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문 : 창세기 1장 26-28절
오늘은 하나님께서 여섯째 날에 사람을 만드신 것에 대해서 묵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먼저 삼위 하나님께서 세 분의 형상대로 사람를 만들자고 서로 의논하시고 난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들의 창조에 비하면 굉장히 길고 자세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가 하나님께 그만큼 중요하고 무게있는 일이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 세상에 삼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피조물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사실 피조물이 하나님의 형상, 그것도 한 분의 형상이 아니라 세 분 하나님의 형상 모두를 지니게 된다는 것은 너무나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작은 몸 안에, 이 부족한 인격과 머리 안에 삼위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져 있다니 말입니다. 인간의 귀중함은 바로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나는 소중해, 나는 소중해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또 믿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은 인간이란 그저 무에서 생겨난 우연의 결과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고 그래서 정말로 귀중한 존재입니다. 비록 때로는 망가지고 뒤틀려 질 수 있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귀한 존재입니다. 우선은 자기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느라고 또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자신이 느끼는 부족함과 연약함을 생각하느라고 우리 자신의 귀중함을 까맣게 잊고서 상실감과 좌절감 속에서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내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비교나 열등감, 부족함이나 실패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원래의 가치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하나님의 형상답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면 더 이상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과 이치가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 자신이라는 그릇은 별로 특별할 것이 없어도 그 사실 때문에 엄청난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그렇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삼위 하나님의 관계를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을 일컬어 사회성 혹은 공동체성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삼위 하나님이시라는 뜻은 하나님에게 세 분의 친밀한 관계는 필수적인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관계가 없거나 혹은 깨어진다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이실 수 없고, 또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러한 모습 또한 지니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대로 살아가려면 우리들 속에도 하나님의 이런 모습이 있어야만 합니다. 27절을 보시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왜 두 사람이 필요했을까요? 그것도 남자와 여자가 말입니다. 둘은 공동체와 사회를 위한 최소한의 숫자입니다. 어떤 인격적인 관계가 생겨나려면 최소한 두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삼위 하나님 세 분 사이에 있는 그 무한히 인격적인 관계라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려면 둘을 만드실 수 밖에 없으셨던 것입니다. 또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은 서로 너무나 다르면서도 상호보환적인 존재들이야 말로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 위한 최고의 조건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에 보겠지만 한 몸에서 나와서 다시 한 몸을 이룬 두 사람처럼 서로 사랑하게 되는 그런 두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처음 만들어진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두 사람이었습니다. 둘이지만 하나로 살아갈야 할, 그럴 때에만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두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둘의 모습을 부부관계에 적용할 때가 많지만 저는 이 두 사람이 최초의 가족이요 공동체요, 또 사회였으며 나아가서 그 속에 삼위 하나님의 하나되심까지 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것은 모든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회복해야 할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우리 답기 위해서는 ‘우리’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저 개인으로만 존재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형상다운 형상이 되어져 갈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죄인들이고 그래서 서로 어울리고 함께 하는 일을 그렇게 쉬워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누리며 살아가려면 우리 속에 삼위 하나님을 닮은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더 회복해야 더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서로 간의 인격적인 관계를 회복해 가려고 기도하며 노력하고 또 헌신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둘을 만드신 하나님, 관계까지도 삼위 하나님을 닮은 두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그 둘에게 복을 주시면서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자 명령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기대와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돌보고 다스리는 것. 그렇게 피조물로 이루어진 하늘나라를 만드시는 것. 이것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생각하셨던 아름다운 계획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인격과 생각, 그리고 가치관이 새로워져야 할까요? 그저 예수만 믿고 영혼이나 구원받고 끝내면 왜 안될까요? 왜 그렇게 편하게 예수믿으면 안될까요? 그것이 원래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면 회복해 갈수록 그만큼 더 우리가 돌보고 다스려야 할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 속에 그려져 있던 그 모습으로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완성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 이루어지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원래 우리에게 맡겨진 소임을 더 온전하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보시고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만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이 세상과 관계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그만큼 이 세상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도록, 애초부터 그렇게 지음받았고 또 관계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래 우리의 모습을 되찾기 위해 예수를 믿으면서 인격과 마음, 그리고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지어져 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나는 그리고 우리는, 그리고 우리들 속에 있는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담는 그릇입니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모두이지만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그 관계 또한 그만큼 소중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 관계가 온전치 못하면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 또한 그만큼 온전할 수가 없으니까요.
우리 모두 개인적으로나 혹은 서로 안에서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나감으로써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또 하나님의 형상에게 허락된 꽉차고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