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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현교회 설교,강의/주일예배

2013.07.21.주일오전 -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 하시니(마가복음 34)



막0731to37 - 그에게 이르시되 에바다하시니(마가35).pdf


20130721SM (#01).mp3.zip




설교본문 : 마가복음 7장 31-37절


예수님께서는 두로지방에서 악한 영에 사로잡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다음 시돈과 데가볼리 지역을 여행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근처의 이방인 거주지역을 전부 여행하시며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다시 배를 타고 유대 땅으로 돌아가시기 위해서 갈릴리 호수가로 나오셨습니다. 그 때 사람들이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 안수해 주시기를 간청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과 그 사람을 모른 척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데리고 무리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렇게 한적한 곳으로 가신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귀구멍에 손가락을 넣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침을 뱉아서 그의 혀에 가져다 대셨습니다. 이 때까지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치료된 것은 그 다음,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깊게 탄식하신 후에 이렇게 한 마디 하셨습니다. “에바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아람어인데 “열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닫혔던 눈과 입이 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귀 먹고 말 더듬었던 이 사람은 마음대로 듣고 또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젼에서 아주 감동적인 사례 하나가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수화 전문가의 이야기였는데요. 그 분은 부산 의료원에서 일하시는 분이신데, 청각장애인들을 위해서 수화로 의사와 청각장애인인 환자들 사이에서 통역을 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 분이 없으면 청각장애인들의 진단과 치료가 너무 어려운데 이 분의 수고 덕분에 환자들도 또 병원도 커다란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두 가지 경우가 정말 안스러웠습니다. 첫째는 청각장애인인 부모들이었습니다. 아이는 아픈데, 아이가 너무 어려서 아이와도 소통이 안되고, 부모가 말을 못하니 의사와도 소통이 안되어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 분은 그야말로 구세주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부모들과 상담한 후에 증상을 의사들에게 알려주어서 적절한 치료가 이루어지게 해 주었습니다. 둘째로 가장 안타까운 경우는 처음에는 청각 장애만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는 시각까지 잃어버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였는데, 이 사람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외부와 소통할 방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수화통역사는 이 환자를 위해서 그와 손을 맞잡고 손가락을 서로 만져가면서 수화로 의사소통을 하여, 의사와 환자 사이를 연결해 주고 있었습니다. 


귀와 입은 의사소통을 하려면 꼭 필요한 지체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결국 외부와의 의사소통에 커다란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듣지 못하는 것과 말하지 못하는 두 가지의 장애는 따로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두 가지의 장애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경우, 장애는 주로 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소리를 듣지 못하니, 다른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내지 못하고 그래서 결국 말도 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왔던 그 사람도 그랬을 것입니다. 먼저 귀가 이상이 있어서 혀에는 이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혀까지 굳어져 버렸던 것같습니다. 말을 아얘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말을 더듬는 정도였다고 하는 것을 보니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살펴볼 본문이지만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적은 마가복음 8장 22절 이하에 나오는 벳세다의 맹인을 고치신 사건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습니다. 고쳐주신 부분만 다를 뿐이지 완전히 같은 방법으로 고쳐주셨습니다. 손을 사용하시고 또 침을 사용하셔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치실 때처럼, 또 다른 사람들의 질병을 고쳐주실 때처럼 그저 네가 나았다고 선포하기만 하시면 될테니까요.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특별한 방법으로 두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이 두  사람의  치료에는 다른 질병을 치료와는 다른,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8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그 때가서 살펴보기로 하고,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본문의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귀 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이고,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 일은 충분히 가치있는 사건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묵상할 때,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능력 많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신할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바로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확신하며 때로는 똑같은 치료의 은혜를 기대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런 일들이 오늘날에도 똑같이 재현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들이 선포되는 중에 우리 성도들 중에 질병을 가지신 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치료되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은혜가 주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과 우리에게 베푸시고자 하시는 더 깊은 은혜는 따로 있고, 우리는 그 말씀을 먼저 듣고 또 그 은혜를 먼저 받아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앞에 두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탄식하셨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상태를 그만큼 한탄스럽고 안타깝게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이 사람보다 더 심한 질병과 큰 아픔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는 탄식하지 않으셨는데, 유독 이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탄식하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 이 사람은 그저 귀 먹고 말하지 못하는 한 사람으로 보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다른 일과 비교해서 더 특별히 심각하거나 중요한 일도 아닌데, 특별히 어떤 일이 더 크게 와 닿고 심각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다른 프로그램은 별로 보지 않지만 생활의 달인은 즐겨 시청합니다. 그저께 밤에는 부업의 달인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양주나 화장품 케이스에 레이스 장식을 해서 납품하는 한 아주머니의 이야기였는데요. 그 이야기 중간에 그 아주머니의 아들이 나왔습니다. 진행자가 그 아들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아들이 인터뷰 끝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고생하면서 저희들을 키워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정말 잘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그 곳에 앉아서 함께 일을 하던 아주머니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습니다. 자기들에게 한 말도 아닌데 말입니다. 부모라는 공통점, 그리고 자녀를 위해서 고생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그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아주머니들에게 자신의 삶을 보게 해 주었고, 그래서 그렇게 눈물을 흘린 것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아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부업의 달인 아주머니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들었기 때문에 그런 반응을 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 사람 앞에서 그렇게 크게 탄식하셨던 것은 그의 그모습을 통해 그 사람이 아닌, 더 안타까운 다른 사람들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가복음을 살펴보면서 그 속에서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아주 다양한 이유로 예수님을 찾아왔고, 또 예수님과 동행하였지만 몇 명을 제외하면, 그들은 아주 안타까운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백성들이었습니다. 수천년 동안 유일하게 하나님을 알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수를 말해주었을 때,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고사하고 그 말씀의 의미조차 깨닫지 못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손씻지 않고서 밥먹는 문제같은 사소하고 전혀 본질적인 것과는 상관없는 것을 붙들고 예수님께 시비나 걸고 말입니다. 원래 대로라면 유대인들은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바르게 반응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진리만을 말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시기에 유대인들의 상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었지만 그 안에 하나님이 없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상태였습니다. 백성들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지만, 그 말씀의 참된 의미도 모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고쳐주시면서 이방인에게서 유대인들에게서 발견하기 힘들었던 참된 믿음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있으셨겠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한 안타까움과 답답함은 더 커졌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유대 땅,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돌아가려는 예수님 앞에 귀 먹고 말을 더듬는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의 눈에는 그 사람 위에, 이제 돌아가면 만나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 들어야 하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말해야 하는데 전혀 엉뚱한 이야기만 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겹쳐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탄식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은 이렇게 고쳐주면 되지만 저 답답한 이스라엘은, 그리고 나의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생겨났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탄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탄식하게 만들었던 그 문제는 비단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느 교회에나 전혀 진리를 듣지 못하고 또 진리를 말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섞여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감정으로 충만한 신앙이 정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는 이런 일들이 별로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문제 쯤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이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탄식하시게 만들만큼 중요한 일이며,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고쳐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영적인 질병입니다. 혹시 우리들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꼭 고쳐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데리고 단 둘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사람의 치료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 싫으셨기 때문이었겠지만, 이 사건이 우리 영혼의 회복에 대한 말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런 행동 속에도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귀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잘 듣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관심이 우리 주님 보다는 다른 것에 더 많이 쏠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진리를 들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대한 깊은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나에게 더 큰 관심이 있고, 나의 현실과 상황에 더 큰 관심이 있으면,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이런 저런 이야기에 더 큰 관심이 있으면 거기에 맞는 이야기만 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또 영적인 일에 관심이 없으면 정작 진짜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듣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는 우리 영혼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청주파수 밖에 놓이게 되고 그러면 적어도 그 부분에 있어서 우리는 영적으로 귀먹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데리고 따로 단 둘이 다른 곳으로 가신 것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듣는 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청각이 회복되려면 때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리들을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단 둘이 있으면서 주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주변의 소음들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크게 들려올 때, 우리는 그 속에 섞여있는 주님의 음성을 제대로 구분할 청력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 아침이 되기도 전에 일부러 한적한 광야같은 곳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것은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오늘처럼 바쁘고 번잡한 이 시대를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는 이런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홀로 주님 앞에 나아가 성경을 통해, 기도를 통해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다시 주님의 음성을 크게 들을 수 있는 청력을 회복하는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이런 시간이 줄어들수록, 우리는 언제나 크게 울려오는 소음들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잃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시고, 손에 침을 뱉아서 그의 혀에 가져다 대셨습니다. 위생을 소중하게 여기시는 분들은 기겁을 할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이것은 그냥 지저분하기만한 행동이 아니라 꼭 필요한 행동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귀가 멀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귀가 뚫려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혀는 마비되어 있었고, 말라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귀에 손가락을 넣으셔서 그의 귓구멍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침으로 말라버린 혀를 다시 부드럽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손으로 만드시고 또 고치신다면 아마도 이런 식으로 하지 않으실까요? 모양을 만드시고, 그 모양에 걸맞는 기능을 주시기 위해서 막힌 것은 뚫으시고 닫힌 것은 열여 주시고 말라있는 것은 부드럽게 해 주시고 말입니다. 그 날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귀를 다시 만들어 선물하셨고, 또 혀를 다시 만들어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그를 새롭고 온전한 피조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영혼이 진리에 대해서 열린다는 것은 우리 영혼에 이것과 똑같은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귀가 열려있다고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도 열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의 혀가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그 진리를 말하고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입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 주셔야만 합니다.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다시 만들어 주시는 은혜가 주어질 우리는 비로소 진리를 듣고 또 담대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가 잘 들리지 않고, 우리가 내가 믿는 바에 대해서 당당하게 이야기 하기가 어려운 것은 단순히 나의 지식이나 이해력이 부족하고 또 용기나 결단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귓구멍에 그 분의 손을 넣어주지 않으셨고, 우리 혀에 손을 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 주시는 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고 풀어주셔야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그런 은혜가 주어지도록 소망해야 하며, 또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귀가 막혀있고 우리의 혀가 계속 말라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향해 탄식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귀가 들리고 혀가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귀에 손을 넣으시고 혀에 손을 가져다 대셨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다음 예수님께서 ‘에바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열려라!’라고 명령하셨을 때입니다. 그 말씀이 그의 귀를 열었고 그의 혀를 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렸을 때, 비로소 그의 귀가 열렸고 혀가 풀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두 가지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첫째는 말씀 자체가 우리 영혼의 망가진 부분을 회복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회복시키고 제 자리로 되돌려 보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에 우리의 영혼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역할도 합니다. 들리지 않던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관심이 없던 성경의 진리에 깊은 관심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너무 너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난다면 그 영혼은 회복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회복된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고쳐진 영혼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구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때부터 우리의 귀는 진리를 좋아하게 되고, 우리의 혀는 진리를 말하고 전하는 일을 즐거워 하게 됩니다. 


36절과 37절은 이 사건의 마지막 결과를 이렇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경고하사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되 경고하실수록 그들이 더욱 널리 전파하니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이유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일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목격자들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막으면 막을수록 그 사람들은 그 소식을 더 열심히 퍼 날랐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사람은 모두 다 예수님이 모든 일을 다 잘 하셨다고 칭찬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실 때, 그 가장 큰 유익은 바로 우리들이 누리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이런 저런 소리에 청각이 흐려지지 않을 수 있고, 우리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닮은 명확한 이야기들이 흘러나가게 되니까요. 그러나, 그 유익은 우리들만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식은 반드시 사람들에게로 퍼져 나가게 되어 있고, 그래서 그런 회복을 허락하신 예수님께 영광이 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언가를 한다고 대단한 일을 계획하고 또 진행하지만 실제로 그 일이 오늘 이 사건처럼 하나님을 찬양받게 하고 주님을 칭찬받게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나 또 교회적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는 한가지 오해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함으로써, 어떤 결과를 가지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는 것은 어떤 일 자체나 그 일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변화된 사람일 때, 진리를 즐겨 듣고 진리를 위해서 살아가며 그 진리를 담대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보며 하나님을 칭찬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진짜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바다’의 은혜는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이미 신앙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진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진리를 분별하며 참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더 깊고 온전한 진리 안에 거해야 할 모든 사람들에게 ‘에바다’의 은혜는 꼭, 그리고 항상 필요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권면합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이런 저런 세상의 소리와 사람들의 주장들을 떠나서 하나님께만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을 꼭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성경만 들고 영혼의 골방에 들어앉아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소리보다 더 크고 분명하게 들릴 때까지 여러분의 귀를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막힌 귀를 뚫어주시고 맺힌 혀를 풀어주시는 은혜를 달라고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우리 영혼은 진리로  건강해 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에바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은 은혜 가운데서 막힌 것이 뚫리고 맺힌 것이 풀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진리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