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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오후

2013.07.14.주일오후 -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2013 교사헌신예배)


창2910to20-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2013 교사헌신예배).pdf


20130714SE (#01).mp3.zip




  문 : 창세기 29장 10-20절


오늘 오후예배는 교사헌신예배로 드려집니다. 교사헌신예배를 드리는 자리에 있으니까 예전에 제가 교사로 섬길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참 재미있었습니다. 힘드는 일도 많았지만 보람있는 일도 많았구요. 저는 고등학교 때까지는 개척교회에 다녔기 때문에 여름성경학교가 열리면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보조교사로 섬겼던 기억이 납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냥 재미있기만한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어울려 정말 땀 뻘뻘 흘려가며 뙈약볕에서 살이 발갛게 익을 정도로 애를 쓰고서도 마냥 즐거운 마음 뿐이었습니다. 흐릿한 기억으로만 남아있지만 그 때 느꼈던 즐거움은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주일학교 교사로 섬길 때는 그렇게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고 그 아이들을 보살펴야 하고, 때로는 혼도 내야하고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또 챙겨주어야 하고... 즐거움도 많았지만 교사로 섬길 때는 슬프고 화날 때도 있었고 힘이 들 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교사헌신 예배의 자리를 빌어서 먼저 우리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두 가지 아주 중요한 부탁과 권면을 하려고 합니다. 저는 작은 교회 출신이고, 큰 교회도 다녀보았고, 또 교역자로 크고 작은 다양한 사이즈의 교회를 섬기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 특히 유초등부는 제가 보았던 모든 주일학교 중에서 가장 작은 숫자가 모이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환경 또한 그렇게 훌륭하지 못하구요. 요즘처럼 사이즈와 환경이 중시되어서 그런 조건들이 갖추어진 교회들만 찾는 현실에서 우리 교회의 이런 현실은 결코 유리한 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을 기준으로 해서 좋은 교회냐 아니냐를 평가하는 것은 결코 신앙적으로는 올바른 시각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해서 교회나 교회학교의 좋고 나쁨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마치 매장의 크기나 물건의 종류를 보면서 가야할 백화점이나 마트를 결정하는 소비자의 모습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교회를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교회가 크면 환경도 좋고 물량면에서 볼 때,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교사로, 그리고 교역자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실제로 그런 조건이나 환경이 아이들의 신앙성장과 직결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부모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혀 현실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어떤 신앙인으로 자라나느냐 하는 것은 바로 교사들의 인격적인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교역자와 교사들이 인격적인 헌신도 하지 않는데 환경까지 좋지 못하다면 그건 정말 큰 문제가 되겠지만, 인격적인 헌신만 가능하다면 실제로 환경과 조건은 거의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인격적으로 헌신할 수만 있다면 실제로 아이들의 숫자가 작다는 것은 오히려 아주 큰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교사를 해 보았습니다만, 한 반에 속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그 모든 아이들을 다 인격적으로 돌본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소수일 때는 그 일이 훨씬 더 쉬워지고 효과적이 될 수 있습니다. 


과외도 고급과외는 학원에서 많은 아이들이 모여서 하지 않습니다. 소수정예로 몇 명만 모아놓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돈도 훨씬 더 많이 들어가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더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배우는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그게 훨씬 더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작다는 것은 결코 그것 자체로 흠이 되거나 불리한 점이 될 수 없습니다. 작은 교회학교를 섬기는 일에 이런 저런 어려움과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을 보지 마시고 작은 교회학교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과 유익을 찾으시고 그것을 통해 섬겨보시기 바랍니다. 일단은 그 한 두명의 아이들에게 인격적으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아직 그렇게 되어있지 못하시다면 이것 먼저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 아이들을 여러분의 가슴에 담으십시오. 내가 낳아야 하고 길러야 할 영적인 자녀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참된 교사가 되는 출발점이고 또 가장 중요한 기반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은 사이즈는 그것을 훨씬 더 쉽게 만들어 줍니다. 처음부터 100명이 있다면 엄두가 나지 않겠지만 한 두명에게는 마음만 있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번째로 참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만 그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남아 계시지 마시고 그 아이들을 위한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도 숫자가 적기 때문에 오히려 더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두 아이만 책임지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선 내가 맡은 아이의 구원을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아이들을 만나주십시오. 물론 그 아이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이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 속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구원의 도리를 확실하게 전하시고, 그들의 믿음과 삶을 끊임없이 체크해 주십시오. 신앙에 있어서 어떤 부분은 괜챦지만 어떤 부분은 부족한지를 헤아리셔서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에게 필요한 영적인 양식을 공급해 주십시오. 뒤에서 기도하면서 말입니다. 


교회학교의 사이즈가 작은 것은 결코 그것 자체로 흠이 되거나 불리한 점이 될 수 없습니다. 커서 좋은 것이 있듯이 작기 때문에 유리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에게 인격적으로 헌신해 주시고, 또 신앙의 전수자가 되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아이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정말 하나님을 믿는 아이들이 되도록 도와주겠다는 사명감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쳐서 어떻게 해서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는가 하는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권리를 얻기 위해서 어머니와 짜고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 형을 피해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렵게 삼촌 라반이 있는 밧단아람에 도착하게 되고, 또 첫눈에 반한 라헬 덕분에 삼촌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라반은 야곱 못지 않은 탐욕스런 인물이었고 또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라반은 라헬로 부터 자기의 조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두 세사람이 있어야 옮길 수 있는 돌을 혼자 힘으로 옮겨서 양들에게 물을 먹게 해 주었다는 소리를 듣고 말그대로 버선발로 야곱을 만나러 갑니다. 우리는 야곱이 힘없고 빈약한 샌님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이 부분을 보면 야곱의 힘이 굉장히 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딸 둘 밖에 없는 라반은 아마도 아주 힘센 일꾼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놓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한 달음에 달려간 것이죠. 라반은 야곱을 아주 극진하게 맞아들였습니다. 그리고는 야곱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습니다. 13절을 보시면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고하매...’라고 되어 있는데, 야곱이 정말로 자기가 저지른 모든 일들과 그 일 때문에 여기로 도망쳐 왔다고 이야기 했을 리가 없습니다. 자기의 모든 일을 이야기하기는 했겠지만 그것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선별되고 이야기였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도 최대한 신파조로 이야기했을 것이구요. 


라반이 말합니다.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로다’ 그렇게 해서 야곱은 라반과 함께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한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야곱은 있는 힘을 다해서 삼촌의 집안 일을 돌보았을 것입니다. 일단은 삼촌에게 확실한 신임을 얻어야만 하는 처지였으니까요. 그게 라반의 눈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한 달이 흐르고 난 어느 날, 라반은 야곱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내 조카이지만 어떻게 계속 공짜로 일하겠니? 내가 봉급을 줄테니, 얼마나 주면 되겠나 한 번 말해 보아라.” 마치 생각해서 수고의 댓가를 지불해 주겠다는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이것은 야곱을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일꾼으로 고용하려는 심산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임금을 주지 않으면 마음대로 부리지 못하니까요. 


야곱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합니다. “내가 외삼촌을 위해서 앞으로 칠 년동안 일할테니 작은 딸 라헬을 저에게 주십시오.” 라반에게는 딸이 둘 있었습니다. 첫째를 레아고 둘째는 라헬이었습니다. 둘 다 참 아름다운 처자들이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레아가 ‘시력이 좋지 않다’고 소개되어 있어서 마치 고도근시나 선천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처럼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이 말은 ‘부드러운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시대에는 눈빛이 부드러운 여성보다는 강렬한 눈빛을 가진 여인이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시대였고 그래서 그 시대의 기준으로 레아보다는 라헬이 아름다웠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이지 레아가 그래서 못생겼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실 눈이 나쁘다고 해서 반드시 못생긴 것은 아니니까요. 


야곱도 그 시대의 사람이니 둘 중에서 라헬에게 더 끌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선수를 쳐서 라헬을 위해서 7년을 일할테니 라헬을 달라고 했습니다. 라반의 입장에는 너무 너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친척끼리하는 결혼이 더 선호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혈통을 유지하는 일과 씨족의 전통과 문화를 보존하는데 더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일부러 신랑감을 찾으러 다녀야 할 판에, 7년이나 일해주고서 딸을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라반으로서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흔쾌히 허락합니다. 그러나 이미 라반은 머리를 굴리고 있었습니다. 때가 되면 레아부터 떠넘기고 다시 7년을 부려먹을 심산이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의 이름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 자기가 먼저 나오겠다고 쌍둥이 형 에서의 발목을 잡고 나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죠. 그런데, 이 말이 그 당시의 말로는 사기꾼을 뜻하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참 이름치고는 정말 기분나쁜 이름이지만 놀랍게도 이 이름은 야곱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내 주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자기 이름이 그렇게 좋지 못한 뜻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저같으면 ‘저것 봐라. 이름이 저러니 사는 것도 저렇지’라는 소리 듣기 싫어서라도 반대로 갔을텐데, 야곱은 자기 이름 그대로 되어져 갔습니다. 아무리 장자의 권리가 좋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배고파 쓰러지지 일보직전인 형을 그렇게 속이고,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를 그렇게 속여서 장자의 권리를 빼앗다니 정말 인간으로서는 하지 못할 일을 서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정말 가족을 상대로 희대의 사기극을 벌인 것입니다. 


그 결과는 도망자 신세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망쳐 온 곳에서 야곱은 말 그대로 임자를 만납니다. 그것은 한 수 위인 삼촌 라반입니다. 야곱이 한 수 앞을 본다면, 라반은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는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라반에게 자기가 자기 가족에게 당한 것의 몇 배를 당하게 됩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가 뿌린대로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야곱이 마지막에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에, 야곱이 걸어갔던 모든 길을 다 선한 것으로 이야기하시기도 합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야곱처럼 욕심을 내야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축복을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런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야곱의 그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욕심을 내고 집착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어내는 야곱의 모습을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을 삼촌에게로 보내서 특별훈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뿌린 것의 몇 배를 거두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무튼 야곱은 그렇게 해서 라헬을 주겠다는 허락을 받고 7년 동안 아주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라반을 위해서 일합니다. 20절은 그러한 야곱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성경에서 아주 아주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얼마나 낭만적인지 모릅니다. 정말 달콤한 표현입니다. 라헬을 아내로 맞아들일 날을 기대하면서 살며 또 일하는 야곱에게 그 7년은 꿈과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게다가 라헬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고 항상 옆에 있으면서 그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주었으니까요.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7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닙니다. 그것도 쉬면서 지낸 시간도 아니고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열심히 수고하며 지낸 세월입니다. 그러나 그 긴 세월이, 그리고 그 고단한 수고와 삶이 그에게는 짧게만 여겨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의 특권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수고는 수고로 여겨지지 않게 됩니다. 비록 그것이 고생스럽고 긴 세월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그 세월이 고통스럽고 지루한 수고의 시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짧게만 느껴지고 기쁘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어지면 그 반대가 됩니다. 작은 수고도 엄청나게 고통스러워지고 짧은 섬김의 시간도 굉장히 길게 느껴집니다. 이제는 며칠이 칠년처럼 느껴집니다. 우리는 이런 시간을 권태기라고 부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야곱을 좋게 보아서 그렇지 사실 야곱은 정말 엉만인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이며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한다거나 혹은 남을 섬긴다거나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계산이 분명해서 투자하는 것보다 얻는 것이 적으면, 그렇게 효율성이 떨어지면 절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라반이 야곱의 제안을 두말하지 않고 받아주었던 이유는 야곱의 제안이 라반에게 너무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남자가 결혼을 하려면 아내가 될 사람의 집에 일정액수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액수는 30-40세겔이었다고 하는데, 라반이 제안한 조건은 액수로 환산하면 70세겔의 가치가 있는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제안은 최소한 두 배가 남는 장사였던 셈입니다. 그렇게 계산 빠르고 손해보기 싫어하는 야곱이 왜 그런 밑지는 장사를 하겠다고 나섰을까요?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밑지는 계약을 맺고도 왜 신나고 행복하게 일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왜 7년을 며칠처럼 여기며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 또한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평상시라면 절대로 하려고 하지 않았던 거래를 하고, 그 거래를 위해서 수고하면서도 너무나 수월하게 모든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가 그만큼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7년이 다 가고 결혼식을 하는 날,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서 라헬이 아닌 언니 레아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라반이 억지를 부리는 통에 다시 7년을 일해야만 했죠. 그렇지만 야곱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 천하의 모사꾼 야곱이, 그렇게 욕심많던 야곱이 한 여인을 위해서 14년을, 그것도 뒤쪽의 7년은 속은 줄 알면서도 기꺼이 일했습니다. 모두가 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거짓말장이 사기꾼을 바꾸어 한 여인을 위해서 14년을, 기쁘게 헌신하도록 만듭니다. 


야곱같은 인물이 한 여인을 위해서 이렇게 오래, 그것도 기꺼이 수고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이지만 야곱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렇게 헌신했습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라헬에 대한 사랑이,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의 야곱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야곱은 이렇게 야곱답지 않은 헌신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헌신’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는 굉장히 무겁게 생각하고 또 부담스럽게 여기게 됩니다. 또 무엇을 요구하려고 저러나 하게 되고, 또 나에게 무슨 일을 시키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래 헌신은 고통스러운 것도, 마지 못해 하는 것도, 지루해 하거나 비장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신은 원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가벼운 것입니다. 사실 헌신은 무거운 마음이나 억지스러운 마음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헌신이 아니라 억지춘향이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사실 피조물된 우리들의 당연한 의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흉내는 낼 수 있어도 헌신의 참된 열매를 거두어 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나도 기뻐할 수 있는 그런 열매를 거두어 들이기가 힘듭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참된 헌신에 필요한 것이 무엇이며, 우리의 헌신이 그것으로부터 시작되고 또 이루어 진다면 그 헌신은 하나님께는 물론이고 우리들 자신에게더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며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헌신을 헌신이게 하는 것은 열심도 아니고, 열정도 아니며, 심지어는 사명감도 아닙니다. 헌신을 참된 헌신으로 만드는 것은 헌신의 대상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헌신한다고 할 때, 우리는 헌신을 먼저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헌신은 가벼워지기 시작합니다. 즐거워지기 시작합니다. 신나기 시작합니다. 


혹시 우리가 교회를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또 아이들을 섬길 때 우리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전혀 신나지 않고 짜증과 실증만 난다면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에 있어서 영적인 권태에 빠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데 있어서 즐거움 보다는 짜증과 불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라헬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속인 삼촌 라반을 섬겼습니다. 처음 7년은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7년은 삼촌을 섬기기가 정말 싫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라반을 섬겼습니다. 그만큼 라헬을 향한 사랑이 깊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있을 때, 그 사랑이 우리 영혼과 가슴을 가득 채울 때, 우리는 그 힘과 그 기쁨으로 까다로운 사람들도 섬길 수 있고, 하기 힘든 교회의 일들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에 문제가 생기고, 섬기는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랑에서 떠나서 신앙적인 권태기에 빠져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에 기쁨이 없는 것이 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에 열정이 없는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나의 사랑에 문제가 생겨났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시 불타오르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뜨겁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의 섬김도 억지춘향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헌신도 고통과 무거운 짐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여름, 태양이 뜨겁습니다. 그 태양을 닮으시기 바랍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식은 적이 없이 변함없는 빛과 열기를 뿜어내어 세상 만물을 살게하는 태양의 열정 흉내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다시 불붙게 될 때, 우리는 기쁘고 즐겁게 교회와 성도들을 섬길 수 있게 될 것이고, 7년을 며칠처럼 여기는 마음으로 헌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여름에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뜨거운 사랑을 회복해서 이 한 해가 우리의 기쁘고 즐거운 헌신과 섬김의 열매로 풍성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