 순수한 축복기도가 뒤따르고 있습니다. 아주 쉽게 표현하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난 네가 모든 면에서 아주 잘 되기를 바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편지를 쓰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해야 할 말로 바로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편지를 받을 사람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 사랑을 충분하다고 여겨질 때까지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말,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비로소 인사말을 건넬 수 있었습니다. 


요한이 가이오를 향해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한 횟수만으로 보더라도 우리의 요한이 가이오에 대해서 가지고 있었던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있지만, 사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히브리어에서 세 번 반복한다는 것은 최고로 그렇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이 가이오를 향해서 세 번이나 사랑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요한이 가이오를 그만큼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참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그것도 피붙이도 아닌 사람을 이렇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어찌보면 가식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가이오를 향한 요한의 사랑이 오히려 도저히 일반적인 이유에서는 생겨날 수 없는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진리’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나온 사랑입니다. 1절을 보면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래 이 말은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가이오를 향한 사랑은 진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이 생겨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실제로는 현실적으로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그런 사랑입니다.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한다는 말로만 표현할 수 있을만큼 깊고 풍성한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 속에는 이런 사랑이 생겨나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복음을 믿을 때, 그 복음이 우리에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덕분에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세상에 하나님을 원수처럼 여기는 피조물을 다시 살리고 자녀삼기 위해서 자신과 똑같은 하나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놓는다는게 어찌 우리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크기이며, 또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입니까? 자기 자신을 내어줄 지언정, 하나님께서 무한하고 영원히 사랑하는 독생자를 죽음에 내어준다는 것을 어찌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십자가에 대한 이런 설명에 이미 익숙해져 있어서 그렇지 이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불가사의한 사랑의 방법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알 때까지 우리 귀에 수천 번, 수만 번, 아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반복해서 사랑한다고 외쳐오셨고 그 마지막에 아들이 달리신 십자가를 통해 가장 큰 소리로 우리에게 이것이 나의 사랑이다, 나는 이만큼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들 사이에 일반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고 풍성한 사랑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성도들의 사랑이란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시고 증명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이해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진 사랑 덕분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 입니다. 그래서 항상 똑같은 정도로 사랑할 수는 없겠지만 서로 피를 나눈 형제 자매가 아니어도 실은 그런 형제 자매들보다 서로를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가이오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만들어 낸 작은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고 앎으로써 서로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하나님을 닮고 또 요한을 닮은 사랑으로 사랑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