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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새벽예배

2013.06.14.새벽예배 -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요한삼서 4)


요삼0105to08-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요삼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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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문 : 요한삼서 1장 5-8절


   요한 사도가 가이오 때문에 크게 기뻐하였던 것은 가이오가 진리를 지니고 있고 그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제 ‘형제들’을 가이오가 목회하는 교회의 성도들이라고 말씀드렸는데, 오류가 있었습니다. 형제들은 성도들이 아니라 당시의 순회 복음 설교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들은 가이오에 대한 이야기는 가이오에게 들렀다가 요한에게로 왔던 순회 선교사들이 전해 준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전문가의 눈으로 전문가를 본 것이기 때문에 아주 정확할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여러가지 면에서 올바른 신앙과 신학에 대한 평가가 느슨한 시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정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은 요한에게 가이오가 진리를 잘 붙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증언해 주었습니다. 그 증언은 요한 개인에게 들려준 증언이었을 뿐 아니라 요한이 목회하던 교회 회중 앞에서도 이루어진 공식적인 증언이었습니다. 요한의 기쁨은 더더욱 클 수 밖에 없었겠죠. 마치 자식이 단상에 올라가서 큰 상을 받는 것을 지켜보는 기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형제들은 무엇을 보고서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고 그것을 증언해 주었을까요? 어제 살펴본 대로 분명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가지고 있는 진리’가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올바른 내용을 의미한다면, 요한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할 때,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6절을 보면 순회선교사들이 요한과 요한의 교회 앞에서 증언한 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여기서 요한이 가이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판단했던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이오는 사랑을 행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서 전해 들었을 때도 그랬겠지만 형제들이 무엇보다도 가이오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에 요한은 가이오가 흔들리지 않고 진리 안에 거하고 있다는 판단을 내렸던 것이고, 그것이 요한이 그렇게 기뻐했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을 따라 사는 삶은 그가 진리를 믿으며 진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이오는 목회자로서 진리를 잘 붙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에 순종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사랑하는 일을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가이오의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가이오의 사랑은 신실한 사랑이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일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사랑이 그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의 삶의 태도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믿는 진리가 그의 속사람을 변화시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믿으니 그 사랑이 가이오를 신실하게 변함없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신실한 사랑과 섬김을 칭찬하면서 이렇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아마도 순회 선교사들은 가이오에게서 요한에게로 갔다가 다시 가이오에게로 갔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 편지 또한 그들의 손에 의해서 가이오에게 전달되었겠지요.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며 좋을 것이다” 요한은 가이오가 순회선교사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충분히 공급해 주고 다음 선교지로 가는 것을 잘 배웅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러 다니지만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이방인들로부터 삶의 필요를 공급받지 않는, 완전히 헌신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필요를 도와 주어야 했고 요한은 가이오에게 그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요한이 생각하는 성도의 사랑의 기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기준은 첫째, 사랑이란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사랑을 감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그저 ‘마음’이라고 이해하죠.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마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때로는 마음이 부족해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항상 의지가 사용되어야 하며, 구체적인 행동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은 가이오의 사랑이 형제들을 잘 전송하는 일, 그러니까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해 주고서 잘 보내주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기를 바랬습니다. 아니 요한이 생각한 사랑은 바로 그런 행동이었습니다. 또 한가지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나 사랑하면 될까하는 질문에 대해서 이 구절은 그 기준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러니까 사랑으로 무엇을 해 주되 항상 ‘이만큼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라고 물어보고 ‘그렇다’는 대답을 얻을 수 있을만큼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행하는 사랑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행동과 섬김으로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정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가 가지고 있어야 할 사랑의 기준입니다. 사랑이 이런 사랑일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만족해 하십니다. 너무 과한 기준 같지만 사실 요한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우리라면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주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러한 사랑의 기준은 그것에 비하면 결코 과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렇게 느껴지지만 말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참 진리를 믿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참된 성도라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구체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랑이어야 하며, 정도 면에서는 하나님께서 흡족해 하실만큼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 못 미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그저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할 때, 이 기준에 우리의 사랑을 맞추려고 애써야 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일에 후하고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마 마지막 날이 되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면, 형제들이 요한의 교회에서 그랬듯이 우리가 만나고 사랑했던 모든 성도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에 대해서 하나님께 증언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증언하는 우리의 사랑의 크기와 깊이로 우리의 인생을 점수매기실지도 모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진리를 믿는 믿음을 보시면서 말입니다. 지나친 상상일까요? 그렇지만 다른 건 몰라도 우리가 이 땅에서 행했던 사랑이 그 날의 우리의 영광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러니까 몸을 움직이고 가진 것을 내어줌으로써 사랑할 때, 그러한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을 흡족시킬만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애쓰며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 만나는 날 더 큰 칭찬과 영광을 얻게 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게 했던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나를 위한 사랑의 증거자들을 많이 만들며 살아감으로써 하늘나라의 영원히 칭찬받는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